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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흑인 여성스파이 `조세핀`

황령산산지기 2005. 10. 17. 21:08




흔히 여성 스파이라면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을 가진 마타하리(본명: M.G.젤러 Margaretha Geertruida Zelle)를 떠올린다. 미모의 스트립 댄서였던 그녀는 제 1차 대전 중 파리와 독일을 오가며 첩보 활동으로 체포돼 총살당했다. 일각에서는 독일에 배신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그녀는 후에 전설적인 여성 스파이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마타하리 외에 전설적인 또 한 명의 여성 스파이가 있다. 바로 파리를 주름 잡던 최고의 댄서 조세핀 베이커였다. 세계적인 스파이를 소개하는 히스토리 채널 ‘스파이 웹’이 19일 방송에서 소개한 조세핀 베이커가 그 주인공.

방송에 따르면 조세핀은 미국 세이트루이스 태생의 조세핀은 1920년대 초 브로드웨이의 최고 스타였다. 조세핀은 유럽에서 자신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드높인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피해 1925년 파리로 온 그녀는 파리 사교계에 블랙 열풍을 몰고왔다. 야윈 몸매와 긴 다리 등 타고난 외모에다 가슴을 드러내며 추는 선정적인 춤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파블로 피카소는 ‘커피색 피부에 흑단같은 검은 눈, 천국의 다리와 모두를 사로잡는 미소를 가진 여인’이라고 그녀에게 극찬을 보냈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그녀는 프랑스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했다. 1937년 프랑스 시민이 된 조세핀은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의 고위 인사들과 제 2차 대전 발발 전 친분을 이용해 빼낸 정보를 이용해 정보 기관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향한 그녀의 애국심은 놀라웠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조세핀은 독일군이 물러날 때까지 파리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며 비시프랑스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 후 독일이 BC 프랑스마저 점령하자 그녀는 방첩 부대장 출신  자크  아코와 함께 리스본으로 갔다. 이때부터 그녀의 또 다른 활동이 시작됐다.

그녀는 아코의 정보를 넘겨 받아 리스본과 BC 프랑스령 모로코 간의 전달 업무를 담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독일이 프랑스에서 물러난 후 조세핀은 전시 프랑스에 기여한 공로로 무공십자 훈장과 레지스탕스 메달을 수여 받았다.

한편 그녀는 소수인종 출신 어린이를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7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등 최고의 예우를 했다. 또한 지난 2001년에는 장 티베리 파리시장은 베이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몽파르  나스  주변 거리에 조세핀 베이커라는 이름을 붙여 파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중첩자라는 불명예를 쓰고 불운한 최후를 맞은  마타하리 와 달리 조세핀은 파리 시민들의 가슴에 영원한 스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TV리포트 조헌수 기자] pillarcs3@pimedia.co.kr


기사 원문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63&newssetid=487&articleid=200508201201561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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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성 스파이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무용수로서의 그녀의 인기는 가히 상상을 불허했다. 본문 중에 잠깐 나오는 파리 사교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925년 파리 사교계에 블랙 아메리카의 열풍이 불던 시기에 나타난 그녀는 단번에 파리 사교계를 휘어잡았다. 당시 21세였던 그녀는 빌로드로 만든 비키니 팬티를 입고 그 위에 깃털로 장식된 스커트를 입었으며 가슴을 드러내며 등장했다. 다른 댄서들 역시 깃털로 장식했으나 사람들은 오직 그녀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몸 전체에 생동감이 흘러넘쳤으며, 마치 고양이의 발놀림처럼 무대를 누볐다. 이러한 그녀의 이미지는 다음 사진에 나온 표범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니 흑표범이라고 해야할까?



선정적인 춤을 추지만 그녀 본연의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에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했다는 그녀. 그녀의 등장은 파리의 유행 열풍의 핵심이 되었다. 온 파리 시내에는 그녀의 포스터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으며 그녀의 향수, 인형, 옷 등이 등장했고 심지어는 그녀처럼 피부를 검게 하려는 여성들도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인기는 그녀의 노력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유행은 쉽게 지나간다. 그런것을 알고 있었던 조세핀은 마음대로 행동하며 계약을 자기 맘대로 취소하며 아무 클럽에나 나가지 않아서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그녀가 거절하면 거절할 수록 더욱 많은 극장주들이 그녀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추후 그녀의 장례식이 TV에도 방영되었으며 대통령의 국장에 비견될만큼 화려했었다고 한다.



1927년 전성기의 그녀


19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