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범한 30대 청년이 인터넷에 백수탈출기를 올려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구에 거주하는 김지현(33) 씨가 지난 10일 동아닷컴의 독자참여코너인 동아누리(nuri.donga.com)에 올린 ‘백수탈출, 지옥에서 천국으로’라는 제목의 글이 많은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사고 있는 것. 김씨는 3년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얼마 전에 지방의 모 공사에 입사했다.
지금이야 전도유망한 00공사의 1년차 사원이지만, 사실 지현 씨는 학벌도 집안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우리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청년이었다. 아니, 부모들 속 무지하게 썩이고 ‘인터넷 폐인’ 생활까지 하던 어느 집의 문제아였다고나 할까.
‘그까이꺼! 대충~살자’를 인생지론으로 삼고 공부에 담쌓고 살다가 점수 따러 들어간 곳이 지방 소재 전문대. 하지만 졸업하던 해에 IMF사태가 터졌다. 세월가는 대로 살아오던 그는 “놀면 뭐하나, 적(籍)이라도 만들어두자”고 근처 4년제 대학에 편입하게 된다. 3학년도 아닌 2학년에, 그나마 아르바이트 한다고 중간에 1년을 휴학했다. 졸업장을 받은 건 29살 되던 해 2월, 명문대를 졸업한 잘난 대학생들도 취직이 힘든 판국에 내세울 만한 토익 점수 하나 없이 나이만 먹은 그를 뽑아줄 회사는 아무데도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백수탈출 스토리가 시작된다.
김 씨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면서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전하는 성공스토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평범한(?) 백수들이 “국내 취업이 어려워서 해외를 뚫었어요.”라고 언론 앞에 나와 자랑할 때마다 입는 가슴의 상처를 다스릴 길 없어 여자친구를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김 씨는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보잘 것 없지만 제 이야기가 전국의 하얀 손(백수)들께 희망 메시지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저를 믿어주고 격려해준 8년 사귄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에게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기사와 함께 자신의 사진을 쓰고 싶다는 동아닷컴의 요청에 대해 “쑥스러워서 얼굴 사진은 공개하지 못 하겠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다음은 김 씨의 백수탈출기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33살 갓 1년 지난 직장인입니다.
경북의 소도시에서 전문대 정보 처리과를 졸업했습니다.
당연히 그 도시에서만 알려졌지 같은 경북에서도 알아주지도 않는 들어본 적도 없는 전문대학이었습니다. 학교를 입학할 때만 해도 전산과가 인기였으니, 졸업만하면 막연히 취업은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졸업하던 해 IMF가 터졌습니다. 취업? 당연히 안됐죠. 세월가는 대로 살아온 놈이 무슨 취업이 되겠습니까. 마냥 놀 수는 없어서 편입을 시도했습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도 아니고 지방에서 좀 알려진 대학도 아니고 말 그대로 지방 3류 대로 편입했습니다.
역시 학과는 정보처리과로 했습니다. 아시죠? 그런 곳은 원서만 내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3학년 편입도 아닌 2학년 편입에 중간에 아르바이트 한다고 1년 쉬고 여차여차 해서 나이 29살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가진 자격증은 정보처리 산업기사, 워드 2급, 토익 그거 어디서 치는지 몇 점이 만점인지 전혀 아는 바 없었습니다. 단지 학점이 4.3이라는 것 하나만 믿고 버텼습니다. 어떻게 취업은 되겠지. 설마 다 영어점수만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한심하게 버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전문대 졸업할 때 겪었던 상황을 또 다시 반복해버리는 정말 멍청한 짓거리였습니다.
02년 2월 이리저리 원서도 내보고 인터넷에 기웃거리며 돌아다녀보았지만 역시 시간 가는 대로 세월 가는 데로 게임이나 하며 무협지나 보며 보낸 세월을 사회는 용납하지 않더군요.
조그만 회사라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라도 토익점수는 기본이고 그나마 생산직은 대졸이라고 받아주지도 않더군요. 3달을 내리 놀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놀았습니다.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났지만 사회에 나갈 용기가 없더군요 .
