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우리는 신이다

황령산산지기 2022. 3. 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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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이다 God I am>
페테르 에르베 지음
조경숙 옮김
 
 
 
요약
 
 
- 유스티니아누스 교황 치하이던 서기 533년,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카톨릭 원로들은, 경전에서 환생을 삭제하기로 결정내렸다. 교회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인식하려면 인식되는 존재에서 떨어져야 한다. 이것은 분리를 의미한다. 물질성은 양극성 즉 음/양인 반면, 신은 합일이어서, 이원화되고/분리된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신과의 합일은 오직 양극성이 합쳐질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양극성으로 이루어진 영역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영혼 속에 들어 있는 태고적 앎의 기억을 끌어내는 방식으로만 이 문제를 직감할 수 있다.
 
이처럼 배움이란, 실제로는 단지 기억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안 믿고에 상관없이, 개개의 영혼 속에는 모든 지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배움이든 결국은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다.
 
- 신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존재 전체이다. 모든 것을 망라하는 존재는 대립물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하나One다. 하나가 자신을 알려면, 자신을 자신 속에 비춰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는 자신의 반영물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결정체 나crystal SELF>, <그리스도 나Christ SELF>라는 확장물을 창조했다.  
 
신은 가장 고밀도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물질을 창조했다. 물질은 신체에 한정되지 않으며, 신체는 가장 낮은 진동수로 진동하는 물질에 속한다.
 
- 영성Spirit은 가장 높은 진동수인 빛이고, 그것이 물질을 체험하려면, 물질의 진동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영성이 내면에서 물질을 조망하려면, 신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가 창조되었고, 억겁의 세월 동안 계속될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성이 자신의 도래에 적합한 형상 영역을 준비하기 위해, 물질의 진동수를 사랑으로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과정이. 이 과정은 처음에는 저밀도의 몸체들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고밀도의 몸체들로 접근해갔다. 영성은 이 과정을 준비/촉진하기 위해, 자기 의식의 조각들을 형상의 세계로 들여보내어 동식물을 존재케 했다.
 
- 그런데 이 경우, 그리스도 의식의 이 조각들이 형상 세계에서 정체성identity을 잃을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의식이 자신의 근원에서 추락하여 참나와의 연결을 잃고 만 것이다. 이같은 타락은, 의식의 조각들이 가장 고밀도의 창조물인 신체 속으로 들어가기 훨씬 전에 일어났다.
 
- 우리는 자신을 나눠진 존재로 상상하는 조각들인데, 그것은 사실 머리 속에서 지어낸 정체성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한 존재뿐이다. 영성은 양극성의 영역을 체험하고, 몸을 발달시키고, 비교로 배우기 위해, 물질의 옷을 입는다.
 
- 영혼이 자신의 근원과 재결합한다고 해서 자신만의 진동수, 즉 개별성을 잃는 건 아니다. 자신의 개별성을 그대로 지닌 채, 나눠진 상태에서만 벗어난다.
 
- 영혼이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극성 자체로 들어가야 했고, 그래서 영혼은 자신을 남성에너지/여성에너지라는 양극성으로 나누어야 했다.
 
이 때문에 모든 영혼은 자신의 반대 극성을 짝영혼soulmate으로 갖게 된다. 물론 모든 영혼은 신의 표현이기에, 결국은 모두가 모두의 짝영혼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일차instant 영성인 그리스도 나는, 신체가 태어나서 양극성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근원/목적을 잊는다.
 
하지만 태아가 아직 자궁 속에 있는 동안에는, 누가 어떤 언어로 말을 걸더라도 태아는 이해한다. 예를 들어, 태아의 신체 위치가 정상분만에 적합하지 않을 때, 몸을 바른 방향으로 돌리도록 사랑의 언어로 요구하면, 태아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그럼으로써 산모는 제왕절개를 피할 수 있다.  
 
이래도 낙태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신이 태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은 태아의 영혼은 크게 상처입는다.
 
- 일단 영혼이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오고 나면,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뒤집힌 방식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진리/신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실체Reality와 정반대로 인식한다.
 
절대자인 그리스도 나의 이 개체 표현은,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다른 나들의 무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들을 다른 사람들로 여긴다. 이제 몸으로 구획지어진 그것은,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보게 되니, 분리의 환상은 이렇게 해서 현실이 된다.
 
하지만 육체는 분리를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가 신 안에 있을 때는, 우리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다. 신을 신으로 인식하는 건, 육체의 시야로 볼 때만 가능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육체를 갖고 윤회하는 이유다.
 
 
- 우주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규칙이다. 즉, 이곳은 우리 은하 전체의 모험 추구자들이 가장 위험한 모험을 맛보기 위해 모이는 곳이다. 오직 여기에서만 신의 아들은 자신을 잊을 기회, 즉 자신의 근원을 부정한 후 얼마나 멀리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알아볼 기회를 갖는다.
 
비유하자면, 윤회 속의 잠재 위험은, 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번지 점퍼의 위험과 비슷하다. 즉,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은, 자신이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빛으로 되돌아갈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거기엔 보통 몇십조 년이 걸린다.
 
이처럼 고밀도의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영성의 여행은, 영혼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시험이지만, 그걸 거치면서 자신의 기원인 빛 속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낸다면, 그의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 된다. 그는 삼라만상의 가장 심오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이것은 그를 참으로 숭고한 스승이자 도움주는 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 사실 그의 배움은 너무나 위대해서, 자신이 선택한다면 그는 행성 전체의 진화를 책임질 수도 있다.
 
