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에게 인식과 처방의 근본을 제공하는 것은 천부경 사상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정신이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실상 손(孫)이 끊어진 사람은 극히 적다. 그러나 정신이 끊어진 사람은 아주 많다. 단군 할아버지의 정신을 잇댈 사람은 삼국시대에도 별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군할아버지의 정신 끊어진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 사회는 정말 철학을 좀 해야겠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석 류영모)
그의 제자 박영호는 스승 류영모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 사상을 전해준 단군 할아버지를 앙모하였고 우리의 글자를 지어준 세종대왕을 경모했다. 류영모가 천부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 첫째가 천부경이 진리로서 가치가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천부경을 통하여 단군 할아버지의 신관을 새기며 단군 할아버지를 그린다.”
시간의 단순한 흐름은 역사가 아니다. 지나간 시간 속의 조상들,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 그리고 오는 시간을 살아갈 후손들의 삶이 전재될 때 시간은 의미를 갖는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종적 생존과 관계된 ‘생명의 강’이 역사다. 이런 종적 생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의 우리는 전통의 바탕에 서 있는 것이다. 전통이 없을 때 현재의 위치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것이 한민족이라는 우리의 모듬살이는 단군의 천부경을 사상의 원류로 삼는 국학이 바탕이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국학은 단순한 상아탑 속에 갇힌 공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삶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면 국학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근대에 일었던 실학운동의 실패를 답습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500여건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실용적 연구개발이 일반 서민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치고 말았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필요없어
국학을 오늘의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선 우리의 국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처방이 필요하다. 인식과 처방의 근본을 제공하는 것이 한민족에겐 천부경 사상이다. 이 시대의 문제요, 그 해결에 결정적 답이 ‘81자의 경’에 내포되어 있다. 바로 천부경의 연구와 보급이 국학운동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유다. 창조와 상생, 그리고 조화의 중심사상이다. 천부경은 조화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인류 보편적 훌륭한 사상을 물려받고도 우리 위에 군림하는 외래 사상에 깔려 신음해왔다. 삶의 가치기준이 조화로움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상적·계층간·지역간의 대립과 갈등, 나아가 외교에서도 천부경적 조화사상은 최상의 처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국학운동에서 단군의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그의 타자를 배려하는 조화로움 때문이다. 조화의 주체가 힘이 없을 때, 조화의 화학작용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것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길임을 확신할 때, 확신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될 때 고유한 우리의 전통은 현재에 꽃필 것이다.
조화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홍익(弘益)에서 비롯된다. 주체성과 타자의 주체성의 조화, 다시 말해 자연을 포함한 일체의 것들이 갖는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정신이다. 단군할아버지가 천부경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 준 철학이요, 사상이며 원리 아니겠는가? 결국 천부경, 단군이라는 말이다.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정신이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실상 손(孫)이 끊어진 사람은 극히 적다. 그러나 정신이 끊어진 사람은 아주 많다. 단군 할아버지의 정신을 잇댈 사람은 삼국시대에도 별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군할아버지의 정신 끊어진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 사회는 정말 철학을 좀 해야겠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석 류영모)
그의 제자 박영호는 스승 류영모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 사상을 전해준 단군 할아버지를 앙모하였고 우리의 글자를 지어준 세종대왕을 경모했다. 류영모가 천부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 첫째가 천부경이 진리로서 가치가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천부경을 통하여 단군 할아버지의 신관을 새기며 단군 할아버지를 그린다.”
시간의 단순한 흐름은 역사가 아니다. 지나간 시간 속의 조상들,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 그리고 오는 시간을 살아갈 후손들의 삶이 전재될 때 시간은 의미를 갖는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종적 생존과 관계된 ‘생명의 강’이 역사다. 이런 종적 생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의 우리는 전통의 바탕에 서 있는 것이다. 전통이 없을 때 현재의 위치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것이 한민족이라는 우리의 모듬살이는 단군의 천부경을 사상의 원류로 삼는 국학이 바탕이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국학은 단순한 상아탑 속에 갇힌 공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삶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면 국학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근대에 일었던 실학운동의 실패를 답습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500여건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실용적 연구개발이 일반 서민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치고 말았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필요없어
국학을 오늘의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선 우리의 국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처방이 필요하다. 인식과 처방의 근본을 제공하는 것이 한민족에겐 천부경 사상이다. 이 시대의 문제요, 그 해결에 결정적 답이 ‘81자의 경’에 내포되어 있다. 바로 천부경의 연구와 보급이 국학운동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유다. 창조와 상생, 그리고 조화의 중심사상이다. 천부경은 조화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인류 보편적 훌륭한 사상을 물려받고도 우리 위에 군림하는 외래 사상에 깔려 신음해왔다. 삶의 가치기준이 조화로움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상적·계층간·지역간의 대립과 갈등, 나아가 외교에서도 천부경적 조화사상은 최상의 처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국학운동에서 단군의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그의 타자를 배려하는 조화로움 때문이다. 조화의 주체가 힘이 없을 때, 조화의 화학작용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것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길임을 확신할 때, 확신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될 때 고유한 우리의 전통은 현재에 꽃필 것이다.
조화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홍익(弘益)에서 비롯된다. 주체성과 타자의 주체성의 조화, 다시 말해 자연을 포함한 일체의 것들이 갖는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정신이다. 단군할아버지가 천부경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 준 철학이요, 사상이며 원리 아니겠는가? 결국 천부경, 단군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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