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부역은 씻을 수 없는 반역행위… ‘떳떳함’으로 심판해야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 라고 춘원이 어느 글에 썼다. 현상윤(玄相允)이 “여보게 춘원, 어떻게 조선놈의 이마에서 일본인 피가 나오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를 소설가 김팔봉이 거론하며 그 사실 여부를 춘원에게 묻자 그는 “그래, 그런 글을 내가 썼지. 그건 사실이야!”라고 했다고 ‘나의 회고록’(세대 1965. 12)에 밝혔다.
왜정 36년을 이 땅에서 세금 내고 공출내고 살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친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 친일의 후손인 우리가 친일을 심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친일이 아닌 부일(附日)이다. 자의적 부역이다. 이것은 일제 압정에서만의 얘기일 수 없다. 6·25전쟁 기간에 피아가 저지른 행위도 같은 잣대로 재단돼야 한다. 피란가지 못하고 인공치하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 친일의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잴 수 있다.
오늘의 눈으로 일제 36년을 되돌아 봤을 때 무엇이 부일이었나 하는 것은 떳떳함이 심판해야 한다. 떳떳함의 반대는 수오(羞惡)다.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羞惡之心)이 의(義)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의롭지 못한 것, 옳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내가 한 일이 민족 앞에 떳떳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소망스럽지도 자랑거리도 아니라면 그것은 의롭지 못한 행위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한민족 전체를 미개한 천민으로 규정, 문명인에 의한 미개인의 개화교육이라는 명분 뒤에 숨었다. 식민지배가 아니라는 논리가 오늘의 일본이 식민지배를 사과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조선인을 등급이 낮은 집단인 주변부의 종족으로 폄하면서 실제로는 종속과 착취로 중심부의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누렸다.
이런 일본권력의 인정을 자청해 원했고 진정한 황민(皇民)이 되기 위한 문화정책의 기수가 되었던 자가 이광수다. 징병에 응해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한민족의 결핍증을 주장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의 순응을 유도했던 것이다.
변명조차 없었던 춘원 이광수
“조선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년간은 공상과 공론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년 민족 생활에 남겨 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입니다. 과학을 남겼나 부를 남겼나… 벌거벗은 산, 마른 하천, 무너진 제방과 도로, 쓰러져가는 성곽과 도회, 게딱지 같고 돼지우리 같은 가옥, 진실로 근대 조선 오백년 사는 민족적 사업의 기록이 아니고 공상과 공론의 기록이외다… 그 민족의 근본적 악(惡)성격을 가장 소량으로 가진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이 민족을 개조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일부다. 광복 후 그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 저기 해외에까지 나가 황민화의 길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외쳤다. 수많은 애국지사가 옥고를 치르고 추운 만주벌판에서 죽어갈 때 그는 총독부의 비호 아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목숨이 원수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서민의 변명이 아니다. 뻔뻔함. 수침심이 없는 지성이었다. 생존을 위한 비굴한 야합이었다는 변명 같은 참회도 없었다. 과연 내가 한 짓이 역사에 떳떳한지 공의의 강물이 넘치는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 국학운동이다.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 라고 춘원이 어느 글에 썼다. 현상윤(玄相允)이 “여보게 춘원, 어떻게 조선놈의 이마에서 일본인 피가 나오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를 소설가 김팔봉이 거론하며 그 사실 여부를 춘원에게 묻자 그는 “그래, 그런 글을 내가 썼지. 그건 사실이야!”라고 했다고 ‘나의 회고록’(세대 1965. 12)에 밝혔다.
왜정 36년을 이 땅에서 세금 내고 공출내고 살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친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 친일의 후손인 우리가 친일을 심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친일이 아닌 부일(附日)이다. 자의적 부역이다. 이것은 일제 압정에서만의 얘기일 수 없다. 6·25전쟁 기간에 피아가 저지른 행위도 같은 잣대로 재단돼야 한다. 피란가지 못하고 인공치하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 친일의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잴 수 있다.
오늘의 눈으로 일제 36년을 되돌아 봤을 때 무엇이 부일이었나 하는 것은 떳떳함이 심판해야 한다. 떳떳함의 반대는 수오(羞惡)다.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羞惡之心)이 의(義)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의롭지 못한 것, 옳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내가 한 일이 민족 앞에 떳떳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소망스럽지도 자랑거리도 아니라면 그것은 의롭지 못한 행위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한민족 전체를 미개한 천민으로 규정, 문명인에 의한 미개인의 개화교육이라는 명분 뒤에 숨었다. 식민지배가 아니라는 논리가 오늘의 일본이 식민지배를 사과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조선인을 등급이 낮은 집단인 주변부의 종족으로 폄하면서 실제로는 종속과 착취로 중심부의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누렸다.
이런 일본권력의 인정을 자청해 원했고 진정한 황민(皇民)이 되기 위한 문화정책의 기수가 되었던 자가 이광수다. 징병에 응해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한민족의 결핍증을 주장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의 순응을 유도했던 것이다.
변명조차 없었던 춘원 이광수
“조선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년간은 공상과 공론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년 민족 생활에 남겨 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입니다. 과학을 남겼나 부를 남겼나… 벌거벗은 산, 마른 하천, 무너진 제방과 도로, 쓰러져가는 성곽과 도회, 게딱지 같고 돼지우리 같은 가옥, 진실로 근대 조선 오백년 사는 민족적 사업의 기록이 아니고 공상과 공론의 기록이외다… 그 민족의 근본적 악(惡)성격을 가장 소량으로 가진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이 민족을 개조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일부다. 광복 후 그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 저기 해외에까지 나가 황민화의 길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외쳤다. 수많은 애국지사가 옥고를 치르고 추운 만주벌판에서 죽어갈 때 그는 총독부의 비호 아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목숨이 원수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서민의 변명이 아니다. 뻔뻔함. 수침심이 없는 지성이었다. 생존을 위한 비굴한 야합이었다는 변명 같은 참회도 없었다. 과연 내가 한 짓이 역사에 떳떳한지 공의의 강물이 넘치는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 국학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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