 
- 윤회하는 동안 겪는 모든 체험에는 감정이 투입되며, 그것은 여기서 얻는 유일한 자산이고, 영혼 속에 기록된다. 영혼은 태양신경총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체험들이 불러온 감정의 정수들만을 기록한다. 개개인의 품성은 이 모든 축적된 감정들의 총합이고, 얻은 교훈들의 결과물이며, 그래서 당신은 현재 이 순간까지를 통틀어 최상의 존재다.
 
- 각 개별성의 특징은, 그 생애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게 선택된다.
 
예를 들어, 무용수의 삶을 배우기 위해 강하고/날렵한 몸을 선택하는 수가 있다. 또 다른 예로, ‘자비’를 배우기 위해 불구의 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는 삶의 주류에서 배제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배울 것이고, 나중에 다른 생애에서 한 불구자를 만났을 때, 이번에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므로 자비심을 발휘할 것이다.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가서 닿고, 그를 자신의 형제로 인식하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분리에서 벗어나, 합일의 방향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무용수/불구자는 서로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외모/행위는 표현/배움의 수단이란 면에서 똑같이 유효하다. 일단 이것을 머리/가슴으로 진실로 이해하면, 범죄자/권력/중개인/노예상인/아동강간범/도둑 등을 심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역시 자신의 영혼을 감정으로 풍요롭게 하기 위해, 배움을 위해, 특정 단계의 생애에서 특정 역할을 해내는 순결한 영혼들로 여겨질 때... 우리가 무엇으로 이들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 영혼은 특정한 교훈들을 배우기 위해, 그런 기질/성격을 지닐 수 있는 출생시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자신의 12궁에 얽매인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생애 동안에 배움이 아주 잘 진행된다면 그는 자신의 별 운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영원한 지금뿐이다. 시간이 없으니 미래/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생애들은 일직선으로가 아니라 나란히 평행으로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한다. 아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일직선 사고, 양극성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해보겠다. 소설/영화를 생각해 보라. 모든 줄거리는 이미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 번에 하나의 장/장면만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간 개념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중의 것을 미리 들추어 보면 예지가 되는 것이다.
 
 
-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것은 피해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배울 기회이며, 양자는 그 사건 전체를 공동으로 창조한다.
 
- 길가에 쭈그리고 앉은 불구자는, 그의 영혼이 자기 나름의 교훈을 배우는 데 필요한 형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전에는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동정’을 느낄 것이다. 여전히 그를 동정하지만, 이제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동정한다. 하지만 냉담함/우월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당신이 언젠가 불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비판하는 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구가 된 적이 있다는 건, 내가 그랬던 적이 있으므로 이제는 그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내 영혼에 그 느낌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귀한 신분의 숙녀는 길에서 매춘부를 보더라도, 만약 자신이 그 위치에 있어본 적이 있었다면, 그 매춘부를 이해할 것이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알기 때문이다.
 
- 이런 식으로 배움을 진전시키면서, 우리는 윤회라는 여행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 영혼이 축적된 체험으로 흠빽 젖는 때가 찾아오게 된다.
 
이런 축적은 영혼에게 어떤 절대적 권태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모든 곳에 있어봤으며, 모든 것을 체험해봤기 때문이다. 혹은 엄청난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제 억만겁의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그의 가슴은 "틀림없이 뭔가 다른 길이 있을 거야“라고 울부짖으며, 그의 생각은 <눈 앞의 물질들>에서 <삶과 관련된 물질들 전체의 의미>로 초점을 옮길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배움은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전에는 백 번의 생애에 걸쳐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이제는 단 한 번의 삶으로도 깊이 이해한다. 이제 초점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한다(하늘 왕국은 내면에 있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을 통해 배움이 최고점에 이르면, 더 이상의 환생은 불필요하다. 그 영혼은 이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다.
 
 
- 조심할 게 있다. 영혼이 체험을 반복하다 보면 고정관념이 생겨날 수 있고, 그러면 인식이 고정되고, 그러면 결국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한 채 생애를 반복하게 된다. 삶의 고통/투쟁/증오/불쾌함을 계속 체험하는 것이다. 틀에 박히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체험을 통해 두려움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배우고 나면, 두려움이라는 인식은 고정된다. 우리는 믿는 것만을 인식하기에, 이제는 그 믿음을 더 굳혀주는 체험들에 계속 끌리게 된다. 결국 전혀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안 속에서 반복되는 생애들만 살게 되는데,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의 진짜 원인을 깨닫게 해줄 새로운 체험들에 문을 열 수 있다. 두려움의 원리를 확인하여 원인을 알고 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우리가 삶과 하나임oneness에서 분리되었다는 환상이다.
 
-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인식을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인식하려면, 인식 대상에 대한 판단을 멈춰야 한다. 판단은 인식을 고정시킨다. 즉, 그릇된 인식을 불러온다.
 
판단이 없으면 비난도 없고. 비난이 없으면 죄도 없고, 죄가 없으면 용서 역시 무의미하고, 용서할 필요가 없는 상태란 결국 순수 존재의 순결합의 상태, 즉 깨달음의 상태일 수밖에 없다.
 
- 체험의 반복은 판단의 반복을 가져오고, 그것은 습관화된 인식을 만들어내고, 점점 더 거기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질 영역 속의 여행을 시작함으로써, 자아는 자신을 낙원에서 추방했고, 자신의 기원/근원을 잊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전하게 집에 있으면서 꿈 속을 여행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하나 상태에서의) 분리라는 환상’에 대한 참된 인식이다.
 
