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스크랩]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진 날 2002.5.11.

황령산산지기 2007. 2. 1. 11:30


1969년 뉴욕에서 출판된, 루이스 캐롤 Lewis Carroll (1832-1898) 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를 위한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의 일러스트레이션 (에칭과 과슈)




토끼굴 속으로
Down the Rabbit-Hole



눈물의 못
The Pool of Tears



흰토끼가 작은 빌을 들여보내다
The Rabbit Sends in a Little Bill



쐐기벌레의 충고
Advice from a Caterpillar



미친 다과회
A Mad Tea-Party



여왕의 크로케 경기장
The Queen's Croquet-Ground



가짜거북의 이야기
The Mock Turtle's Story



누가 파이를 훔쳤나?
Who Stole the Tarts?



츠베르거, 앨리스

◀ Illustration (1999) by 츠베르거 Lisbeth Zwerger (1954-)

    "이틀이나 틀리게 가는군!" 모자 장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3월 토끼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버터는 시계장치에 안 맞는다고 했지!"
    "그건 최고의 버터였는데," 3월 토끼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빵 부스러기가 같이 들어간 게 틀림없어," 모자장수가 투덜거렸다. "그걸 빵 자르는 나이프로 넣지 말았어야지."
    3월 토끼는 시계를 집어들고 우울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그걸 찻잔에 집어넣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처음 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는 별 수가 없었다 "그건 알다시피 최고의 버터였어."

    `Two days wrong!' sighed the Hatter. `I told you butter wouldn't suit the works!' he added looking angrily at the March Hare.
    `It was the BEST butter,' the March Hare meekly replied.
    `Yes, but some crumbs must have got in as well,' the Hatter grumbled: `you shouldn't have put it in with the bread-knife.'
    The March Hare took the watch and looked at it gloomily: then he dipped it into his cup of tea, and looked at it again: but he could think of nothing better to say than his first remark, `It was the BEST butter, you know.'


    어렸을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를 한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 같습니다. 최소한 짧은 그림책으로라도 말이죠. 하지만 요약본이 아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은 과히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 장난만 잔뜩 나와서 짜증난다는 사람도 있고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는 사람까지 있으니까요. ^^

    저 역시 어렸을 때는 이 이야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체셔 고양이 Cheshire Cat 가 "여기서는 우리 모두 미쳤어.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고. We're all mad here. I'm mad. You're mad." 라고 말한 것처럼, 앨리스가 만나는 이상한 나라 Wonderland 의 사람과 동물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데다가, 영어를 잘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이용한 유머가 계속 나오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만이 웃을 수 있는 패러디 시가 여러 편 나오니까요.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짜증나게 한 것은, 훌쩍거리다가 갑자기 화를 내다가 또 갑자기 신이 나서 춤을 추다가 하며 (이건 조울증 증세가 아닌가?) 끝없이 말 장난을 늘어놓는 가짜 거북 Mock Turtle 이었는데, 저는 그놈의 목을 움켜잡고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했습니다.


래컴, 가짜거북
Illustration (1907)
by 래컴 Arthur Rackham (1867-1939) ▶

    가짜 거북은 가짜 거북 수프가 무엇인지 알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북으로 만드는 초록빛 수프가 실제로 있는데, 가짜 거북 수프는 소머리고기 같은 것으로 거북 수프를 흉내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음...진짜나 가짜나 별로 먹고 싶지 않다...) 그런데 캐롤은 가짜 거북 수프의 재료인 가짜 거북이 있다고 상상한 것이죠. 정말 재치있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최초로 출판된 "앨리스"의 삽화를 그린 존 테니얼 Sir John Tenniel 은 가짜 거북을 소의 머리와 뒷발굽, 꼬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고 오른쪽의 삽화를 그린 래컴을 비롯한 수많은 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이러한 표현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앨리스"는 어딘지 내 마음을 끄는 데도 있었습니다. 일단 따분한 교훈이 나오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다른 동화의 틀에 박힌 인물들과 다른 것이 (다들 미쳐서 탈이긴 했지만) 좋았습니다. 너무 깊어서 천천히 떨어지게 되는 토끼굴, 서서히 사라지며 형체는 없어지고 웃음만 남는 체셔 고양이, 카드의 왕과 여왕, 병정들, 홍학 채와 고슴도치 공으로 하는 크로케 같은 기발한 환상들도 재미있었죠.

