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강치
연안에 서식하던 강치속의 해양 포유류로 1970년대에 절멸했다.
한국호랑이처럼 일제에 의해 한반도에서 사라진 종류중 하나 강치의 서식지는 동해 바다,독도,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해안선 일대였다.
현재 일본 각지에 박제된 표본들이 있으며, 네덜란드 라이덴 자연사박물관에도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잡아간 박제가 한 점 있다. 대영박물관에서도 일본강치의 모피 한 점과 두개골 네 점을 소유하고 있다.
옛 한국어 기록에 따르면 강치와 점박이물범이 동해 뿐 아니라 발해, 황해에도 살았다고 한다. 강치는 독도에서 많이 번식했었고 멸종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가죽을 얻기 위해 다케시마 어렵회사의 남획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이후 지속된 어업과 수렵을 원인으로 꼽는다.
독도에는 가제바위등 주변에 강치과 쉬기에 좋은 바위가 많고 난류와 한류가 뒤섞여 먹이가 풍부해 강치들의 주요 번식지이자 서식지였다고한다.
그래서 '강치의 천국'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세기들어 일본 어부들이 한 해에 많게는 3천~ 3천200마리를 잡았으며, 이후 포획량이 줄어 연간 2천마리 1천마리 정도 남획하다가 결국 멸종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강치를 '가제' 또는 '가지'로 불렀으며, 독도를 중심으로 동해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다고 한다. 이들이 머물렀다는 가제바위가 독도에 남아 있다.
러일 전쟁 전후로 가죽을 얻기 위해 시작된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일본강치는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춰으며, 1974년 홋카이도에서 새끼 강치가 확인된 이후로 목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조몬 시대의 패총들에서 많은 강치 뼈다귀가 발견된 바가 있다고한다. [718세기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에 따르면 강치 고기는 맛이 없으며 호롱불을 밝히기 위한 기름을 짤 때나 썼다고 한다.
피부와 내부 장기에서 뽑아낸 기름은 한약재로 사용되었고, 눈썹과 가죽은 각기 담뱃대 소제기와 피혁 제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서커스에서 부려먹기 위해 잡아갔다.
1900년대 초 일본의 상업적 어획 기록을 살펴보면 그 세기 전환기에 3,200마리 정도의 강치가 포획되었으나, 남획으로 인해 1915년에는 불과 300마리만 잡힐 정도로 포획량이 급감했고 1930년대에는 수십 마리 정도로 떨어졌다.
일본의 상업적 강치 사냥은 1940년대에 종료되었으나 이때 이미 사실상 멸종했다. 일본의 저인망 어선들은 16,500 마리 이상의 일본강치를 포획하여 그 멸종에 심대한 기여를 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잠수함 작전 역시 강치의 서식지 파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강치의 가장 최근 목격담은 1970년대에 있었으며, 최후의 확인된 표본은 1974년 홋카이도 북부 레분 섬에서 포획된 어린 개체이다.
삽살개
삽살개는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의 명견 중 하나로
일본으로 데려가 교배 실험용으로 많이 쓰였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개를 싫어하여 수없이 잔인하게 죽여 지금은 많이 복원되었지만 일제시대 때 멸종될뻔한 삽살개입니다.
늑대
한반도에 서식했던 늑대들은 동북아에 서식하는 늑대들과 다른 고유의 개체를 가진 종이었다.
진한 갈색의 털에 튼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일제에 의해 3000여 마리가 사냥 당하며 한반도에서 완전히 멸종되었다. 현재 유전학자들에 의해 복원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호랑이
한반도에 서식했던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 종으로, 덩치가 매우 크고 사나웠다.
예로부터 크코 사나운 맹수를 산의 주인이라 부르며 숭배하던 일본은 조선의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사냥꾼들을 대거 불러들여 호랑이를 사냥했다.
