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스크랩] 그림형제와 그림들

황령산산지기 2007. 2. 1. 11:28

  지난주에 영화 “그림형제 The Brothers Grimm" 를 봤는데요.

  제가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이거랍니다. 영화 구성상 핵심적인 장면은 아니지만요.

 

 

  거울여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인데, 자신의 결혼식 중에도 식 진행에는 관심이 없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였죠.
  저 장면을 보니까 티치아노의 이 그림이 생각나는 거예요.

 

거울을 보는 비너스 (1555)

티치아노 Tiziano Vecellio (1485-1576) 작
캔버스에 유채, 124x104cm,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이 그림에서 비너스는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서 감탄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저 자아도취적인 모습이 거울여왕과 상당히 닮지 않았나요?
  그리고 워터하우스의 이 그림도 생각났죠.

 

허영 Vanity (1910)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작
캔버스에 유채, 66x68.5cm

 

  이 그림 속 좀더 심하게 자아도취적인 여성의 표정이 거울여왕을 꼭 닮았거든요.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은 표정이에요.

  아, 그런데 그녀의 머리에 꽂힌 꽃을 보니... 허영 스머프가 생각나는군요. 혹시 허영 스머프를 이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바탕으로 만들었나...?

 

 

   영화 “그림형제”에는 그밖에도 명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답니다. 소녀 하나가 늪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의 “오필리어 Ophelia”를 닮았었어요. 그리고 특히 동화 일러스트레이션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죠.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는 “빨간 두건”이나 “신데렐라” 같은 유명한 그림동화에서 따온 이미지들이 중간 중간에 나오거든요. 이 영화는 그림동화에 바쳐진 하나의 오마쥬 같은 작품이에요.

 

   먼저 그림형제가 맞서 싸우는 대상인 마르바덴 숲의 거울여왕은 “백설공주”의 새왕비에 바탕을 둔 인물이지요. 물론 이 영화에는 백설공주나 일곱 난장이는 나오지 않지만요. 거울여왕은 젊음을 되찾는 주술의 제물로 쓰기 위해 마르바덴 숲 근처 마을의 어린 소녀들을 하나씩 납치합니다.

 

 

   음... 이 정도 외모라면 거울 속 자기 모습에 반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요. ^^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왓슨의 "백설공주" 일러스트레이션에 나오는 새왕비와 많이 닮았답니다.

 

 

왓슨 A. H. Watson 작
from "Told Again: Old Tales Told Again"

Walter de la Mare, New York: Alfred A. Knopf, 1927


   그리고 영화 시작 부분에서 납치되는 소녀는 빨간 두건을 쓰고 있어요.

 

 

  당연히 저 장면은 각종 "빨간 두건" 일러스트레이션들과 닮았죠. 물론 아래 래컴의 일러스트레이션과도요.   

 

래컴 Arthur Rackham (1867-1939) 작
from “The Fairy Tales of the Brothers Grimm"

Mrs. Edgar Lucas, London: Constable & Company Ltd, 1909


  거울여왕에게 납치되어 마법으로 잠든 소녀들의 발에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것 같은 유리구두가 신겨집니다. 별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저 유명한 그림동화의 이미지들이 다 나오는데 "신데렐라" 이미지만 안 나오면 섭섭해서 나온 것 아닐까요. 아, 그리고 "신데렐라" 인용은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림형제가 하녀 같은 차림으로 마룻바닥을 닦고 있는 장면이죠.  

 

 

  그나저나 영화 속 유리구두는 번존스의 그림 속 신데렐라가 신은 유리구두와 가장 닮았어요.

 

신데렐라 (1863)
번존스 Sir 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 작
수채, 67x31.5cm,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거울여왕은 라푼첼처럼 머리카락이 길었고 라푼첼처럼 문도 없는 높은 성에 살았었답니다. 라푼첼의 경우는 양어머니에게 갇힌 것이었지만 거울여왕은 전염병을 피해 스스로를 격리한 것이었지요. 그녀는 유일한 벗인 거울과 함께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았지요. 물론 결국에는 전염병을 피하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잃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지만요.

 

 

 

라푼첼 (1908)

카우퍼 Frank Cadogan Cowper 작
캔버스에 유채, 68.58x40.6cm, 드 모르간 센터, 런던

 

  물론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빠질 수 없죠. 이 영화에서 마법에 걸려 잠든 소녀는 키스로 깨어나게 됩니다.

 

 

잠자는 미녀
림 Henry Meynell Rheam (1859-1920) 작


  그밖에 "헨젤과 그레텔"이나 "개구리 왕자" 의 이미지도 나온답니다. 이렇게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그림동화의 익숙한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사실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재밌지는 않았습니다.  패러디와 오마쥬가 흔해진 지금, 이런 건 별로 새로운 게 아니거든요.

 

  이 영화는 뼈대나 디테일이나 다 좀 진부합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보면, 전설과 마법을 믿지 않고 사람들의 순진한 믿음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던 그림형제가 진짜 마법의 공간인 마르바덴 숲에 가서 본의 아니게 마을 사람들을 위해 싸우게 되면서 전설에 대한 믿음과 꿈을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사기꾼이 본의 아니게 영웅이 되고 그러면서 잃어버린 이상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는 헐리우드 영화에 그전부터 많았잖아요. 그리고 현실적인 동생과 아직도 이상을 버리지 못하는 어수룩한 형과의 갈등과 화해라든지, 터프하지만 아름다운 사냥꾼 여인과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든지 하나같이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들이죠. 

 

  물론 진부하고 고전적인 이야기에 독창적인 디테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작품들도 많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해요. 이 영화의 절정에서, 거울여왕을 물리치는 방법이나 거울여왕의 최후 모습으로 말하자면... TV에서 해주는 그림동화와 아라비안 나이트 만화나 영화 같은 것 많이 본 사람들에겐 정말 하나도 새롭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내용 전개와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잔인한 장면들 - 고양인지 강아진지를 돌아가는 분쇄기에 차던지는 등 - 이 나오는 반면에 정작 그림동화 원작이 가지는 어딘지 그로테스크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내지 못하더군요. 다들 아시겠지만 그림동화 원작은 좀 무섭답니다. 이야기 속에 살인이나 가혹한 징벌이 자주 나와서도 그렇지만 더 무서운 이유는 그런 잔인한 일들이 너무나 덤덤하게 다루어지는 데다가 "춤추는 열두 공주"처럼 원인이나 결말이 모호해서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죠. 반면에 이 영화는 모든 게 너무 확실하니까요.

 

  (아참, 두 명의 일본 작가들이 지은 소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가 그림동화 원작인 건 절대 아니에요. 가끔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서...그림동화 원작에 성적인 암시와 폭력적인 장면들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본 소설은 그걸 엄청나게 과장, 비약해서 에로호러물로 만들어 놨거든요.)

 

  사실 이 영화는 그림동화의 이미지들과 몇몇 모티프만 빌려온...그림동화와는 별 상관없는 전형적인 액션 어드벤처물이라고 보는 게 나아요. 많은 그림동화 속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그림동화에 대한 재해적은 전혀 없습니다...그러니 "놀라운 상상력으로 새롭게 창조된 그림동화" 같은 것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무지 실망하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하는 거울여왕은 정말 예뻤답니다...그것만은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

 

 

 

메롱하는 거울여왕 ^^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글쓴이 : Moo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