    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머와 풍자들도 가끔은 있었습니다. 앨리스가 자기 발에게 선물을 보낼 생각을 하는 것이라든지, 판결보다 선고가 먼저라고 외치는 하트의 여왕 the Queen of Hearts 이라든지. 그리고 다른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지나치게 반듯하고 착하지도 않고 반대로 지나치게 말썽꾸러기도 아닌, 전반적으로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견이 뚜렷한 소녀 앨리스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와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앨리스"의 영어 원서를 접하면서 단어와 논리의 비틀림에서 나오는 "앨리스"의 유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몇몇 재치있는 대화에서는 철학적 향기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미국의 수학자 마틴 가드너 Martin Gardner의 "주석이 달린 앨리스 The Annotated Alice" 같은 책을 통해 "앨리스"의 유머의 시공간적 배경을 알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제게 더 많은 매력을 지니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죠. 아마도 제가 느낀 것과 비슷한 매력 때문에 이 동화는 빅토리아 시대의 어린이와 어른들 모두를 열광시켰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 같습니다.


앨리스, 사진
◀ 앨리스 리델 Alice Liddell 의 사진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롤 Lewis Carroll (1832-1898)은 본명이 도슨 Charles Lutwidge Dodgson 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 강사였습니다. 그가 어느 화창한 오후에 자신의 꼬마 친구들인 리델 학장의 어린 딸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그중 둘째인 앨리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즉흥적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 동화의 시초입니다. 왼쪽에 앨리스 리델의 사진이 있습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꼬마 아가씨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캐롤은 독특한 종이접기나 퍼즐, 게임 같은 것을 고안해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어린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여자 어린이들과 친했고,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이는 바로 앨리스 리델이었습니다. 그는 또 평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캐롤이 일종의 롤리타 신드롬 Lolita Syndrome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남자의 성적 집착)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답니다.

    그러나, 후에 어른이 된 앨리스 리델이나 캐롤과 친했던 다른 소녀들의 회고담, 또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캐롤이 이런 소녀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인 적은 결코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캐롤의 어린 소녀들에 대한 다소 지나친 그러나 순수한 사랑은 아주 기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단지 제 생각인데, 캐롤은 롤리타 신드롬이 아니라 피터 팬 신드롬 Peter Pan Syndrome (성년이 되어도 성인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소년의 심리를 유지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성인이 되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평생 퍼즐과 게임 같은 놀이를 즐겼으며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해요. 캐롤의 앨리스 리델에 대한 사랑도 성인 남자가 어린 소녀에 대해 갖는 비뚤어진 성적 집착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같은 또래의 소녀에게 갖는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멋대로의 추측일 뿐입이다. ^^


허드슨, 앨리스2
  Illustration (1922) by Gwynedd M. Hudson ▶

    사형집행인의 주장은 머리로부터 잘라낼 몸이 없다면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일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The executioner's argument was, that you couldn't cut off a head unless there was a body to cut it off from: that he had never had to do such a thing before.


    어쨌든 자유로운 환상과 광기, 유머와 풍자로 가득 찬 "앨리스"는 20세기 초현실주의 Surrealism 문인들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가 맨위에 소개한 그림들은 이 동화를 사랑했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e Dali (1904-1989)가 1969년 출간된 "앨리스"를 위해 그린 삽화입니다. 억압된 무의식을 표출하고, 자유롭고 불합리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좇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이상한 나라야말로 모범적인 무의식의 세계였죠.

