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이 좋아요....

깨끗한 책상

황령산산지기 2006. 3. 12. 20:57
봄을 맞은 대학 캠퍼스는 이제 갓 대학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들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새 학기를 맞아 대학의 시설물들을 정비하며,몇 년이 지나도 깨끗한 얼굴로 학생들을 맞는 강의실 책상들을 보면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리고 괜히 흐뭇한 웃음을 짓게 된다.

보통 강의실 책상들은 학생들이 시험을 대비해 미리 적어 놓은 다양한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시험 기간 중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커닝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갖가지 기발한 커닝 아이디어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구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대학의 총장으로 처음 업무를 시작할 때 학생들에게 정직을 가르쳐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고민스러운 과제였다. 과연 어떻게 학생들에게 정직을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학생들에게 정직을 가르치는 대신 아이들을 믿기로 했다. 대학에서 치러지는 모든 시험에 감독관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이른바 무감독 양심시험이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의견도 많았다. 과연 지켜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학생들을 신뢰하기로 했다. 시험장에서 학생들을 감독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졸업하고 세상에 나갔을 때 분명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바로 그 순간이 오게 될 때도 우리가 그들을 감독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양심시험의 결과가 나옴에 따라 믿음은 확신이 되어 돌아왔다. 자신들을 신뢰해준 교수들의 믿음에 학생들이 감동한 것이다. 정직을 가르쳤다기보다 학생들 마음 속 정직의 가치가 깨어난 것이었다. 초창기 학생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던 이 시스템이 우리 대학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스스로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첫 졸업생을 내보내던 해 겨울,과연 정직의 가치가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스스로 반문했다. 그러나 세상 곳곳에서 들려온 졸업생들의 아름다운 소식은 세상이 얼마나 정직의 가치에 목말라하고 있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졸업생 중 한 명은 국내 모 대기업의 입사시험에 합격,한 달에 걸쳐 신입사원 연수를 받게 되었는데,연수 기간에 치러진 수많은 시험 가운데 매우 어려운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답안에 도움이 되는 쪽지가 돌았고,이 학생도 참기 힘든 유혹을 느꼈지만 그냥 백지를 냈다. 그런데 입사 동기 중 이 학생이 가장 좋은 평가점수를 받게 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감독관이었던 분이 다른 응시자들의 천편일률적인 답안 속에 눈에 띈 백지 답안 한 장을 보고 이 졸업생을 불러 물었다고 한다. 감독관의 질문에 이 청년은 정말 모르는 문제였기에 백지를 냈다고 했고 감독관은 사실은 정규 과정에 없는,시험삼아 내본 어려운 문제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일로 이 청년은 정직이라는 가치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반전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물질문명의 법칙 중에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이 있다. 이는 모든 물질은 질서에서 무질서의 형태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공중에 퍼진 연기 기둥이 주위로 퍼지고,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이 희석되며,큰 바위가 풍화를 거쳐 가는 모래로 변해가는 것들이 그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그 속성상 서서히 무질서의 상태로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정직이라는 등불로 밝히는 청년들이 있는 한 세속화돼가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가져본다. 정직은 거친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오늘 돌아본 캠퍼스 강의실에서 만난 깨끗한 책상들은 그저 책상이 아닌 세상을 비추는 환한 등불처럼 느껴졌다.

김영길 총장(한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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