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스크랩] 영혼(프시케)이 사랑(에로스)을 만났을 때 2003.4.24

황령산산지기 2007. 2. 1. 11:19



프시케와 에로스 Psyche et l'Amour (1798)
by 제라르 Francois-Pascal-Simon Gerard (1770-1837)
캔버스에 유채, 186 x 132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내게 이 그림의 또 다른 제목을 정하라고 한다면 "봄"이라고 하겠습니다. 크고 순진한 눈동자와 더없이 보드랍고 매끈한 살결을 지닌 두 연인의 나이도, 그들의 가슴 설레고 수줍은 포옹과 첫 입맞춤도, 모두 봄의 단계에 있다고 해야 할 테니까요. 그림 전체의 분위기는 봄의 햇살처럼 온화하고, 봄바람처럼 가볍고 달콤한 향기를 풍깁니다.

    이 그림은 불핀치 Thomas Bulfinch (1796-1867) 의 "그리스 로마 신화 (원제: 신화의 시대 the Age of Fable)"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와 인간 왕녀 프시케가 갖가지 어려움 끝에 결합하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 Lucius Apuleius (124?-170?) 가 지은 것인데, 그의 "황금 나귀" 라는 소설에 액자 소설로 삽입되어 나오지요

    이 그림을 그린 제라르는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의 화가인데,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 황후 등 제정 시대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요. 이 그림의 원제는 "에로스로부터 첫 키스를 받는 프시케" 라고 합니다.


부게로, 에로스프시케    하지만 여기 에로스와 프시케가 첫 키스를 한 건 더 오래된 일이야! 라고 주장하는 그림이 있네요. 제라르의 그림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이 깜찍한 그림이 나오겠군요 ^^ 이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부게로의 작품인데, 부게로는 19세기 후반 각종 진취적인 미술 사조들이 대두하던 시기에도 아카데믹한 화풍과 주제를 고집한 화가였지요.


◀ 첫 키스 the First Kiss (1890)
by 부게로 Adolphe-William Bouguereau (1828 - 1905)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 그림을 보면 꼬마 프시케가 나비의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또 위의 제라르의 그림에서는 프시케의 머리 위로 조그만 나비가 날고 있죠. 그녀와 나비는 무슨 관계일까요.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나비"를 뜻합니다. 동시에 "영혼" 또는 "정신"을 뜻하기도 하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묘지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또,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애벌레가 일시적인 죽음과도 같은 번데기 상태를 지나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하여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을, 제약 많은 육신에 갇혀있던 인간의 영혼이 죽음을 통해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비"를 뜻하는 프시케가 동시에 "영혼"을 뜻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영혼 또는 정신과 관련 있는 단어 중에 프시케 psyche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사이키) 에서 파생되어 psych- 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습니다. 사이콜로지 psychology (심리학), 사이코 psycho (정신병자), 사이키델릭 psychedelic (환각의) 처럼...

    "큐피드의 화살에 꽂히다"는 말이 드물지 않게 쓰일 만큼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리스 신화 속 사랑의 신 에로스 Eros (로마 신화의 쿠피도스 Cupidos, 영어식으로는 큐피드 Cupid) 의 경우, 그의 이름 자체가 "사랑"을 뜻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관능적인 사랑" 또는 "사랑의 욕망"을 뜻하죠. 그래서 에로틱 erotic (성애性愛의) 이나 에로티시즘 eroticism 같은 단어가 파생되어 나온 것이죠.

    그러면 "에로스와 프시케"는 "사랑과 영혼"으로 옮겨 쓸 수 있겠군요. ^^ 따라서 아풀레이우스의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는 일종의 알레고리 allegory, 즉 비유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아풀레이우스의 순수 창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풀레이우스의 소설이 나오기 이전부터, "프시케" 즉 "영혼"을 나비 날개가 달린 소녀로 의인화하고 "에로스" 즉 "사랑"을 날개와 화살을 지닌 소년으로 의인화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예술 작품들이 있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헬레니즘 Hellenism 시대의 작품 중에, 화살을 지닌 날개 달린 소년이 나비 날개 달린 소녀를 괴롭히는 모습의 부조가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욕망이 영혼을 괴롭히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아풀레이우스는 이런 오래된 비유를 바탕으로 해서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를 쓴 것이죠.