- 죽고 영계astral place로 간다고 해서, 영혼이 그릇된 인식(환상)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죽음 또한 환상의 일부다). 거기서 벗어나는 건, 물질계에서 그 영혼의 배움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달려 있다. 물질계에서 영혼이 ‘모든 생명의 하나임’을 더 깊이 인식했을수록(물론 속세에서의 행복은, 영계에서의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중에 영계에서 더 행복하다.  
 
 
- 영계에서의 휴식기가 지나고 나면, 영혼은 의식 수준에 따라 에테르계etheric realm나 정신계mental realm로 옮아가거나, 더 배우기 위해 환생한다.
 
만약 전생이 생존 차원의 일상만으로 가득찬 덕분에 어떤 의미있는 배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영혼은 배움을 얻기 위해 또 환생한다. 이 순환은 수백만 번의 환생에 이를 수도 있다.
 
육체의 필요를 넘어서서 보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가슴을 열면, 그 때부터 (이젠 생존 차원을 넘어선) 배움이 시작된다. 이제 영혼은 영계에서의 휴식기 후에 에테르계로 가서, 자신의 배움 단계에 비례하는 기간동안 그곳에 머물게 된다. 즉, 배움이 높을수록 윤회의 주기가 길어진다.
 
속세에서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배움들을 받아들였다면, 그 영혼은 에테르계에서 정신계나 원인계causal realm로까지 옮아갈 것이다. 계가 높아질수록 기쁨/행복의 체험/스릴이 더 크다.
 
속세 체험이 처리되고 배움의 본질이 소화되고 나면, 영혼은 다음 번 환생을 준비한다. 만약 배움이 ‘나와 신이 하나’라는 깨달음으로 최고점에 달한다면, 물질계에서의 배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는 환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다.
 
 
- 개인/집단 배움의 문제를 살펴보자. 각 영혼은 가능한 체험의 스펙트럼 전체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인류 전체로서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한 번도 모성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한 남성의 영혼이 모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물방울이 바다와 하나이듯이, 그리스도 나인 우리는 절대자 속에 거주하며 아버지와 하나이고 부분이다. 바다/물방울의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 물방울은 여행을 시작하여... 구름 형상으로 하늘의 오만한 높이를 체험하고... 벼락 치는 번개의 힘과, 진흙탕 물웅덩이의 권태와, 신선한 계곡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의 펄떡이는 춤과, 티끌 한 점 없는 순수 등을 체험한다(체험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고리는 무한하다).
 
결국 물방울은, 자신의 기원인 바다로 돌아갈 길을 찾아낸다. 물방울의 축적된 체험들은 모두 바다의 자산이 되고, 전지전능한 대양의 자산들은, 역으로 물방울의 것이 된다. 바다와 하나됨으로써, 물방울은 바다의 자산을 얻는다. 바다가 물방울이듯, 물방울도 바다이기 때문이다. 신이 나 자신I Am이듯, 우리 자신도 신이기 때문이다.
 
 
- 태초에 영성인 나Spirit-SELF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모험을 위해서, 자신의 에너지 일부를 떼어내어, 영성이 완벽하게 들어갈 수 있는 물질 거주처, 즉 신체를 준비/발달시켰다. 덕분에 영성은 잡일(음식물의 소화/흡수/배설 등 모든 무의식 행동 등)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지상의 것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한 나ONE SELF의 이 부분은 물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넓은 시야를 잃고, 애초에 예정된 역할을 넘어서 자신의 행동을 넓혀나갔고, 자신의 참된 나에 관한 지식을 잃고 말았고, 자신을 거짓된 존재상태 속에 놓았다.
 
이렇게 해서 거짓 자기altered Ego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하나와 분리시켰으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을 신의 대립물로 나타내야 했다.
 
 
- 그러나 이 같은 분리는 상상의 산물이지, 실체가 아니다. 어린 소녀가 소꿉놀이에 너무 깊이 몰두하면, 딸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잊고, 자신을 엄마로 생각할 것이다. 바로 이런 식의 거짓된 마음 상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 속에서라면, 영원히 길을 잃는 영혼은 없다. 역할 놀이에서 깨어나기로 결심하는 데 설사 억만겁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 거짓 자기는 모든 면에서 한 나ONE SELF와 대립하기 위해서, 한 나의 대립물이 되어야 했다. 한 나는 어디에나 편재하고/전지전능하니, 거짓 자기는 반대로 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자신을 연약함/무력함의 이미지로 비춰야 했다.  
 
그래서 거짓 자기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은 육체였고, 그걸 섬기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과제가 되었다. 아름답게 꾸미고/장식하고/몰락하고/성공하고, 생존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고, 거짓 자기의 정신나간 요구들에 복종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고 말았다.  
 
거짓 자기는, 신이 오직 사랑만을 창조했던 그 자리를 두려움/증오로 바꾸었고, 풍요로움이 온 우주를 가득 채우던 곳에서 부족만을 느꼈다. 획득/상실이라는 발상이 생겨났고, 영혼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자신을 부양해야 한다는 발상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자신을 신에게 사랑받는 순결한 존재로 알던 우리가, 이제는 언젠가 불구덩이에 던져질 저주받은 가엾은 죄인이 되었다. 신은 죄를 그냥 실수, 즉 ‘사물을 보는 잘못된 방식’으로 보지만, 거짓 자기는 죄를 진리로 확립했다.
 
- 하지만 신은 사랑이니... 사랑은 오직 순결함만을 보고... 실수한 아이, 길 잃은 아이, 놀이에 싫증난 아이만을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뿐이다.  
 
