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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의 사회심리학

황령산산지기 2006. 5. 18. 20:51

 

 
김명인/ 인하대교수·‘황해문화’주간


지방자치 선거일이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투표권의 포기는 곧 민주주의의 포기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번 선거에 임하는 내 심정은 정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과 다를 게 없다. 특정 정당 추천 후보들의 일방적 승리가 불을 보듯 뻔한 선거처럼 재미 없는 선거에 들러리로 동원되는 형국이니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나마 접전에 대한 기대를 걸어볼 만한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처음 꽤 바람을 일으킬 것 같았던 전직 여성법무장관 출신 후보의 기세가 타당의 개혁적 이미지 변호사 후보의 등장과 더불어 완연히 꺾이면서 이번 선거는 안타깝지만 일찌감치 ‘종치고 날 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국민정서 현정권에 마음 닫아-


이처럼 후보의 인물과 상관없이 초반부터 판세가 고착화되는 기형적 선거분위기의 배후에는 ‘집권여당의 무능에 대한 염증에 가까운 대중적 환멸’이 가로놓여 있다. “특정 야당이 잘하고 예뻐서가 아니라, 집권여당이 너무 미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명색이 역대 집권당 중에 이처럼 대중적 환멸의 대상이 된 정당은 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지금의 집권세력은 왜 이렇게 대중적 기반을 잃고 있을까? 그렇게 된 데에는 처음부터 현정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의 조직적인 음해와 선동이 분명 크게 한몫 했을 것이다.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속화되었던 탈권위주의화가 현정권 아래에서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섬으로써 집권 프리미엄이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절대다수의 국민 대중의 정서는 현정권에 대해서 못마땅한 돌부처처럼 돌아앉아 있다.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분명히 거기에는 정권의 통치행태에 대한 객관적 비판 이상의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적 여론이라기보다는 사회심리학적 특이현상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그 사회심리학적 특이현상에 ‘공황적 가학심리’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그 근저에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공황적이고, 타자에 대해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가학적이다. 다른 말로 윤리적 아노미에서 연유하는 공격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정권은 바로 그러한 대중의 공황적 가학심리에 의해 하나의 ‘희생양’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전의 국민의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아니 현정권 초기 이른바 ‘탄핵정국’ 시기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사회구성원이 공감하는 공동의 윤리적 기준이 존재했었다. 그것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경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과 수년 동안에 한갓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말았다. 사회적 가치(혹은 민주적 가치)와 시장적 가치(혹은 반민주적 가치) 사이에서 보인 현정권의 혼돈(그것이 강제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과 시장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 굴복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수십 년 동안 공들여 가꾸어왔던 소중한 가치의식에 결정적인 상처를 입혔고, 그 상처는 심리적 외상으로 바뀌었다.


-‘민주적 가치’에 대한 경의 실종-


인간을 사물화하고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시장적 가치의 절대화는 심리학적으로 대단히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절대다수가 탈락이 예정된 경쟁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공황적 투기심리 외에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런 공황적 가학심리는 끝없이 희생양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지금 표면적으로는 집권세력이 대표적인 희생양이 되고 있지만, 그 한 꺼풀을 넘기면 거기엔 아직껏 ‘민주적 가치’라는 서푼어치도 안 되는 반시장적 가치에 집착하는 수많은 ‘진보세력’들이 잠재적 희생양으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정권이 무능한 것은 틀림없고 그래서 동네북이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희생양을 만들어 학대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게 된 우리 사회의 이 심각한 정신적 공황상태와 가학심리는 아프면서도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