    그럼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다시 감상해 보기로 할까요. 아래의 줄거리는 아풀레이우스의 원작을 간추린 것인데, 불핀치의 책을 통해 소개된 것과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데도 있답니다.


    어느 왕에게 세 명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딸 프시케 Psyche 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새로운 베누스 Venus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비너스,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Aphrodite 에 해당) 라 불렀고 그녀가 지나다닐 때마다 여신에게 하듯이 찬가를 부르며 꽃을 뿌렸다. 반면에 베누스의 신전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폐해졌다. 자신에게 바쳐져야할 숭배가 일개 인간에게 돌려지는 것을 본 베누스는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 쿠피도스 Cupidos (영어식으로 큐피드 Cupid, 그리스의 에로스 Eros 에 해당) 를 불렀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장난기 많은 젊은이로서 불꽃과 화살을 가지고 날아다니며 남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다. 여신은 아들에게 프시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처녀의 분수에 맞지 않는 아름다움을 벌하도록 해라.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에게 정열을 품게 만들거라."

    한편, 사람들은 프시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찬양의 말을 하곤 했으나 아무도 청혼하지는 않았다, 마치 그녀가 절묘하게 만들어진 조각품인 것처럼... 보통 인간으로서의 미모를 지닌 두 언니들은 먼 도시의 왕들과 결혼했으나 신의 경지에 오른 아름다움을 지닌 프시케는 고독하게 남아있었다. 막내딸의 이런 처지가 걱정된 왕은 아폴로 Apollo (그리스의 아폴론 Apollon 에 해당)의 신전으로 가서 신탁을 구했다. 신탁은 이렇게 나왔다. "그대 딸에게 신부의상을 입혀 산꼭대기에 세워라. 그대의 사위가 될 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도 두려워하는 괴물이다. 그는 날개로 날아다니며 불꽃과 화살로 모든 생물들을 괴롭히는 자이다." 왕과 왕비는 고통에 빠졌고, 신탁에 따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고독에 지쳐있었던 프시케는 절망 속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워터하우스, 프시케
큐피드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프시케 ▶
Psyche Entering Cupids Garden (1904)
by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 - 1917)
캔버스에 유채, 109 x 71 cm
해리스 박물관 겸 미술관, 프레스턴


    마침내 장례 행렬 같은 혼례 행렬이 산을 향해 출발했다. 산꼭대기에 도착한 일행은 프시케를 바위 위에 세워두고 깊은 한숨 속에 돌아갔다. 홀로 남은 프시케가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을 때 부드러운 서풍西風 제피로스 Zepyrus 가 그녀를 살며시 들어 산밑 골짜기로 옮겨놓았다. 그곳에서 프시케는 신의 거처라고 할 만한 장려한 궁전을 발견했다. 상아를 댄 높은 천장은 황금 기둥으로 받쳐져 있고 벽은 절묘하게 조각된 은이었으며 바닥은 보석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었다. 또 방마다 온갖 보물로 가득 차 있었다.

    프시케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공중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여주인이시여, 이것들은 모두 당신의 것이며 우리는 당신의 시녀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프시케는 호사스러운 목욕으로 피로를 풀고 음악이 곁들여진 훌륭한 만찬을 즐겼다. 밤이 되어 프시케가 침실에 들자, 얼마 후 어둠 속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의 신랑이었고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후 동트기 전에 떠나버렸다. 날이 밝자 보이지 않는 시녀들이 다시 와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프시케의 남편은 매일 어둠이 내린 후에 들어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나가버려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고 남편의 목소리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사랑하는 프시케, 먼 도시로 시집간 그대의 자매들이 그대의 소식을 듣고 곧 저 산꼭대기로 찾아올 것이오. 하지만 그들이 그대를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거기에 대답하지 말아요.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내게 더없는 고통을 초래할 것이고 그대 자신에게도 파멸을 가져올 것이오."

