쪽바리 49

팔만대장경을 갖고 싶었던 일본

1. 일본은 "당신네들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기 때문에 차라리 우리가 가지겠다"고 계속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는 돌려받지 못할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저걸 주고 저들이 더 무리한 요구를 하면 걷잡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 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25일(임신년) 2. 일본은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난 날에도 또 요구하길래 우리측에서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결국 저들은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쪽바리 2022.05.29

일제에 의해 멸종된 동물들

독도 강치 연안에 서식하던 강치속의 해양 포유류로 1970년대에 절멸했다. 한국호랑이처럼 일제에 의해 한반도에서 사라진 종류중 하나 강치의 서식지는 동해 바다,독도,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해안선 일대였다. 현재 일본 각지에 박제된 표본들이 있으며, 네덜란드 라이덴 자연사박물관에도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잡아간 박제가 한 점 있다. 대영박물관에서도 일본강치의 모피 한 점과 두개골 네 점을 소유하고 있다. 옛 한국어 기록에 따르면 강치와 점박이물범이 동해 뿐 아니라 발해, 황해에도 살았다고 한다. 강치는 독도에서 많이 번식했었고 멸종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가죽을 얻기 위해 다케시마 어렵회사의 남획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이후 지속된 어업과 수렵을 원인으로 꼽는다. 독도에는 가제바위등 주변에 강치과 쉬기에..

쪽바리 2022.05.21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 벌어진 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올라온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합의 내용 https://www.mofa.go.jp/mofaj/files/000122056.pdf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의 발표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명시함. 그런데 일본은 곧 본색을 드러냈다. 일본 외무성은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심의관이 2016년 2월 16일에 UN회의에서 한 아래 발언을 홈페이지에 게재함. https://www.mofa.go.jp/mofaj/a_o/rp/page24_000733.html (호프마이스터 위원의 질문에 답하며) 서면으로도 답변한 대로 일본 정부는 한일간에 위안부 문제가 정..

쪽바리 2022.04.24

왜구와 친일파들이 숨기고 있는 대한제국의 진실

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워왔습니다. 물론 친일매국매혼세력의 농간에 의해서입니다. 아래는 '역사스페셜'을 요약정리해 둔 이미지인데 혹여나 삭제될까 자료로 작업한 것입니다. 아십니까? 아시아최초의 전차가 등장한 곳이 대한제국 수도 서울이 처음이란 사실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 친일기득권에 대한 역겨움 그리고 왜구에 대한 분노... (2014년 1월 4일짜 재업로드) 열강들의 황제국 인정 근대도시적인 도로정비 실시 도시정비및 전국토지조사실시(그 기준인 원표, 美 수도인 워싱턴 벤치마킹) 그전 서울에 흐르던 개천들이 생활하수로 악취가 진동했으나 도시정비 이후 서울은 깨끗한 도시로 변모했다. 근대적 개념의 최초 공원인 탑골공원 조성 아시아최초(일본도 없었다, 친일파와 왜구들아) 전차개통 서구에서도 화제가..

쪽바리 2022.04.10

왜(倭)가 백제의 속국임을 증명했던 "목화자단기국"- 순장바둑의 원조는?

왜구의 국보 1호가 백제 목제반가사유상이죠. 일본 아키히토의 백제 후손설은 지겹게 우려먹었고, 소설 [일본서기]를 인정한다 치면 1400년 왜의 역사는 메이지 이전까지 한반도 삼국시대 이주민이 지배한 열국시대였지요. 지금도 신라계 백제계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서구열강들이 다른 문명국들을 침략해 문화재 약탈 후 아주 뻔뻔하게 그네들 박물관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만, 왜구들은 그걸 못함, 그 이유는 약탈한 문화재 대부분이 열도의 지배자가 한민족임을 증명하는 것들이라 절대 공개를 못함. 그리보면 참 왜구들 가증스러움. 서구는 적어도 고대사에 있어 역사왜곡은 하지 않음. 그러나 이름이 말하듯 한족(이방인 화하족)과 왜는 진실을 숨기고 역사를 왜곡하는데 아주 파렴치하게 자행하는 미개한 야만족들이죠...

쪽바리 2022.04.03

명량해전이 중요한 해전이었던 이유

기적처럼 '13척 VS 수백척' 을 이긴 이순신 장군의 해전이라는 걸 떠나, 이 명량해전은 한편으로 보자면 외교적-전략적 의미도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렇냐면... 직산전투 이후 임시로 남하했던 일본군들은 명량해전의 여부에 따라 * 다시 북상할 예정이었고 그들의 보급은 다시 한번 황해안 일대를 휘젓는 일본의 수군으로부터 충당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 조선의 조운 체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황해안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게 어떤 의미이냐면... 사실상 모든 물류의 유통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는 소리다. 뿐만 아니다. 황해안 인근의 기항지가 있는 거점들을 점령당한다면 명나라의 해안과도 가까워지는데... 다르게 말하자면 명나라도 해안가에서 일본 정규군의 직접 타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쪽바리 2022.03.20

1972년에 촬영된 실제 ‘군함도’의 모습

다카하시 마사란 사람이 72년도의 하시마 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친구와 함께 큐슈를 여행하던 도중 돈이 다 떨어져 가고 있던 와중, 거리에서 작업원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고 197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잠깐 일하는 동안 찍었다고 한다. 72년이면 탄광이 폐광되는 74년도로부터 약 2년 전으로 이때는 이미 많은 주민들이 섬을 떠난 후라고 합니다. 해서 사진들을 보면 흑백 사진인 점도 있지만 굉장히 썰렁한 모습들을 보입니다. 군함도의 전경 폐광 전부터 이미 석탄산업이 저물어 가면서 점차 섬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섬에서 빠져 나가고 있던 상황 속에서 1974년, 폐광이 결정, 남아 있던 주민들마져 완전히 섬을 빠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어 폐허로 ..

쪽바리 2022.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