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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라는 수식을 달고 ‘밀알’의 역할 자처하는 MBC 앵커 김은혜

황령산산지기 2006. 1. 22. 21:10



“‘디지털’ 시대라지만 미래를 움직이는 희망은 여전히 ‘아날로그’라고 믿습니다”

MBC 보도국의 김은혜 기자는 최초의 기자 출신 여성 앵커다. 남성 앵커는 기자, 여성 앵커는 아나운서라는 방송 뉴스의 공식을 깨고 이후 여기자들의 연속적인 앵커 입성을 이뤄낸 선봉장인 셈이다. 남자들보다 두 배, 세 배 잘하지 않으면 여간해선 성공하기 힘든 치열한 경쟁 세계. 그 속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며 맹활약해온 그녀가 세계의 리더들을 만나 취재하며 깨달은 이 시대 성공학을 들려준다. 키워드는 의외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였다.

플루트 주자를 꿈꾸던 여고생이 특종 기자가 되기까지
방송사 첫 국회 담당 여기자, 우리나라 첫 여기자 출신 앵커. 김은혜(34) 기자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이 뒤따른다. 여성 앵커로서 저녁 뉴스를 단독으로 진행한 것도 그녀가 처음이다. 1993년 MBC에 입사한 이후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취재 현장을 뛰면서도 동물적인 감각과 우직한 성실함으로 다수의 특종을 낚아 올렸다. ‘안 되면 되게 한다’는 군대식 명제가 보도국 내에서 그녀의 평판이 되기도 했다. 이달의 기자상(1994), 바른말 보도상(2004), 대학생들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1위(2001~2003), ‘자랑스런 이화신문방송인상(2000) 등 뛰어난 활약상만큼이나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저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플루트를 했어요. 음대 입시를 위해 다른 학생들처럼 레슨을 받고 있었죠. 그런데 저희 레슨 선생님이 음대 입시 비리로 구속이 됐어요. 저에게 선생님의 구속은 한마디로 충격이었죠. 당시 신문에서 음대 입시관련 보도를 상세히 읽었어요. 그때까지 선생님은 내게 진리이자 표본이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허위이고 어둠일 수 있다는 걸 신문 기사를 통해 알았어요. 선생님은 약한 내게 강하게 군림했지만 나는 약한 사람에게 약하고 강한 사람에겐 강한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죠. 그래서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앵커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2001년, 스탠퍼드대에서의 유학 생활은 성공이라는 짧은 명제에 긴 호흡을 불어넣어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 APARC (Asia Pacific Research Center) 연구원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며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는 동시에 혼자만의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도 가졌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고 주도하고 있는 힘은 기술과 정보를 뛰어넘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원칙’, 즉 ‘아날로그 성공 법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역시 큰 수확이었다.

그 때문일까. 공격적인 취재 스타일 탓에 와일드하고 거침없는 중성적 이미지가 강했던 그녀가 유학 이후 많이 달라졌다. 표정도, 목소리도, 말씨도 한결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지인들도, 브라운관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시청자들도 그런 그녀의 은근한 변화를 꿰뚫고 있다. “미국에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겨서 그런지 사람이 변하더라”며 그녀 자신도 유쾌하게 인정한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9.11테러가 터졌어요.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전화부터 구입해서 설치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사로부터 임시 워싱턴 특파원을 명 받았죠. 일복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웃음) 테러 이후 일주일간 워싱턴행 비행기가 안 떴어요. 그러다 비행기 운항이 재개됐을 때 그 커다란 비행기에 저와 웬 백발의 할머니 이렇게 둘만 달랑 탔더라구요. 추가 테러 위험 때문에 아무도 비행기를 타려 하지 않았거든요. 그 할머니와 둘이서 엄청 수다를 떨면서 갔었는데,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구요. 자긴 살 만큼 살았지만 넌 도대체 뭐냐고요.(웃음)”

워싱턴에 도착해 테러 현장을 취재하던 당시 그녀의 근무시간은 하루 20시간. 업무량이 너무 많아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지만 그녀가 머물던 프레스센터는 2차 테러 대상 2순위였다. 그러다 국방부와 의회 건물에 바리케이트가 쳐진 이후 프레스센터는 2차 테러 대상 1순위로 뛰어올랐고 그녀는 그렇게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취재에 전념했다. 의회에서 발견된 탄저균 봉투를 취재하고 난 뒤 감기 증상과 비슷한 탄저균 초기 증상이 나타나 마음 졸였던 기억도 있다. 오기로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가, 탄저균 잠복기간이라는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감기. 태어나서 감기 진단 받고 그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단다.