아니 용기를 내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3달 동안 그냥 인터넷 게임이나 하고 방바닥 뒹굴 거리며 무협지나 보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TV에 정치인들 얘기가 나오면 “저놈들 때문”이라고 핏대 올려가며 욕하고 구인난에 시달린다는 3D업종 얘기가 나오면 “월급을 적게 주니 사람이 안 몰리지” 하며 내세울 것 없는 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심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심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친구들도 싫어졌고 백수인 저 위로해 준다고 만나자는 취직한 친구들도 가식적으로 보였습니다. 집안에서의 잔소리도 점점 더 나를 힘들게 하고 세상이 절 버린 것 같고 죽고 싶다는 생각 뿐 아무 생각도 의욕도 안 들더군요.
집안에 돈이라도 많으면 장사라도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인간쓰레기지요? 키워 주신 것도 모자라 그런 생각까지 했다니. 그렇지만 사람이 코너에 몰리니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렇게 살다가 문뜩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늙어 죽는 건 아닌지, 세상 불평만 하고 투덜대며 인터넷 취업사이트만 기웃거리다 늙어 죽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새롭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느 기업이건 대부분 토익점수를 원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시작해서 토익점수를 기업이 원하는 만큼 만들어 낼 자신도 없었을 뿐더러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100%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또 하청에 하청에 하청받는 중소기업 생산직으로 들어갈까 생각해 봤지만, 사장 말 한마디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그런 회사는 싫더군요. 예전에 그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사장 말 한 마디에 10년 일한 과장이 잘리는 걸 봤거든요.
여하튼 시험을 치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기 위해서 제방의 모든 것들을 처분했습니다. 일단 컴퓨터 팔았습니다. CD 당연히 필요 없죠. 제방에 책상만 남겨두고 다 없앴습니다.
그리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만만하게 봤습니다. ㅡㅡ;;;
하지만 정말 어렵더군요. 영어는 100점 만점에 30점 나왔습니다. 하늘이 노랗더군요. 죽기 살기로 이 길 아니면 갈 길이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제 실력으로는 역시 무리더군요.
그래서 다른 돌파구를 찾아봤습니다. 영어야 어차피 시험 치려면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공무원 외에 다른 시험에도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안친 시험이 없습니다. 이젠 과목도 가리지 않고 일단 시험 공고가 나면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봤습니다.
한국전력, 지방공사, 무슨 협회, 경찰 등 시험 치며 좌절하며 공부하고 시험치고 좌절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은 한우물만 판다지만 전 닥치는 대로 팠습니다. 그러는 동안 실력도 제법 붙고 시험 요령도 생기더군요.
그러다 1년 6개월이 다 되어가던 즈음 모 지방공사에서 예정에 없던 채용 시험 공고가 났습니다. 남은 기간은 한 달. 아, 정말 평생 공부한 것보다 그 한 달 동안 공부한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심지어는 슈퍼마켓에 담배 사러 갈 때도 손바닥에 적은 내용을 외우며 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영어 외의 2과목은 한 달 동안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차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저는 거의 울 뻔 했습니다.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면접 준비. 30년 만에 처음 온 기회려니 생각하고 공사 홈페이지를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자신이 없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습니다. 지방공사가 다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은 거의 20년 이상 경력의 공무원이십니다. 모두 점잖고 좋으신 분들 같더군요. 일반회사처럼 압박 면접도 없었습니다. 분위기 좋았습니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나왔습니다.
최종 결과 발표 일까지 잠도 안 오더군요.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혼자 있기가 너무 힘들어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8년 동안 제 짜증을 다 받아주고 언제나 힘이 돼준 사람입니다.
여자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앉아 있을 때, 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XX씨죠? XX공사입니다. 합격 축하드립니다. 0일 까지 회사로 나오세요.”
합격이란 말 외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더군요.
여자 친구는 울었습니다. 그날.
지금은 그 여자친구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꿈인지 생신지 마냥 즐거운 날들입니다.