    달리의 다른 작품 속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세계는 그 찬란한 햇빛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음산한데,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이란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그런 음산함이 없이 발랄하고 유머스럽기만 해서 달리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또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후안 미로 Joan Miro의 작품을 연상케 합니다. 아마 앨리스와 같은 순수한 어린아이는 그 무의식이 억눌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앨리스"가 이렇게 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이 동화를 지나치게 해석하려는 시도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의 근간인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의 정신분석학에 의해 "앨리스"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았죠. 전에 제가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이야기를 할 때 평론가들이 지나치게 비교분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그뿐 아니라 평론가들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잘한 사물이나 사건 하나하나를 어떤 상징으로 보고, 정작 작자 자신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의미를 부여해서 꿈보다 해몽이 더 거창해지게 만드는 것이죠.


허드슨, 앨리스1
◀Illustration (1922) by Gwynedd M. Hudson


    이를테면 앨리스가 토끼굴로 빠지는 것은 질을 통해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회귀라느니, 하트의 여왕에 눌려지내는 하트의 왕은 캐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 (아들이 어머니를 성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가 뒤집어져 나타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죠. "주석이 달린 앨리스"를 쓴 마틴 가드너는 이러한 시도를 비판하며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너무나 많은 상징을 만들고 그런 상징은 수만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가드너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갑니다만 정신분석학적인 해석 중에서도 프로이트적인 해석, 즉 인간의 모든 정신과 행동을 리비도 libido (성 본능) 에 바탕을 두고 해석하려는 것은 그 편협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프로이트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고 그의 이론에 맞는 부분도 많긴 하지만요. 프로이트가 이것을 처음 주장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도덕주의자들의 지탄을 받았지만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오히려 아들러 Alfred Adler 나 융 Carl Gustav Jung 같은 정신분석학의 계승자들과 문화인류학자들에게서 그 편협성 때문에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리감, 갈등과 긴장의 원인이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둔 경쟁의식에서 생긴다는 것이죠. 그러나 후세의 인류학자들은 모계 사회나 가부장제가 약한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런 긴장감이 없이 허물없고 다정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부자간의 미묘한 갈등은 어머니에 대한 경쟁심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경쟁, 즉 가부장제에서 절대권력을 쥔 아버지와 언젠가 그것을 승계할 아들 간의 당연한 갈등이라는 것이죠. 이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비롯한 프로이트적 해석은 그 힘을 많이 잃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프로이트적 해석이 힘을 얻고 있는 것같습니다. 아마 우리 사회가 성 논의에 대한 억압이 아직도 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일종의 반발 작용인 것같습니다.


테니얼, 공작부인    "앨리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왜 이런 데로 나갔는지... ^^;; 하여튼 저는 "앨리스"를 보는 데 있어서 지나친 심리학적 분석은 경계하라는 수학자 마틴 가드너의 견해에 동의하고 "앨리스"를 좀더 음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가드너의 "주석이 달린 앨리스"를 권합니다. 가드너는 자신의 견해대로 골치아픈 상징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피하고 단지 이 동화의 기괴한 노래들이 어떤 노래의 패러디인지 등의 꼭 필요한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또 수학자답게 "앨리스"에 등장하는 수학 이론과 논리와 관련된 유머들(작가 캐롤이 수학자였기에 이런 유머들이 많습니다.)을 지적하고 그와 관련된 현대의 이론들을 소개해 주죠. "앨리스"는 사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못지 않게 과학자와 수학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게 위해 곧잘 "앨리스"를 인용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작아지는 약을 먹고 무서운 속도로 몸이 줄어들어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앨리스를 예로 들어 축소에 의한 우주 소멸을 설명하는 거죠.

    동화 이야기인데,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게 나가는 것 같군요...^^;; 오늘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며칠내로 독자게시판의 보조칼럼에서 "앨리스"의 더 많은 삽화들과 제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구절들을 소개해 드리죠. 수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앨리스"의 삽화를 그렸는데, 최초의 일러스트레이터는 1865년 초판의 그림을 그린 존 테니얼입니다. 바로 위의 그림이 그의 그림입니다. 후대의 수많은 삽화들과 1951년 제작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까지도 모두 테니얼이 그린 최초의 삽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답니다.