    프시케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남편이 떠난 후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며 화려한 감옥에 갇힌 것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밤이 되어 다시 찾아온 남편은 여전히 눈물에 젖어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다가 마침내 자매들을 초대해도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매들이 프시케에게 남편의 모습이 어떤지 확인하라고 부추기더라도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거듭 경고했다. 프시케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약속했다. 다음날 과연 산꼭대기로부터 프시케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는 언니들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프시케는 즉시 남편의 시종 제피로스를 불러 언니들을 산밑 골짜기로 실어오게 했다. 다시 만난 자매들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프시케는 자매들에게 궁전을 구경시키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과 식사를 즐기도록 했다. 그러자 언니들은 자신들의 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로운 프시케의 생활에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니들은 프시케에게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고 캐물었고, 프시케는 하루종일 사냥을 즐기는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대강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많은 황금 공예품과 보석을 선물로 주고 제피로스를 시켜 돌려보냈다. 언니들은 여신과도 같은 프시케의 생활을 자신들의 생활과 비교하며 큰소리로 한탄했다. 타오르는 질투심으로 이성을 잃은 그들은 프시케가 자신들을 거만하게 대했다고 비난하고 그녀를 그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겠다고 별렀다.


프라고나르, 프시케

자매들에게 큐피드로부터의 선물을 보여주는 프시케 (1753)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
캔버스에 유채, 168 x 192 cm, 국립미술관, 런던

    로코코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프라고나르의 그림입니다. 로코코 미술의 특징인 우아함과 나른한 유연함, 부드러움이 잘 살아있죠. 여왕 같은 자태로 앉아있는 프시케가 언니들에게 갖가지 보물을 보여주고 있고, 언니들은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퍼지고 있고 그 위로 뱀의 머리카락을 한 불화의 여신이 보입니다. 바로 언니들의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무서운 질투심을 상징한 것이죠. 프시케에게까지 검은 구름이 퍼져 있는 것은 언니들의 질투심이 곧 그녀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그날 밤 프시케의 남편은 그녀의 자매들이 악의를 품고 덫을 놓으려 한다고 경고했다. "그대는 지금 우리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소. 그대가 우리의 비밀을 잘 지키면 이 아기는 신이 될 것이오." 프시케는 자신이 어머니가 된다는 것, 그것도 신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꼈다. 며칠 후 그녀의 남편은 또 말했다. "그대 자신과 나, 그리고 태어날 우리 아기를 생각해서, 그대 자매들이 다시 산꼭대기에 와서 외치더라도 아는 체하지 말아요." 그러자 프시케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슬픔을 언니들을 잠깐 보는 것으로 달래게 해주세요. 태어날 아기 얼굴을 통해서라도 당신 얼굴의 반영을 보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랍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해진 남편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매들을 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프시케의 언니들은 두 번째 찾아왔을 때 제피로스를 기다리지도 않고 성급하게 산밑으로 몸을 날렸다. 제피로스는 다소 내키지 않게 그들을 받아 골짜기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그들은 프시케의 잉태 소식을 듣고 속으로는 더욱 질투로 끓어올랐지만 기뻐하는 척했다. 프시케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그들은 다시 그녀의 남편에 대해 캐물었다.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프시케는 자신이 먼저 했던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남편이 중년의 상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많은 선물을 언니들에게 주고 제피로스를 불러 돌려보냈다. 언니들은 프시케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남편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프시케의 남편은 신이 틀림없어. 그 애가 신의 아이를 낳아 유명해지는 걸 보느니 우리가 죽고 말지." 그들은 프시케와 그 남편의 사이를 어떻게든 갈라놓자고 결의했다.

    다음날, 언니들은 거짓 눈물을 흘리며 프시케를 찾아갔다. "이곳 사람들이 밤마다 무서운 용이 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구나. 그러고 보니 신탁에서 네가 괴물과 결혼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니? 사람들이 말하길, 그 용이 네가 잘 먹어 통통해지고 네 뱃속 아이가 다 자라면 한꺼번에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거야." 순진한 프시케는 겁에 질렸고 남편의 경고를 모두 잊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털어놓고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언니들은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단검과 등잔을 숨겨놓았다가, 네 남편이 깊이 잠든 것 같으면 등잔의 덮개를 벗기고 빛에 드러난 그 괴물의 목을 단검으로 베도록 해." 언니들이 돌아간 후 프시케는 혼돈에 빠졌고 괴물에 대한 증오와 남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어둠이 내릴 무렵,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재빨리 언니들이 말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크래프트, 에로스프시케
◀ 큐피드를 발견하는 프시케
by 크래프트 Kinuko Y. Craft
1996년 뉴욕에서 출간된
크래프트의 "큐피드와 프시케" 삽화