- 그런데 거짓 자기라는 개념을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온 힘을 다해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싸운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함정에 빠지게 할 뿐이다. 어떤 종류의 씨움이든 그것은 저항이고, 결국 대립을 만들어내며, 그래서 모든 싸움은 대립물의 영역인 거짓 자기의 세계에 속한다. 결국 환상이 환상과 싸우는 것이다.
 
모든 저항은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쪽 뺨을 내밀라”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거짓 자기란, 바로 나 자신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소중히 품어오던 <나의 잘못된 일부>이다. 자기 존재의 일부와 싸울 때, 그 결과는 더 심한 분열/해체밖에 없다.  
 
절대로 그것과 싸우거나/저항해서는 안 된다. 단지 그것을 부드럽게 집으로 불러들여, ‘네가 현실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라고 말해주면 된다. 그 어둠/혼란/절망의 세계로부터 참된 한 나로 데려와서 통합시키는 것이다. 무저항은 양극성의 균형이다. 그걸 배우고 나면 참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 100번째 원숭이 현상..... 이 원리는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특정한 사고 양태를 고수하는 개인들의 수가 임계수치에 도달하면, 이 사고 양태는 모두의 자산이 된다. 즉, 한 집단의 사고 진동수가, 인류를 공명체를 공명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인플루엔자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의 사고 진동은 비슷한 방식으로 그의 가족들/친구들/동료들에게 옮겨가고, 인플루엔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결국 임계치에 도달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플루엔자를 생각하게 되고, 그렇다면 설사 재난이 일어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고, 생각하는 대로 현실을 창조한다.
 
- 물질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대한 영적 이해로 깨달음을 확장시키려는 사람은, 모든 욕구를 내던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이기적이다. 차이점은, 그가 원하는 건 삶의 단편들이 아니라 삶 전체라는 것이다. 그는 물질 가치만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질렸다. 그는 더 큰 부, 나아가 모든 것인 <근원 자체>를 요구한다.  
 
- 영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실체에 눈뜬다는 뜻이다.  
 
- 부자에게든/빈자에게든 돈이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이다. 돈은 안전이 보장되는 고지다.  
 
- 잠자는 차크라들의 활동을 막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내려놓을 때, 아무도 우리를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두려움이란 건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는 수준으로 진화할 것이고, 통제를 즐기는 권력자들은 우릴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기원 후, 사람들이 두려움의 진동을 유지/확립하는 데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교회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 많고 타락한 존재라는 교리를 퍼뜨렸고, 사람들은 큰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 당신이 자신이 누군지 진정으로 안다면, 당신을 있게 한 영성이 당신을 완벽하게 부양하고/보살펴준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을 것이고, 누구도 당신에게 통제/해악을 주지 못할 것이다. 존재 전체가 자신이거늘, 당신이 누구를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을 놓아버리면, 어떤 것도 우리를 통제할 수 없다.
 
두려움 없는 마음 상태란... 조건 없는 사랑, 자신이 창조주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것, 즉 초월 의식이다. 이런 사람은 세속의 어떤 역경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 한 영혼을 빛으로, 슬픔/부족이 없는 자연스런 존재상태인 순수한 기쁨으로 데려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대개는 고통이다. 영혼은 나를 부정하는 놀이에 완전히 지치고 나서야, 그 끝없는 윤회로 체력을 다 소모하고 나서야, 마침내 겸허해져서, 외부가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제 영혼은 울부짖는다.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거야, 신이 있다면 제발 절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지만 도움을 받고 나면, 대개는 다시 그 놀이에 달려들어 신을 잊고 만다.
 
- 사실, 빛으로 돌아가는 데 고통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만든 드라마에서 깨어나려는 진지한 바람뿐이다. 그리고 이런 바람을 가지려면, 먼저 이 드라마의 참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워낙 생존 게임에 꽉 붙들려 있는 우리로서는, 빛으로 나가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며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가 내놓아야 할 소유물은 오직 하나, 우리의 불안뿐이다.  
 
- 영혼은 육신의 영역을 체험하기 위해 육신으로 초점을 좁힐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럴수록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신이 유일한 실체로 비칠 때, 숭배받는 것은 그 육신을 있게 한 영성이 아니라 육신 자체다. 이게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언제나 우리의 육신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우리는 육신을 숭배하는 데 삶을 바치고 있다. 건강/잠자리/음식/여흥/치장/교육/권력/부....
 
- 육신에 대한 이 극진한 보살핌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서 나온 것이다. 몸은 감옥이고, 제멋대로이고, 노쇠하고 쪼그라든다. 잠시동안만 젊음을 보여주다가, 결국에는 육신이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로 삼기 위해 그것을 가져가 버린다.
 
모든 걸 다 얻고 나서도 우리는 뭔가가 빠졌다고 느낀다. 삶 자체에서 저절로 우러나야 할 뿌듯함/유쾌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약물/알코올/게임 등에 빠지거나, 아니면 삶이란 으레 그런 거려니 하면서 우울한 채로 산다.  
 
- 영성은 값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기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 신체 체험은 굉장한 모험/기쁨이다. 하지만 삶/영성이 균형을 잃으면 우린 고통을 피할 수 없다.
 
- 꿈에서 깨어나려면, 꿈의 일부분을 꿈의 다른 부분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길 그만둬야 한다. 즉, 꿈의 모든 부분들을 똑같이 가치있게 보고, 비판을 멈춰야 한다. 환상의 일부에 매달리는 한, 여전히 환상 전체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므로, 이런 상태에서는 빛 속으로 도약하기가 불가능하다.
 
