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정치’가 행해진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배석자 없이 단둘이 만나는 독대(獨對)가 금기시되었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조선 전기만 해도 독대가 심심치 않았다는 사실은 세종 7년 사간원에서 올린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옛적에는 사관(史官)을 두어서 임금의 행동을 반드시 적고, 그때의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공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관이 참여하지 못하면 그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을 어떻게 해서 후세에 전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독대가 말썽을 빚었다는 기록은 없다. 세종, 성종, 중종, 선조 때도 독대는 있었다고 한다. 특히 효종 때 북벌을 주장한 우암(尤庵) 송시열이 1659년 효종과 독대한 일은 ‘독대설화’라는 기록으로 훗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독대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인 것은 1717년 노론의 대표격인 좌의정 이이명이 숙종의 부름으로 독대했을 때다. 독대 직후 임금은 건강을 이유로 세자에게 청정할 것을 명했다. 세자란 장희빈의 아들로 뒤에 경종이 된 인물이다. 당시 소론측은 “전하가 어찌 상신(相臣)을 사사로운 신하로 여길 수 있으며 상신 또한 어찌 감히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몰아붙였다. 치열한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왕에게 누가 세치 혀를 놀려 세상이 피바다로 변할지 모를 상황이었으니 파문이 일 법도 하다.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이 대학특강에서 대통령과의 독대 필요성을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참여정부가 협의체·회의체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해왔지만 대통령과 장관의 독대를 통한 의사소통도 필요하다는 취지다. 사실 과거 대통령 독대가 한국정치에 미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보정치’ ‘정경유착’의 상징으로 여겨진 국정원장, 재벌총수의 대통령 독대, 측근들의 언로 독점이 그 예다. 반면 공개된 장소에서 하기 어려운 ‘충언’ ‘직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독대의 장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소통의 정치문화’가 중요한 것이지, 독대 자체가 좋다 나쁘다는 부차적 문제인 듯하다.
〈송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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