디지털로 생각하고 아날로그로 행동하라
“스탠퍼드에서의 시간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문답 시간을 갖는 형식의 프리젠테이션이 총 네 번 있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어요. 스트레스를 다스리려 바닷가를 찾곤 했는데 일몰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죠. 대낮에 떠 있는 햇볕은 되게 따갑지만 지는 햇볕은 너무 따뜻하거든요. 사람들은 대낮의 햇볕을 따갑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만 지는 해는 기꺼이 바라보면서 그 빛에 스스로 물들죠.

질주하듯 살아온 기자로서의 제 삶이 대낮의 해 같았다면 이제는 사람들에게 더 부드럽게 힘을 빼고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비워내고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채워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고 할까요. 그랬기 때문에 세계적인 CEO를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 사람들의 삶의 철학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의미 있는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잠깐의 술수나 요령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도 절실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그녀는 자신의 두 번째 저서 「디지털로 생각하고 아날로그로 행동하라」(가제)의 마무리 작업에 골몰해 있다. 유학시절 칼리 피오리나, 맥 휘트먼, 게리 양 등 세계적 CEO들과의 만남과 귀국 후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엘지 회장 등 거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한 ‘아날로그’의 힘을 주제로 삼았다.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는 리더들이 사실상 아날로그형 인간이라는 자신 나름대로의 발견과 결론이 한편으론 신선하고 한편으론 다행스러웠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을 확보하고 싶다면 아날로그를 활용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다소 시대에 역행하는 성공 전략처럼 들릴 수도 있다. 속도와 기술이 우선시 되는 디지털 시대에 느리게, 그러나 바르게 성공하라는 주문은 기존에 접하던 성공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갓 담근 겉절이 김치의 맛이라면 아날로그는 발효된 된장의 맛이 나죠.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라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기교와 결과 중심이 아닌 사람에 대한 존중과 원칙, 그리고 신뢰가 그들의 성공 비법이죠. 그 사람들은 원칙에 대한 소신이 있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강박이 없습니다. 제가 단독으로 만나 인터뷰했던 전 휴렛 팩커드 CEO 칼리 피오리나는 기술시대 리더에게 중요한 점이 배려, 친절, 관용이라고 말했어요. 그런 면에서 미래사회는 여성들이 성공할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여성 리더들 중에는 권력이나 돈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섬세함을 갖춘 사람들이 많거든요.”

디지털은 겉절이, 아날로그는 된장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밀알’로 규정한다. ‘최초’라는 말은 제2, 제3이 나올 때라야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 이후 기자 출신 여성 앵커들이 그녀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양보와 관용은 그녀가 말하는 ‘아날로그형’ 리더십의 핵심 요건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다시 앵커직을 맡으라는 회사의 권유를 고사한 것도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스탠퍼드에서 공부한 경제 관련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부 기자로서 현장을 더 뛰어보고 싶기도 했다.
김은혜는 또 ‘일촌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촌 정보란 속도에만 의존한 즉각적인 정보가 아니라 ‘발효된’ 정보, 깊이 있는 정보라는 점에서 또 다시 ‘아날로그’와 맥이 통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공무원을 인터뷰한다고 하면 그 공무원의 프로필에 ‘취미 : 테니스’라고 적힌 정보를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취미가 골프지만 취미란에 ‘골프’라고 적어 넣을 공무원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시드니 올림픽 때 단독으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도 ‘일촌 정보’가 주효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개막식 전날까지 중태라는 정보를 그녀만이 갖고 있었던 것. 개막식날 모든 기자들을 외면하고 개회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그녀는 “당신의 부인이 이렇게 중태인데 개막식을 잘 치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얘기에 사마란치 위원장이 뒤를 돌아보았고 3분 동안 인터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올림픽 개회식 보도 가운데 세계 유일의 사마란치 인터뷰를 그녀가 따낸 것이다.