- 삶의 어떤 특정 측면이 다른 측면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분리를 경험한다. 때로는 어떤 측면이 다른 측면보다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무효화한다면 그건 분리가 된다.
 
-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자기 세계, 내면의 마음을 바꿀 때뿐임을 절대 잊지 마라.
 
- 영혼은 자신이 듣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육체는 그 사람의 노쇠에 대한 개념에 비례해서 노쇠해진다. 참된 인식은, 생일 축하란 결국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의 초읽기라고 본다. 우리는 요란한 소음/웃음으로 그 경주를 축하함으로써, 그 날을 거짓 자기의 날로 만든다.  
 
그러나 시간/나이의 개념들을 잊는다면, 우리는 늙는 법까지도 잊을 것이다. 몸 세포들은 그 사람의 의식에 복종하게 마련이어서, 무한히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 육신 자아의 현실이라면, 그것들은 그렇게 하리라는 걸 참된 인식은 안다.  
 
 
- 환상의 세계와 만날 때마다, 내면의 나이자 하나이며 유일한 신을 섬겨야 한다. 그럼 이제 우리는 교조/구루/교회/선각자들이 아니라 나를 따르게 된다.  
 
- 참된 인식은 상황을 조작하거나/바꾸지 않는다. 그냥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으로 치유한다.  
 
- 참된 인식이 제공하는 나름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주변의 진동수를 끌어올린다. 이것은 우리와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동에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해서 100번째 원숭이가 올바른 시야를 가질 때, 그들의 결합된 진동은 지구 전체에 파문을 일으킨다. 결국, 자신을 치유하면 세상을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 자신의 생각/행동의 동기가 두려움에 근거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라. 만약 그렇다면, 환상의 목소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그 세상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자신에게 일깨운 뒤,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흘려버리면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면 된다.
 
두려움은 무지, 즉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염려든, 거짓 자기의 유일한 실체인 개성(=육신 자아)과 동일시할 때 생겨난다. 우리 존재의 참된 성격을 깨닫기 위해서는 개성 자아를 넘어서야 한다.
 
- 참된 인식과 더불어 나오는 지식을 실제로 적용할 때, 우리는 세상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거짓 자기까지도 치유한다.  
 
참된 인식은 시간을 ‘영원한 현재’인 지금으로 인식하고, 내일 역시 그냥 또 다른 지금이란 걸 안다.  
 
- 그런데 참된 인식을 우리의 시야로 삼고 나면, 거짓 자기는 우리를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끌어오려고 애쓴다. 우리가 마침내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났다고, 여전히 그 속에 있는 타인들보다 우리가 잘났다고 느끼게끔 한다. 자부심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우리를 우리 형제들과 분리되도록 한다.
 
- 자부심의 반대 개념인 열등감 또한, 거짓 자기가 즐기는 놀이의 하나이다. 분노 역시 장애물 중의 하나인데, 그러나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면 오히려 더 안 좋다.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때는, 억지로 평온해지려고 애쓸 필요없다.  
 
- 자신이 참된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 한 가지 해결책은, 그것을 우리의 진짜 나인 신 나에게 넘겨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참나에게 맡기는 것). 그런 후, 절대로 거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저 "아버지시여, 저는 옆으로 비켜나겠습니다. 당신이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해야 한다.
 
내버려둔다는 건 철저히 믿는다는 것이고, 진정으로 신뢰하고/내버려두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다. 우주에서 사랑이 공급할 수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어렵고/쉽고조차 없다. 사랑으로 해결 못하는 것은 없다.
 
사랑은 우주이자 모든 것이고, 나에게 오직 주기만 한다.
 
- 내면의 조용한 목소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는 너 속의 나다.
우리는 하나다.
모든 것에 충만한 오직 한 영성만이 존재하니, 그것이 나다.
나는 기쁨/사랑/평화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희를 통해 나 자신을 경험하는 창조물은 나의 나다.
나는 너다.
우리는 하나다.‘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큰 기쁨이 올 것이고, 삶 자체가 영원히 바뀔 것이다. 이 이해는 진흙 인간을 신 인간으로 바꾼다.
 
 
- 우리는 부/건강/거주처/짝을 찾으려고가 아니라, 우리 속의 나인 신을 찾으려고 이곳에 있다. 이 목표에만 오로지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 그것은 참된 시작이고, 그냥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놀랍게도 다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올 것이다.
 
- 모든 것을 있게 한 ‘영성’에 대한 복종/감사/믿음을 가져라.
 
- 나는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보편 나의 개별 표현이고, 보편 나이고, 우주이고, 우주가 담고 있는 모든 것이다.
 
-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선언하고, 자신의 현실을 결정한다. 그러니 나는 착하다/나쁘다, 혹은 가치있다/가치없다, 정당하다/비열하다 따위로 말하지 말고, 그냥 나I AM라고 말하라. 그거야말로 순수 존재 상태이다. 존재란 이런저런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고, 순수 존재는 순결하다. 그것은 그 모두이다. 순수 존재가 자기 존재의 한 측면만을 골라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전체가 아닐 것이고, 불완전 영역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우주 전체를 통틀어 오직 하나인 나만이 있으니, 너의 나보다 더 위대하고/가치있고/현명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나의 개체 표현이 꿈을 꾸느라 잠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한 나이다.
 
우리의 다음 순간을 설계하는 우리 외부의 신이란 건 없다. 그렇게 하는 건 우리다! 우리가 바로 그 신이다.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꿈꾸는 신.
 
