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이 좋아요.... 201

평생도

평생도(平生圖) 평생도(平生圖)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일생을 통해 겪을 수 있는 부귀영화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돌잔치인 초도일(初度日)부터 시작하여 혼례, 과거 급제, 관직 진출과 출세, 부부가 해로하여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회혼례(回婚禮)까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대부가 누릴 수 있는 평생의 중요한 사건과 의례를 담는다. 그러나 평생도는 기록화가 아니라 길상적 요소를 담은 일종의 풍속화이다. 이러한 평생도는 18세기 후반 풍속화의 발달과 더불어 탄생한 화제(畫題)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하는 평생도 중에서는 김홍도(金弘道) 작품으로 알려진 와 가 유명하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 ~ 1615)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 170..

양반집의 반주(飯酒)

양반집의 반주(飯酒) 한국이 고급 위스키 소비에서 11년째 세계 1위라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 한 해 인구가 우리보다 6배나 많은 미국이 47만 상자를 소비한 데 비해, 한국은 무려 69만 상자를 마셔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집안의 필수적인 덕목이 '접빈객 봉제사(接賓客奉祭祀)'이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 접대를 잘해야 하고, 조상 제사를 잘 모시는 일이 양반 집안이 갖추어야 할 품격이었다. 접빈객이 살아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수평적인 배려라고 한다면, 봉제사는 죽은 조상들에 대한 수직적인 봉사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덕목을 이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술이었다. 손님이 오면 우선 술상을 봐와야 할 것 아닌가. 제사 지내는 데 술이 없을 수 없다. 고..

조선시대 군의 검, 환도

환도는 조선시대의 군의 칼이다. 환도에 대한 기록은 1277년 고려에 몽골사신이 와서 이장무와 함께 환도를 만들기 시작한것이 최초이며 고려후기에 들어온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환도와 일본도의 구분법 일본도 환도 구분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데 젤 쉬운게 그냥 장식을 보면된다 (칼날단면. 즉, 육각도,배형도,편삼각도 등으로 구분하는건 복잡 함) 환도는 칼 양끝에 '금속장식'과 '칼집에 띠돈'이 달려있고, '자루에 술'이 달려있다. 띠돈에 군복용 허리띠를 걸어 패용(착용)하는 방식이다. 일부 환도 칼집에는 칼을 뽑을수 없게 락킹 버튼이 있는 경우도 있다 *환도 패용법 환도는 칼자루가 뒤로 가도록 패용했다 그 이유는 1. 말 탔을 때 걸리적 거리지 않음 2. 활 쏠 때도 걸리적 거리지 않음 때문이였다 넷플릭스 킹..

조선왕조의 궁중음식과 사대부 밥상

조선왕조의 궁중음식과 사대부 밥상 Part 1. 수랏상 차림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만큼 뛰어난 음식 문화를 전승해 왔다. 특히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결정체이다. 궁중음식은 8도의 각 고을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으로 조리기술이 뛰어난 주방 상궁과 대령숙수들의 손에 의해 최고의 조리법으로 정성껏 조리되었다. 왕, 왕비, 대비등 왕실의 핵심 어른들에게 하루에 총 5차례의 식사가 내어졌는데, 이른 아침의 초조반, 아침수라, 점심의 낮것상과 저녁수라, 밤중에 내는 야참 등이 있었다. 주로 아침수라는는 오전 10시경에, 저녁은 오후 5시경에 먹었다. 수라상 수라상은 붉은 주칠을한 호족반 2개와 네모난 책상반의 총3개로 구성되어있다. 주칠원반은 대원반과 소원반으로 똑같은 모양이지만 크기에는 차이가 있었..

갓에 숨겨진 은밀한 매력

갓에 숨겨진 은밀한 매력 2019년 방영된 드라마 의 반응은 놀라웠다. 특히 외국인은 조선시대 모자인 ‘갓’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각종 리뷰에는 ‘좀비와 모자에 대한 드라마’, ‘팬시한 모자, ‘아름다운 모자’ 등 좋은 반응이 이어졌다. 또 사람들은 영어의 ‘신(God)’과 같은 발음인 ‘갓’ 을 ‘Oh, My Gat’ 등의 언어유희로 즐기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1900년대에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갓을 쓴 조선 사람들을 ‘의장(儀裝)을 갖춘 범선’, ‘모자의 나라 사람들’ 등으로 부르며 책과 신문에 기록을 남겼다. 01.갓의 모정에는 '정꽃'으로 불리는 장식이 들어간다. ©국립대구박물관 흑립, 너는 어디서 왔는 갓 ‘갓’은 순수한 한국말이며 한자..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은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은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 我邦乃三韓之地, 而國初受命, 統合爲一。 今定有天下之號曰‘大韓’, 未爲不可。 且每嘗見各國文字, 不曰‘朝鮮’, 而曰韓者, 抑有符驗於前, 而有竢於今日, 無待聲明於天下, 而天下皆知大韓之號矣。」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고종실록 34년(광무1년, 1897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자주성을..

세종은 어떻게 인의 장막을 극복했나?

“왜 길가에 구경하는 백성이 한 명도 없는가?” 1444년(세종 26년) 5월 5일 청주 초수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종이 한 말이다. 두 달 전 내려갈 때와 달리 관광(觀光)하는 백성이 안 보이는 이유를 승정원에 알아보게 했다. 조사 결과, 인민들의 왕의 수레 앞 하소연을 경기관찰사 이선(李宣)이 금지시켰음이 드러났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국가에서 사람을 보내 백성들의 이해를 살피려 하면, 수령들이 미리 단속해서 감춘다는말을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실상을 알았다”면서 자기 허물을 덮어 가리려는[欲掩己過·욕엄기과] 경기관찰사를파직시켰다. 세종까지도 경험한 “옹폐(壅蔽)”, 즉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지도자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옹폐라는 말..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 반대하자 빡친 세종대왕이 내린 형벌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한 세계적인 발명품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지시로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와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로 의견이 분분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혼자 직접 창제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돕기는 커녕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후 백성들에게 반포하자 비난하고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첫번째, 조선은 대대로 중국의 제도를 높이 보며 섬기며 살아왔고 그래서 중국과 같은 한자를 쓰고 있는데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중국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두번째는 당시 조선에는 한자를 변용시켜 만든 ‘이두’라는 문자가 있었는데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자였다. 하지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