제 글이 도움이 될 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방 한구석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하얀 손들이 계시다면 조금은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들 가정에도 행복가득 하시고, 이 땅의 60만 청년실업자분들도 취업하시어 행복한 날들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구에 거주하는 김지현(33) 씨가 지난 10일 동아닷컴의 독자참여코너인 동아누리(nuri.donga.com)에 올린 ‘백수탈출, 지옥에서 천국으로’라는 제목의 글이 많은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사고 있는 것. 김씨는 3년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얼마 전에 지방의 모 공사에 입사했다.
지금이야 전도유망한 00공사의 1년차 사원이지만, 사실 지현 씨는 학벌도 집안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우리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청년이었다. 아니, 부모들 속 무지하게 썩이고 ‘인터넷 폐인’ 생활까지 하던 어느 집의 문제아였다고나 할까.
‘그까이꺼! 대충~살자’를 인생지론으로 삼고 공부에 담쌓고 살다가 점수 따러 들어간 곳이 지방 소재 전문대. 하지만 졸업하던 해에 IMF사태가 터졌다. 세월가는 대로 살아오던 그는 “놀면 뭐하나, 적(籍)이라도 만들어두자”고 근처 4년제 대학에 편입하게 된다. 3학년도 아닌 2학년에, 그나마 아르바이트 한다고 중간에 1년을 휴학했다. 졸업장을 받은 건 29살 되던 해 2월, 명문대를 졸업한 잘난 대학생들도 취직이 힘든 판국에 내세울 만한 토익 점수 하나 없이 나이만 먹은 그를 뽑아줄 회사는 아무데도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백수탈출 스토리가 시작된다.
김 씨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면서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전하는 성공스토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평범한(?) 백수들이 “국내 취업이 어려워서 해외를 뚫었어요.”라고 언론 앞에 나와 자랑할 때마다 입는 가슴의 상처를 다스릴 길 없어 여자친구를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김 씨는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보잘 것 없지만 제 이야기가 전국의 하얀 손(백수)들께 희망 메시지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저를 믿어주고 격려해준 8년 사귄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에게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기사와 함께 자신의 사진을 쓰고 싶다는 동아닷컴의 요청에 대해 “쑥스러워서 얼굴 사진은 공개하지 못 하겠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다음은 김 씨의 백수탈출기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33살 갓 1년 지난 직장인입니다.
경북의 소도시에서 전문대 정보 처리과를 졸업했습니다.
당연히 그 도시에서만 알려졌지 같은 경북에서도 알아주지도 않는 들어본 적도 없는 전문대학이었습니다. 학교를 입학할 때만 해도 전산과가 인기였으니, 졸업만하면 막연히 취업은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졸업하던 해 IMF가 터졌습니다. 취업? 당연히 안됐죠. 세월가는 대로 살아온 놈이 무슨 취업이 되겠습니까. 마냥 놀 수는 없어서 편입을 시도했습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도 아니고 지방에서 좀 알려진 대학도 아니고 말 그대로 지방 3류 대로 편입했습니다.
역시 학과는 정보처리과로 했습니다. 아시죠? 그런 곳은 원서만 내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3학년 편입도 아닌 2학년 편입에 중간에 아르바이트 한다고 1년 쉬고 여차여차 해서 나이 29살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가진 자격증은 정보처리 산업기사, 워드 2급, 토익 그거 어디서 치는지 몇 점이 만점인지 전혀 아는 바 없었습니다. 단지 학점이 4.3이라는 것 하나만 믿고 버텼습니다. 어떻게 취업은 되겠지. 설마 다 영어점수만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한심하게 버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전문대 졸업할 때 겪었던 상황을 또 다시 반복해버리는 정말 멍청한 짓거리였습니다.
02년 2월 이리저리 원서도 내보고 인터넷에 기웃거리며 돌아다녀보았지만 역시 시간 가는 대로 세월 가는 데로 게임이나 하며 무협지나 보며 보낸 세월을 사회는 용납하지 않더군요.
조그만 회사라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라도 토익점수는 기본이고 그나마 생산직은 대졸이라고 받아주지도 않더군요. 3달을 내리 놀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놀았습니다.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났지만 사회에 나갈 용기가 없더군요 .