- 가해자/피해자는 서로에게 특정 배움을 주기 위해 상황을 함께 하길 선택했던 것이다. 분리된 자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 똑같은 한 나이고, 잠자는 신의 아들들이 만들어낸 공동 창조물이다.
 
참된 인식은 이 모든 것을 차분하고/투명한 마음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은 세상사고방식을 넘어선다.  
 
 
- 유혹에 저항하지 마라. 저항은 자신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짓 자기의 유혹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생명을 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 꿈을 현실로 유지하며, 꿈이라는 그 영역을 절대 떠나지 못한다. 그 해결책은 그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그냥 미친 꿈으로 보는 것이다.
 
참된 인식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참된 인식은 싸우거나/저항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자신이 보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 나쁜 꿈은 가볍고 부드러워지며, 거기서 깨어나는 것도 쉽고/기쁜 일이 된다.
 
 
- 존재에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은 ‘원하지 않음’이다. 원하지 않는다는 건 완벽하다/있다는 뜻이다. 이렇거나/저런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다.
 
있기 위한 유일한 장소가 여기이고, 있기 위한 유일한 시간이 지금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미래의 지금을 위해 계획하지 않는다. 잘 살고 있는 지금이, 미래의 지금을, 그것의 과거만큼이나 가치있게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과거/미래를 들여다보는 순간, 더 이상 여기/지금에 있지 않게 된다. 지금 여기에 산다면, 우리는 존재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 지구는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옮아갈 준비를 하고 있고, 전체 은하들의 재배열과 관련된 과정 속에서 초기 단계를 겪고 있다.
 
지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구가 대순환의 중앙에 있고, 또 관련된 모든 은하들의 정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다른 차원의 형제들은, 지구가 순탄하게 전환되길 바란다. 그게 그들의 성장에 필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형제들은 큰개자리의 플레이아데스성단/오리온성좌/시리우스별,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켄타우루스자리의 알파성/베타성 등에서 온다.
 
우리 태양계 속에도 지구 내부세계, 금성 등등 출신의 4차원 존재들이 있다. 금성은 앞으로 다가올 영겁의 세월동안 지구를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다.
 
- 지구는 심한 장애를 겪고 있다. 인류의 의식 균열이 지구의 에너지 흐름에 장애를 주고, 결국 엄청난 압력을 만들어낸다. 지진/화산/폭발/홍수/태풍 따위는 그런 압력이 터져나오는 안전 밸브이다. 오존층의 구멍은 인류인 우리 내면의 구멍, 신 나로 채워지길 갈망하는 공백이다.
 
세포가 신체의 일부이듯, 우리는 지구의 세포들이고, 인간의 사고방식 에너지와 행성 자체의 에너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이 제대로 호응하지 않을 때, 부조화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사랑/목적 없이 몰려다니다가 결국 허무하게 끝나버리던 그런 시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삶에 대한 물질적 이해에서 영적 이해로 비약하는 새로운 시대로 우린 들어섰다. 빛의 힘은 인간 의식을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촉진하고 있다. 인간의 현실을 물질계에서 에테르계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주 재탄생의 순간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 파괴 지향적인 사람들은, 3차원에서 자신들의 진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4차원의 지구는 더 이상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므로. 모든 영혼은 자유의지를 갖기에, 각기 나름의 선택을 내리게 마련이다.
 
 
- 인간 의식이 지구의 확장 과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예언들이 경고하는 끔찍한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 땅의 여신 테라가 아는 유일한 세척/복원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이란 건 반드시 실현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선택이 가져올 가장 가능성 높은 현실을 얘기해줄 뿐이다. 우리가 흐름에 맞춘다면 재난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에겐 2가지 방법이 있다.
1. 재난/파국의 고통을 겪는 것. (흐름에 맞추지 않는 것)
2. 지구+인류가 부드럽고/조화롭게 새로운 시대로 가는 것. (흐름에 맞추는 것)
 
- 누군가를 계속 화나게 한다면, 그는 마침내 화를 낼 것이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재난은 벌이 아니라, 지구의 안전 밸브이다. 화산폭발/지진/가뭄/홍수 등은 지구가 압박/고통을 풀어버리는(화를 내는) 방식이고, 이렇게 해서 지구는 정돈된다.
 
그러나 화난 상대에게 당신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그는 누그러지고, 압력/분노는 사라지고, 정돈되고/편안해진다. 이것이 사랑의 길이다. 우리가 어머니인 지구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지구 역시 기쁨/편안함을 표현할 것이다.  
 
 
- 두려움을 넘어선다는 것... 즉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내면의 신성한 근원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기에, 모든 부정적/파괴적 요소들까지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마우리족은 나무를 베기 전에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버펄로를 죽이기 전에 그랬다. 그 존재들에게 경의/감사/축복을 표했다. 그것은, 우리 몸을 유지하도록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존재들에게 사랑/공경심을 가지는 것이다.
 
깨달은 영혼은, 자신을 먹여주고/유지해주는 어머니인 지구를 사랑하며, 그녀가 오염되길 원치 않는다. 오염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자신을 정화하면, 지구 생태도 정화된다.
 
-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그릇된 인식에서 참된 인식으로 바꿀 때,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그의 높은 생각 진동은 주변의 진동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엄청난 치유 효과를 갖는다.  
 
- 두려움에 토대를 둔 분리의 현실을, 사랑/근원과의 합일로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우주 전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농부는 익은 것만 거둔다. 익지 않은 것들은 다시 땅에 뿌려져서 성장 과정을 새로 밟아야 한다.
 
 
- 이 세상은 양극성polarities, 즉 대립물로 이루어져 있다. 긍정/부정, 남성/여성, 평화/전쟁...... 이것은 물질 영역만이 아니라 창조물 전체에 해당된다.
 
