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공직자여! 너 자신을 알라

황령산산지기 2006. 3. 26. 16:13
한동안 잠잠하던 공직자들의 윤리문제가 최근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이 여기자 성희롱 문제로 파문을 일으켜 의원직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가 하면, 이해찬 총리는 3·1절 날 골프를 친 일이 라운딩 동반자들의 전과 시비와 맞물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왜 공직자들의 사생활이 언론에 노출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한갓 할 일 없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까. 아니면 ‘너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정치적 계산을 하는 속된 무리들의 정치적 음모가 작용한 것일까.

관련된 인사들로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평범한 개인이었다면 쉽게 덮어질 수도 있는 문제가 공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언론의 집중조명과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오히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상기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성은 있으나, 너무나 막연한 추상적인 준칙이다. 따라서 ‘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라’는 준칙으로 바꾸면 어떨까. 공직자여! 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라. 공직자들은 봉사직이다. 남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수많은 이기적 행위가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하는 다른 직업에 비하면 이타주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영역이다. 물론 그 이타주의는 나라를 위한다면서도 자신의 사리사욕과 가문의 이익을 위할 만큼 위선적이어서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공직은 봉사직인 동시에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 특권의 본질은 공동체를 위해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공직자들의 결정은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중차대한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엄청난 특권이야말로 윤동주의 시심을 원용한다면, 공직자들이 ‘잎새에 이는 바람 소리에도’ 괴로워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공직자가 반드시 공적 결정을 잘못 내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큼 윤리규범을 엄격히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도 마땅히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그 특권의 중대함 때문이다. 공직의 엄숙함이 깨끗한 사생활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백한 삶이 공직의 필요조건임이 분명함은 이번 사태가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공직자라고 하여 폭탄주나 골프는커녕, 비가 새는 집에 양동이를 받쳐놓고 살았던 조선시대의 황희나 맹사성이 되란 말은 아니다. 그들의 사생활은 너무나 절제되고 청렴했기 때문에 죽고 나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남는 ‘불멸성’을 획득했다. 여가와 웰빙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살고 있는 공직자에게 이런 ‘불멸성’을 요구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지금도 지켜야 할 준칙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왕도(王道)는 없다’는 말에 친숙하다. 어원으로 보면 왕이 수학을 배울 때, 다른 평민들보다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은 수학자는 ‘수학에 왕도는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에 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왕도이다. 다만 그 왕도는 일반 사람에 비해 ‘느슨한’ 사생활보다는 ‘엄격한’ 사생활 관리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박효종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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