아니 용기를 내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3달 동안 그냥 인터넷 게임이나 하고 방바닥 뒹굴 거리며 무협지나 보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TV에 정치인들 얘기가 나오면 “저놈들 때문”이라고 핏대 올려가며 욕하고 구인난에 시달린다는 3D업종 얘기가 나오면 “월급을 적게 주니 사람이 안 몰리지” 하며 내세울 것 없는 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심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심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친구들도 싫어졌고 백수인 저 위로해 준다고 만나자는 취직한 친구들도 가식적으로 보였습니다. 집안에서의 잔소리도 점점 더 나를 힘들게 하고 세상이 절 버린 것 같고 죽고 싶다는 생각 뿐 아무 생각도 의욕도 안 들더군요.
집안에 돈이라도 많으면 장사라도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인간쓰레기지요? 키워 주신 것도 모자라 그런 생각까지 했다니. 그렇지만 사람이 코너에 몰리니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렇게 살다가 문뜩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늙어 죽는 건 아닌지, 세상 불평만 하고 투덜대며 인터넷 취업사이트만 기웃거리다 늙어 죽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새롭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느 기업이건 대부분 토익점수를 원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시작해서 토익점수를 기업이 원하는 만큼 만들어 낼 자신도 없었을 뿐더러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100%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또 하청에 하청에 하청받는 중소기업 생산직으로 들어갈까 생각해 봤지만, 사장 말 한마디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그런 회사는 싫더군요. 예전에 그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사장 말 한 마디에 10년 일한 과장이 잘리는 걸 봤거든요.
여하튼 시험을 치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기 위해서 제방의 모든 것들을 처분했습니다. 일단 컴퓨터 팔았습니다. CD 당연히 필요 없죠. 제방에 책상만 남겨두고 다 없앴습니다.
그리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만만하게 봤습니다. ㅡㅡ;;;
하지만 정말 어렵더군요. 영어는 100점 만점에 30점 나왔습니다. 하늘이 노랗더군요. 죽기 살기로 이 길 아니면 갈 길이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제 실력으로는 역시 무리더군요.
그래서 다른 돌파구를 찾아봤습니다. 영어야 어차피 시험 치려면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공무원 외에 다른 시험에도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안친 시험이 없습니다. 이젠 과목도 가리지 않고 일단 시험 공고가 나면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봤습니다.
한국전력, 지방공사, 무슨 협회, 경찰 등 시험 치며 좌절하며 공부하고 시험치고 좌절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은 한우물만 판다지만 전 닥치는 대로 팠습니다. 그러는 동안 실력도 제법 붙고 시험 요령도 생기더군요.
그러다 1년 6개월이 다 되어가던 즈음 모 지방공사에서 예정에 없던 채용 시험 공고가 났습니다. 남은 기간은 한 달. 아, 정말 평생 공부한 것보다 그 한 달 동안 공부한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심지어는 슈퍼마켓에 담배 사러 갈 때도 손바닥에 적은 내용을 외우며 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영어 외의 2과목은 한 달 동안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차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저는 거의 울 뻔 했습니다.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면접 준비. 30년 만에 처음 온 기회려니 생각하고 공사 홈페이지를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자신이 없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습니다. 지방공사가 다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은 거의 20년 이상 경력의 공무원이십니다. 모두 점잖고 좋으신 분들 같더군요. 일반회사처럼 압박 면접도 없었습니다. 분위기 좋았습니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나왔습니다.
최종 결과 발표 일까지 잠도 안 오더군요.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혼자 있기가 너무 힘들어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8년 동안 제 짜증을 다 받아주고 언제나 힘이 돼준 사람입니다.
여자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앉아 있을 때, 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XX씨죠? XX공사입니다. 합격 축하드립니다. 0일 까지 회사로 나오세요.”
합격이란 말 외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더군요.
여자 친구는 울었습니다. 그날.
지금은 그 여자친구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꿈인지 생신지 마냥 즐거운 날들입니다.
제 글이 도움이 될 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방 한구석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하얀 손들이 계시다면 조금은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들 가정에도 행복가득 하시고, 이 땅의 60만 청년실업자분들도 취업하시어 행복한 날들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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