양극성이란, 존재 전체인 신 나가 서로를 대립물로 비추는 상태를 말한다. 서로 대립하지만 반대하지는 않고, 단지 서로를 반영할 뿐이어서, 갈등 따위는 없다.
 
- 생각/감정/꽃 등등,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형상은, 형상으로 드러난 에너지에 지나지 않으며, 이 에너지는 언제나 합일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각각의 표현은 우리가 좋아하고/싫어하고에 상관없이, 반대편과 똑같이 타당하다.
 
하지만 하나임에서 떨어져 나온 마음은, 이 전체성을 합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양극화된 측면들로 보고, 각각을 전체로 보고 평가를 내린다.
 
밤/낮은 다른 국면들로 드러나지만, 같은 연속체이다. 밤은 낮에게 양보하지만 갈등 따위는 없다. 오히려 한 쪽은 다른 쪽 없이 존재할 수 없다.
 
 
- 한 극성을 다른 쪽보다 더 가치 있거나/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통합된 전체에서 가려내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문제로 발전한다. 본래 삶이란, 우리 개입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다. 삶을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낙원 같은 존재 상태에 이를 것이다.  
 
삶의 모든 표현물들은 양극성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을 보인다. 이 흐름을 막으면 작동 중단 사태가 온다. 밀물/썰물 중 어느 한 쪽을 뺏는다면, 바다의 흐름이 멈출 것이다.  
 
흩어지려면 쌓여야 하고, 뭔가를 들어올리려면 먼저 허리를 굽혀야 한다. 어떤 운동의 양극성 중 한 쪽을 막는 건, 운동 전체의 정지를 불러온다. 이 같은 대립물의 조화는, 작은 세포에서 드넓은 은하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 양극성을 균형잡는다는 건, 양극성의 영역 전체와 화해한다는 뜻이고, 그 결과, 갈등을 모르는 의식인 참된 인식이 얻어진다. 에너지들이 다시 통합되어 조화롭게 흘러가게 되고, 그러면 이제 고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위로도/아래로도 자란다. 악은 처벌받고, 덕은 보상받는다. 물을 손으로 가르면 다시 합쳐진다. 자연은 언제나 완벽한 균형 속에 있다. 인간이 그릇된 현실 인식으로 균형을 뒤집을 때, 불균형은 나타난다. 그릇된 인식은 오직 동전의 한 쪽 면만을 인식한다. 우리는 한 쪽 극성을 반대 극성으로 바꾸는 게 삶을 개선해 주리라는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채... 계속해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모자람을 풍족함으로, 불안정을 안정으로 바꾸려 한다.
 
한 극성은 전체의 일부이므로, 하나를 부정하면 다른 것도 부정하게 되고, 결국 둘로 이루어진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대립물이란 삶 자체의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것에 반대/거부하는 건 삶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거부’는, 막힌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줌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화/현실화한다.  
 
 
- 우리는 조건들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 조건은 단지 행복한 마음의 결과/표출/반영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행복한 마음은 언제나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게 마련인데도.
 
우리는 징후의 원인을 찾는 대신에, 징후를 바꿔보려고 한다. 하지만 외부는 내면의 반영일 뿐이다. 부상/질병/전쟁이든 뭐든.  
 
 
- 질병이란, 삶이 배우지 못한 교훈을, 아니 우리가 다른 식으로는 배우길 거부하는 교훈을 신체를 통해 지적하는 한 방법이다. 온갖 질병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의식이다.
 
 
- 질병보다 건강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당신은 또 한번 양극성을 분리시키고 말았다. 질병/건강은 응집된 한 전체의 양면일 뿐이다. 질병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는 내면 상황을 비춘다는 점에서, 언제나 유효하며 엄청난 치유력을 갖는다.  
 
질병을 포함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면, 우리의 거짓된 마음상태가 범인임을 깨달을 것이다. 궁극 원인이 분리임을 이해할 때, 질병은 없어질 것이다. 그 질병은 자신의 목적을 완수했으니,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다.  
 
 
- 분리 상태에 있는 마음은 대상을 쪼개고/나누고, 그 부분들 각각에게 다른 가치를 준다. 삶의 한 쪽 부분/가치가 다른 쪽보다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유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다. 최고의 진리는 최고의 단순성이다.
 
 
- 양극성의 균형잡기는 식은 죽 먹기다.  
 
이 느낌의 본질은, 삶의 어떤 표현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는 것, 따라서 삶을 껴안는 것이다. 이 고요는,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거짓 자기의 목소리만이 잠든 상태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환희의 춤으로 삶을 찬양할 것이다.  
 
양극성을 균형잡는다는 건 욕구들을 포기하거나, 생활을 축소한다는 이야기가 아나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똑같이 대한다는 것, 즉 삶의 부분들을 가려내어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의식은 증오/질투/탐욕 등 모든 억눌린 감정들을 존재 전체 속으로 풀어주게 되고, 그러면 우리 고유의 진동/취향에 공명하지 않는 부분들은 우리의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균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판단조차도 나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삶을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으로 보게 된다.  
 
-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의 세상을 갖는다. 각자가 퍼즐의 한 조각씩 들고는, 그것이 그림 전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대신, 자신의 퍼즐 조각만을 가치있는 거라고 주장하므로, 결국 불만/갈등/분열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화해/순응의 방식으로 처리하지만, 사실 그 속내는 세상을 자기 식으로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퍼즐 조각들을 응집된 전체로 다시 모아들일 수 있다. 어떻게? 개개의 상황/사람/조건, 아니, 그냥 모든 것 속에서 신성을 보면 되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는 판단에 의지하는 걸 미덕/성숙으로 본다.  
 