    남편이 깊이 잠든 후 프시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숨겨두었던 등잔의 덮개를 벗기고 단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가 등잔을 남편에게 들이댔을 때 눈에 띈 것은 괴물이 아니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 바로 쿠피도스였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은 대리석 같은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고 어깨에는 새하얗게 반짝이는 깃털로 덮인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단검을 떨어뜨리고 정신없이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순간 등잔에서 뜨거운 기름 한 방울이 쿠피도스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놀라 깨어난 그는 프시케를 응시하다가 말 한 마디 없이 날아올랐다. 프시케가 그의 한쪽 다리를 잡았으나 얼마 날아가다가 다리를 놓치고 떨어지고 말았다.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프시케를 보고 쿠피도스는 잠깐 멈추어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어머니 베누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대를 아내로 맞았다. 내 행동이 현명하지 못했던 것은 인정한다 - 나는 나 자신의 화살에 상처를 입었었다. 그런데, 그대는 나를 괴물로 여기고 내 머리를 베려고 했구나. 어쨌거나 그대를 홀린 가증스러운 자들은 곧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는 다른 벌은 주지 않겠다. 오직 그대와 이별할 뿐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다시 날아올랐고, 프시케는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곧바로 옆에 흐르고 있는 강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쿠피도스를 두려워한 강은 그녀를 삼키는 대신 풀이 우거진 강둑으로 밀어놓았다.

    근처에는 마침 염소의 다리를 가진 양치기 신 판 Pan 이 있었는데 프시케를 보고 가엾게 여겨 말했다. "애처로운 시선과 창백한 얼굴, 끝없는 한숨으로 미루어보아 사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구나. 하지만 다시는 자신을 파괴하려 하지 말아라. 대신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배려로 변덕스러운 쿠피도스의 마음을 얻도록 해라." 프시케는 대답 대신 경의를 표하고 길을 떠났다.


    아래 번 존스의 그림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프시케는 비참하게 젖어있고 슬픔과 막막한 심정에 지쳐 이제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프시케의 머리에 다정히 손을 얹고 목신 판이 위로와 충고의 말을 해주고 있죠. 프시케를 내려다보는 판의 눈빛과 그녀의 머리에 얹은 그의 손에서, 값싼 동정이 아닌, 깊이 있고 진지한 연민이 느껴집니다. 위로의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윽한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번존스, 프시케

판과 프시케 Pan and Psyche (1872-74)
by 번 존스 Sir Edward Burne-Jones
캔버스에 유채
히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 보스턴



    하루종일 걷다가 그녀는 언니들 중 한 명이 사는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언니들이 악의를 품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프시케는 그들을 같은 방법으로 혼내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언니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분노한 쿠피도스가 나를 내쫓으면서 언니를 대신 아내로 맞겠다고 했어요." 신이 난 그 언니는 다짜고짜 그 산으로 달려가 산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며 제피로스를 불렀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오지 않았고 그녀는 그대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프시케는 다시 다른 한 명의 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로 갔고 그 언니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방랑했다. 그동안 쿠피도스는 어머니 베누스의 집에서 등잔 기름에 데인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었다. 베누스는 이 상처의 원인이 프시케라는 것을 다른 곳에서 전해 듣고는, 아들이 자신의 명령대로 자신의 경쟁자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연인으로 택한 것과 또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아들이 연애를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중으로 분노했다. 그녀는 앓고 있는 아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그가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다음, 프시케를 찾아 벌하기 위해 나섰다.

    방랑 중인 프시케는 어느 날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신전을 보고 쿠피도스가 있을까 하여 올라가 보았다. 그곳은 대지와 곡물의 여신 케레스 Ceres (그리스의 데메테르 Demeter 에 해당) 의 신전이었는데, 추수된 곡식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어떤 신에게든 충실하게 대해 그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프시케는 곡식들을 정성스럽게 정돈했다. 케레스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가엾은 프시케, 지금은 너 자신을 걱정할 때란다. 베누스가 격노에 차서 너를 찾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을 들은 프시케는 여신의 발 앞에 엎드려 베누스의 분노가 다소 식을 때까지 숨겨달라고 애원했으나 케레스는 베누스와의 우정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헤일, 프시케
베누스의 옥좌 앞의 프시케 Psyche at the Throne of Venus (1883)
by 헤일 Edward Matthew Hale
캔버스에 유채, 199 x 88.9 cm
러셀-코츠 미술관 겸 박물관, 본머스


