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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별궁

황령산산지기 2006. 2. 12. 15:29
 
명성황후 민씨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집안의 배경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순조,헌종,철종 3대 60년간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하였다고 판단,아들인 고종의 왕비로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을 택했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하였으므로 왕비에 오른 지 몇년 지나지 않아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정적이었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끝내 몰아냈다.

대원군의 10년 세도가 무너지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듬해,명성황후는 원자(元子,순종)를 낳았다.

헌종,철종 때 원자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오랜만의 국가적 경사였다.

이듬해에는 원자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세자 책봉 4년이 지난 고종 16년에 별궁을 짓게 하여 고종 18년에 완공했다.

이 별궁의 소재지가 안국방(安國坊)의 소안동(小安洞)이었으므로 안동별궁(安洞別宮)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자리는 역대 왕실의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세종 때에는 제8왕자 연응대군의 집을 지었으며,성종 때에는 연경궁으로 호칭되었다.

별궁이 완공된 다음해 민태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안동별궁에 거처하다가 이듬해 이곳에서 세자와 혼례를 올렸다.

왕비 민씨는 혼수용품을 모두 청나라에서 사들여 왕실의 경사를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민씨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의 근거지로 각광받았던 안동별궁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빛을 잃고 말았다.

풍문여고 운동장에 자리잡고 있던 안동별궁의 경연당,정화당,현광루 등 세 건축물이 경기도 고양의 골프장과 서울 우이동의 개인별장에 옮겨진 것으로 문화재청에 의해 확인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石坡亭)이 지난달 경매에 부쳐져 새 주인을 맞게 되었는데,안동별궁의 건물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고 하니 왕실의 영화(榮華)도 덧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