호랑이는 본래 먹이 사슬의 최정점이라 개체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 시대에만 800마리의 호랑이가 사냥을 당했고, 한반도의 호랑이는 완전히 멸종했다.
현재 중국쪽에 한반도 호랑이들의 후예들이 있는 것으로 보고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표범
한반도의 표범은 아무르 표범이라 부르며 줄무늬가 매우 뚜렷하고 덩치가 일반 표범에 비해 컸다고 한다.
역시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산의 주인을 죽여 민족 정기를 없앤다는 일제의 만행에 무려 2000마리가 사냥을 당하며 한반도에서 멸종했다.
중국에 극소수 남아있던 아무르 표범을 들여와 남북한을 합쳐 총 10마리 정도 동물원에서 보존 중이다.
마지막 표범 '한표'
오창영 박사의 '한표의 추억'
1960년 합천군에 있는 오도봉에 < 표범 확인, 내일 올라감 >이라는 전보가 날라왔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창경원에 도착한 표범을 미리 준비한 우리에 풀어놓고 살펴보니 복슬복슬 탐스러운 1년된 수컷이었다.
한국표범인만큼 눈매가 벌써 날카로웠지만 하는 짓은 어린티가 남아 귀엽기 그지 없었다. 합천의 오도봉에서 온 표범은 한국표범의 좋은 특징을 고루 갖춘 것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굵직한 다리, 날씬한 몸매, 힘차게 뻗은 꼬리, 윤택한 털빛, 큼직한 고리무늬하며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다.
1973년 한표군은 그해 7월 19일 열두살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오직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던 한국표범이 역사에서 사라진 순간이었다. 표범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사는 지역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그 가운데서도 동북아시아의 아무르표범을 으뜸으로 친다.
아무르표범에 속하는 한국표범은 예로부터 표범 중의 표범으로 한층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종류의 동물이 남북으로 퍼져있을 때 북쪽의 것일수록 몸집이 커진다. 또 남쪽의 것은 털이 짧고 성기며 색이 진하고, 북쪽의 것일수록 털이 길고 촘촘하며 색이 흐려진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른 사계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한국표범같은 좋은 범이 길러지는 것이다. 사라진 한국표범 ,그러나 이제는 남한에서 더이상 표범을 볼 수 없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미련이 남아 있다면 북쪽에 대한 기대다. 북한에서도 범들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소수나마 살아있다고 한다. 부디 잘 보살펴 멸종만은 면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한국표범이 사라진 까닭. 이 땅에서 범이 자취를 감추게 된 원인은 일제시대에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결과다. 원래 한반도에는 범이 득실거릴 정도로 많이 살고 있었다.
자연계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범과 같은 맹수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먹잇감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해로운 범을 없애서 백성들을 편하게 해준다는 구실로 마구잡이로 범사냥에 나섰다.
일본인 경찰과 헌병들로 토벌대를 만들고 주민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하여 신식 총으로 온 나라를 누비며 싹 쓸어 잡았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1919년부터 1924년까지 6년동안 잡힌 호랑이가 65마리, 표범이 385마리였다고 하니 우리 나라에서 범들이 얼마나 빠르게 줄어들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기록에 남겨진 숫자이기 때문에 실제로 잡힌 범의 숫자는 몇 갑절 더 많았을는지 모른다. 게다가 일제시대의 마구잡이 사냥에 이어서 6.25전쟁으로 산과 들이 불타 없어져 야생동물이 살아갈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여우
붉은여우과에 속하는 한반도 여우는 여우털을 이용한 사치품을 제작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냥 당했다. 당시 일본 귀부인들 사이에선 조선 여우 가죽으로 만든 제품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수십년간 멸종된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우리 나라에서 수컷의 시체가 발견되어 극소수의 숫자가 아직 우리 나라 야생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급히 보호종으로 지정되고 종의 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으나 지금도 밀렵꾼들이 설치한 올무와 덫에 희생되어 얼마 남지 않은 숫자가 줄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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