     절망한 프시케는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베누스의 눈을 피한단 말인가? 차라리 내 발로 여신에게 가서 겸손한 태도를 보여 그녀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거기서 남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녀는 용기를 내어 베누스의 신전으로 갔다. 여신은 그녀를 보고 거칠게 웃으며 말했다. "오, 이제야 시어머니에게 인사하러 왕림하셨군? 아니면 너에게서 상처를 입어 생명이 위태로운 네 남편을 보러왔느냐?" 여신은 자신의 시녀인 솔리시토 Solicito (우울) 과 트리스티에 Tristie (슬픔)을 시켜 프시케를 고문하게 하고 또 분에 못 이겨 그녀를 직접 때리기도 했다.

    그런 다음 베누스는 여러 종류의 곡식들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있는 무더기를 보이며 말했다. "너처럼 추한 하녀가 연인을 되찾는 길은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뿐이다. 밤이 되기 전까지 이 곡식들을 같은 종류끼리 가려서 다시 쌓아놓아라." 베누스가 떠나자 혼자 남은 프시케는 이 도저히 불가능한 과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녀를 가엾게 여긴 수많은 개미들이 곡식을 한 알 한 알 날라 깔끔하게 일을 해결해 주었다. 밤이 되자 향연에서 돌아온 베누스는 일이 다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네가 한 일이 아니란 걸 안다"고 말하며 못마땅해했다.

    다음날 새벽, 베누스는 프시케를 불러 강 건너에 있는 숲으로 가서 거기 흩어져있는 양떼에게서 순금으로 된 양털을 모아오라고 시켰다. 프시케가 강가로 가자 갈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 시각에 저 무서운 양떼에게 접근해선 안 된다. 저 양들은 타오르는 태양 광선에 사나워져 그 날카로운 뿔과 독기 어린 이빨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낮이 지나 태양이 기울어지고 강바람이 불면 양들이 진정될 테니, 그때 강을 건너가 큰 나무 밑에 숨어 지켜보다가, 양들이 완전히 순해진 것을 보면 금빛 양털을 거두도록 해라." 프시케는 갈대가 일러준 대로 해서 무사히 금빛 양털을 한아름 안고 베누스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네 정부가 한 짓이겠지. 나는 네 자신의 용기와 주의력을 보고 싶다. 저 산꼭대기가 보이지? 저곳은 스틱스 Styx (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의 수원지다. 이 물병을 가지고 가서 가장 높은 곳에서 물을 길어와라." 프시케가 산꼭대기 쪽으로 가보니 거대한 바위가 수직으로 솟아있고 그 꼭대기의 틈에서 싸늘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그곳을 프시케가 기가 질려 바라보고 있을 때 유피테르 Jupiter (그리스의 제우스 Zeus 에 해당) 의 신조神鳥인 독수리가 나타나 그녀에게서 물병을 받아 부리에 물고 가서 물을 길어다 주었다.