보조칼럼


    먼저 앨리스와 쐐기벌레의 대화를 소개하죠. 위의 그림은 잘 알려진 영국 출신 일러스트레이션의 대가 래컴 Arthur Rackham (1867-1939)의 작품이고 아래 그림은 역시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아트웰 Mabel Lucie Attwell (1879-1964)의 작품입니다.


래컴, 쐐기    "는 누구지?” 쐐기벌레가 물었다.
    이건 기운나는 대화의 시작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내키지 않게 대답했다, “나...나도 거의 모르겠어요, 바로 지금은...최소한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가 누구였다는 건 아는데, 그때부터 여러번 바뀐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애벌레는 엄격하게 말했다. "너자신을 설명해 봐!"
    "나는 나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니까요, 죄송하지만요." 앨리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아닌걸요, 아시겠지만."
    "모르겠는데." 애벌레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앨리스는 아주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나자신도 잘 모르겠거든요. 하루에 크기가 여러 번 바뀌는 건 아주 혼란스러운 일이에요."
    "그렇지 않다." 애벌레가 말했다.
    "그렇다는 걸 아직 알지 못하실 뿐일 거예요." 앨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도 언젠가는 번데기가 돼야 할거고 - 아시겠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거예요 - 그 다음엔 나비로 변하겠죠. 그땐 좀 이상한 느낌이 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혀." 애벌레가 말했다.
    "글쎄요, 아저씨 느낌은 다를 수도 있겠죠." 앨리스가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적어도 에게는 그건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거라는 거예요."
    "너!" 애벌레가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네가 누군데?"

    ‘Who are YOU?’ said the Caterpillar.
    This was not an encouraging opening for a conversation. Alice replied, rather shyly, `I--I hardly know, sir, just at present-- at least I know who I WAS when I got up this morning, but I think I must have been changed several times since then.'
    `What do you mean by that?' said the Caterpillar sternly. `Explain yourself!'
    `I can't explain MYSELF, I'm afraid, sir' said Alice, `because I'm not myself, you see.'
    `I don't see,' said the Caterpillar.
    `I'm afraid I can't put it more clearly,' Alice replied very politely, `for I can't understand it myself to begin with; and being so many different sizes in a day is very confusing.'
    `It isn't,' said the Caterpillar.
    `Well, perhaps you haven't found it so yet,' said Alice; `but when you have to turn into a chrysalis--you will some day, you know--and then after that into a butterfly, I should think you'll feel it a little queer, won't you?'
    `Not a bit,' said the Caterpillar.
    `Well, perhaps your feelings may be different,' said Alice; `all I know is, it would feel very queer to ME.'
    `You!' said the Caterpillar contemptuously. `Who are YOU?'
 


아트웰, 앨리스     이 대화에서 앨리스는 몸의 크기가 여러 번 변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다"고 하죠. 앨리스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앨리스는 토끼굴에 빠져 이상한 나라에 온 이후로 평소 잘 외우고 있던 노래 가사나 구구단 같은 것을 전부 틀리게 (그것도 아주 기이하게 틀리게) 외우게 되죠. 그래서 앨리스는 자신이 혹시 공부 못하는 자기 친구와 바뀐 것이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합니다. ^^

    이 이야기는 그저 귀여운 유머일 수도 있겠고 또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상한 나라라는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와서 자신의 모습 중 감추어졌던 부분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과연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앨리스는 기억이 비틀리고 크기가 마구 변하면서 자신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나"라는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축적된 기억과 외적인 모습이 형성하고 있죠. 그중에서도 기억은 특히 중요합니다. SF 영화에 많이 나오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 - 내가 배워서 아는 것들, 내가 경험해서 아는 것들, 나의 인간관계, 세계에서의 나의 위치 같은 것들 - 이 조작된 것이거나 타인의 기억을 주입받은 것이라면 그때는 과연 "나"는 누구인가 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겠죠.

    기억의 주입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 "토탈 리콜 Total Recall (1990)"이나 "다크 시티 Dark City (1998)" 같은 영화들은 기억을 뛰어넘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인간 본성 또는 고유의 영혼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은데...음...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군요...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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