“IOC 위원장실 밖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IOC 위원들이 하는 대화를 스치듯 듣고 알게된 정보였어요. 물론 그것도 그 사람과 인터뷰하기 위해 끈기 있게 계속 기다렸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실이었죠. 정말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경쟁력, 그것은 그 사람의 발효된 정보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느려도 제 갈 길을 간다는 점 또한 아날로그형 인간의 성공 비결이다. 때로는 기꺼이 손해를 보는 것도 필요하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보고 나면 자기 마음의 평화는 물론이고 예상치 못했던 행운이 계속 온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4년 전 신당 창당의 조짐을 보이며 한창 이슈를 몰고 다니던 박근혜 대표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한 선배가 이미 박대표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박대표와의 인터뷰를 지시했지만 그녀는 그 인터뷰를 포기했다.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천생 기자’인 그녀가 기사거리를 포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그 선배는 그 인터뷰를 통해서 기자로서의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 선배의 얼굴에서 그 사실을 캐치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선배는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해냈고, 저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뒤로 더 많은 기회들이 저에게 찾아왔어요. 그 일이 있은 직후에 박세리, 히딩크 등을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거든요. 혼자 튀어야 살 수 있는 것이 방송사의 생리지만 같이 커나가면서 그 안에서 대세를 읽어내는 것이 기자 출신 첫 앵커로서 저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자로서 지금의 입지를 굳히기까지 그녀의 노력은 지난한 것이었다. 어디서나 그렇듯 여자는 남자보다 두 배, 세 배 잘해야 ‘본게임’에 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 최초의 국회 출입 여기자로 일할 당시 그녀는 관계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보좌관들을 비롯해서 국회의원들까지 그녀를 유난히 ‘편애’했다. 기자회견에 들어갈 기회도 더 자주 주어졌고, 질문의 기회도 더 많이 돌아왔다. 남자 기자들이 ‘역차별’을 토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해당 사안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은근한 목소리로 “김기자 결혼은 언제 해?” “바바리 어디서 샀어?”하는 식의 사적인 접근이 되돌아오곤 했다.

현안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으면서 밖에 나가서 친하다는 말만 많이 듣는 것이다. 희소성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반겨준다고 해서 그걸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그들을 일로서 설득할 수 있는 프로정신이 없다면 그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적인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는 대신 그 사람보다 더 정확한 정보로 정곡을 찔렀다. 가장 최신의 정치적 정보를 슬쩍 들이밀며 일적인 접근으로 상황을 돌리는 것이다.

‘최초’는 제2, 제3이 뒤따를 때 의미를 갖는다
그녀가 애용(?)하는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자신에게 질시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연습하면 된단다. 잘난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인화력이 약한 경우가 많은데 나름의 마인드 컨트롤이 뒤따르지 않으면 커리어까지도 흔들리 수 있다. 항상 두각을 나타내며 커리어를 쌓아온 그녀로서는 그런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회사의 얼굴로 시청자들과 최전선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앵커는 분명 매력있는 직책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기자가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 꽤 되다 보니 그런 제의도 받아요. 지난 총선 때는 전국구 1번을 주겠다는 제의가 왔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척박한 환경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여성 인력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제쳐두고 저에게 그런 제안이 온다는 것은 여성 인력 파악이 빈약하다는 증거겠지요. 지금 제자리에 충실하고 싶다고 고사했어요. 아직 기자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싶어요. 앵커로서의 전달력에다 기자로서의 제 긴 호흡을 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글 쓰는 작업도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이번에 낼 책도 질주하듯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쉼표가 됐으면 좋겠구요.”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는 그녀에게 결혼 역시 외면할 수 없는 일. 구체적인 결혼계획은 없지만 좋은 만남을 갖고 있는 남자친구도 있다. “제 나이에 결혼은 욕심을 비워내고 해야 하는 결정이기 때문에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면서도 이제는 결혼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2004년 말에는 2005년에 결혼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200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2006년이 잔뜩 남았잖아요”라며 응수한단다. 남자친구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다면서 말을 아꼈지만 어쨌든 행복한 연애에 빠져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름 앞에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성취감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더없이 뿌듯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 앞에 적잖은 부담감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김운용 IOC 위원은 단연 그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그에게 쏟아진 여타의 비난 여론을 차치하더라도, 세계 체육계의 요인으로 입지를 굳힌 그가 정작 후계자를 키우는 일에 소홀했다는 지적만큼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개척해 온 길을 기꺼이 가이드로 제시하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자신이 선점한 자리에 자족하거나 독점욕을 드러내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래서일까. “처음은 두 번째로 인해 의미를 가진다”는 김은혜 기자의 말에선 앞서가는 여성다운 ‘책임감’이 느껴져서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