    프시케에게서 물병을 받아든 베누스는 위협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이 상자를 가지고 저승으로 가서 저승의 왕비 프로세르피나 Proserpina (그리스의 페르세포네 Persepone 에 해당)에게 상자를 전하고 이렇게 말해라. '베누스께서 왕비님의 화장수를 조금만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여신께서는 자신의 것을 아드님을 치료하는 데 다 써버리셨습니다.' 너무 지체하지는 마라. 나는 그것을 바르고 오늘 저녁 신들의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프시케는 이제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목숨을 끊어 저승으로 가기 위해 높은 탑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순간 탑이 말을 했다. "가엾은 여인이여, 그런 식으로 저승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스파르타의 국경으로 가면 저승으로 가는 문을 찾을 수 있다. 이때 반드시 동전 두 닢을 입에 물고 양손에 달콤한 포도주를 발라 구운 보리과자를 하나씩 들고 가야 한다. 문을 지나 어두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강이 나올 것이다. 가는 길에 절름발이 짐꾼이나 노파 같은 사람들이 그대에게 손을 빌려달라고 부탁해도 대꾸도 하지 말고 지나쳐라. 그것들은 모두 함정이다. 그대가 동전을 놓치거나 과자를 내려놓는 날에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강에 도착하면 저승의 뱃사공 카론 Charon 이 뱃삯을 요구할 텐데 이때 입을 내밀어 그가 동전 하나를 빼가게 해라. 강을 건너 저승의 홀 앞에 가면 머리 셋 달린 거대한 개가 지키고 있을텐데, 이때 보리과자 하나를 던져주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홀에 들어가 프로세르피나를 만나고 상자를 채워 받은 후 돌아오는 길에 나머지 보리과자와 동전을 같은 방법으로 쓰도록 해라.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프로세르피나가 채워준 상자를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 프시케는 이 충고를 충실히 따라서, 채워진 상자를 들고 무사히 저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누스에게로 가는 길에 프시케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신들의 화장수를 나르면서 그걸 한 방울만 가진다고 나쁠 것 없겠지. 이걸 발라 내 연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그녀는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상자 속에 든 것은 저승의 잠이었고 뚜껑이 열리자마자 그것이 프시케를 덮쳤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한편 쿠피도스는 상처가 나아 다시 날 수 있게 되자 프시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높은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 나왔다. 곧 그는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프시케를 찾아냈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저승의 잠을 끌어 모아 다시 상자 안에 가두고 그녀를 화살로 가볍게 찔러 깨운 다음 말했다. "그대의 호기심이 또 일을 저질렀군. 어쨌든 어서 어머니에게 가서 임무를 완수하도록 해요. 그밖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리고 쿠피도스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로스와 프시케 L'Amour and Psyche (1796)
by 카노바 Antonio Canova (1757-1822)
대리석, 0.55 x 0.68 x 1.01 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조각가 카노바의 이 작품은 에로스와 프시케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하늘에서 막 내려온 에로스가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길가에 쓰러져 잠들어있던 프시케를 안아 올리고 있죠. 죽음과 같은 잠에서 막 깨어난 프시케는 나른하게, 그러면서도 애절하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인의 머리를 감싸안으려 하고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의 순간이 고전주의의 절제와 단아함 속에 표현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유피테르는 쾌히 승낙하고 모든 신들을 소집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 친구의 난봉꾼 생활도 결혼으로 족쇄 채워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쿠피도스가 그가 선택한 여인 프시케를 맞아 영원히 함께 하도록 만듭시다." 그는 베누스를 보고 덧붙였다. "내 딸아, 인간과의 혼사로 너의 고귀한 혈통이 훼손된다고 생각지 마라. 내가 이 결혼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유피테르는 프시케를 하늘로 불러 올린 다음 그녀에게 불로불사의 음식 암브로시아를 한 잔 주면서 말했다. "프시케, 이걸 마시고 불사의 신이 되어라. 그러면 이 결혼은 영원할 것이다." 곧 성대한 결혼 축하연이 벌어졌고 베누스도 그녀의 분노를 털어 버리고 춤을 추며 즐겼다. 얼마 후 이 신혼부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볼룹타스 Voluptas (쾌락) 라고 붙여졌다.


    프시케 즉 영혼은 에로스 즉 사랑을 만나기까지는 더없이 고독합니다. 뜻하지 않게 사랑을 맞고 사랑과 함께 하면서 영혼은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영혼은 아직 사랑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해로운 괴물은 아닐지 의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사랑은 괴물 같은 측면도 있습니다.) 영혼의 의심과 불안 때문에 사랑은 결국 영혼을 떠나게 되고, 사랑이 떠난 후에 영혼은 비로소 그 상실감에 고통받습니다. 이제 영혼은 사랑을 되찾기 위해 갖가지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영혼은 죽음과도 같은 통과제의를 통해 사랑과 제대로 결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영혼은 사랑과의 결합으로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됩니다.

    반면에 사랑은 어떤가요? 사랑은 영혼을 만나기 전까지 경박하고 변덕스럽고 방종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영혼을 만나면서 사랑은 처음으로 상처와 아픔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은 영혼과 정식으로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깊이 있고 위대한 존재가 됩니다. 단순한 동화 같은 아풀레이우스의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이처럼 많은 상징을 품고 있답니다.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