- 한 극성에 대한 판단은, 다른 극성이 솟아나오게 한다. 선이 악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때, 악을 무대 위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온다. 한 측면을 나머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그 대립물을 체험해야 할 현실로서 탄생시킨다. 마치 접시저울의 움직임과 같다. 한 쪽 접시에 더 무거운 걸 올리는 순간, 다른 한 쪽 접시가 고개를 쳐든다.
 
- 신이 존재 전체라면, 삶의 어떤 표현도 신성 즉 신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곳에 있는 까닭이 바로 체험하기 위해서다. 모든 감정을 그 근원에 의식적으로 재결합시키려면, 모두를 체험/포용해야 한다.  
 
-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생기/매력을 뿜어낸다. 그런 사람들의 감미로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원기를 준다. 감정은 언제나 지혜보다 앞선다. 체험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체험이 없다면, 생각은 진리로 익어가지 못할 것이다.
 
- 자신의 신체 체험의 이유가 그 느낌들을 다듬는 데 있음을 안다면, 판단 같은 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느낌들을 다른 느낌이나 생각과 마찬가지로 유효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판단을 내린다. 그는 자신의 느낌들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비판할 때, 그것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다.
 
- 그렇다면 해결책은? 한 극성에 나머지 다른 것들과 똑같은 권리를 주어, 삶이라는 전체 속으로 재통합하면 된다. 환상들이 그를 따라다닐 때, 그는 그것들을 이리저리 판단하지 말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껴안고/즐겼어야 했다. 그의 환상이 살인이라면, 그것을 억압/판단하는 쪽이 오히려 살인을 불러온다. 이 생각을 그가 숨겨두었던 마음 속 어두운 구석에서 풀어주는 것, 그것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자각의 빛 속으로 가져오는 것, 이것이 껴안음이다.  
 
살인에 관한 생각을 나쁘거나/부도덕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도록 하라. 그 환상이 평가받지 않고 생각 속에서 끝까지 펼쳐졌더라면, 증오심은 풀려나 존재 전체와 통합되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좋거나/나쁘다는 판단 없이 그냥 체험되고자 했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범죄를 경멸하는 판단 역시, 더 많은 범죄를 불러올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비판하는 것에 권능을 준다.
 
- 모든 사람을 지구라는 대학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는 친구로 보라. 모든 체험이 똑같이 유효한 삶의 표현이고. 따라서 쉽사리 심판할 수 없다. 이 분리의 영역에서 우리는 분리에서 합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우리 중의 누가 ‘체험을 선택하여 자신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려는 사람’의 권리를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상황/행동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배우게끔 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 세상이 판단을 내려놓을 때, 양극성은 통합될 것이니, 단 하나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건강을 질병보다 낫다고 판단하는 건 질병을 불러온다. 질병은 두려움에서 태어나고,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에 권능을 주며, 따라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질병은 이유가 있어서 나타난다. 질병은 언제나 감정의 불균형을 반영한다.
 
 
- 사건/사물/사람을 가려내는 우리 방식이 그릇된 시각임을 깨닫고, 그것들을 똑같이 가치 있게 평가하고/환영하고/껴안고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린 양극성을 통합하여 존재 전체 속으로 풀어주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온전함을 일구고, 그만큼 자신도 더 온전해졌다면, 그것들은 다시는 그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한 체험/느낌을 자신의 영혼 속에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애초에 그 환상들이 나타났던 이유이다. 삶은 이 체험으로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려 했고, 동시에 이 극성을 삶의 동등한 부분으로 확인받으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을 찾는 부르짖음이었다.
 
- 죄의식은 오직 죄를 실체로 여길 때만 생겨날 수 있다. 죄를 그냥 실수로 여기는 참된 인식은 실수에서 배우는 것으로 실수를 고치려 하지만, 죄의식은 우리를 영원히 분리에 묶어두려 한다.  
 
-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그 사람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외부에서 자기 행복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자기 가치의 결여,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참된 인식이라고 집착을 모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정한 초연함은 무관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된 인식은 자신의 행복을 사람/조건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데 차이가 있다.  
 
진심으로 소유물에 개의치 않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소유한 것을 즐기긴 하지만, 그게 자기를 떠나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 어떤 사람이 서 있는 환경은, 그가 배워야 할 특정 교훈을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며, 그렇다면 그에 대한 모든 판단은 무의미하다.
 
- 하나하나의 영혼이 다 독특하고,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  
 
- 우리는 대체로 한정된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 그 사람이 우리 척도에 들어맞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도 자기 나름의 척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는 우리는 생각하지 못한다.
 
모두가 당신의 어떤 측면들만을 본다. 모두들 당신을 평가하지만, 아무도 당신을 참모습 그대로 보지 않는다.  
 
 
- 만약 어떤 상황/사람이 싫다면 어떡해야 하나? 내 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린 동료 인간을 우리 존재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  
 
내 적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착해지는 걸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임을 이해할 때, 그의 느낌들만이 아니라 내가 반응하는 느낌들까지도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쪽 체험도 판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냥 공동 창조이다. 즉, 광활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거쳐가는 우리 여행길에서 경치를 살피려는, 또 한번의 멈춤일 뿐이다.  
 
-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서 싫은 점은, 사실 내 자신의 싫은 점이다. 따라서 결국 이것은 자기 비판이다. 우리가 자신을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을 조건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애의 결핍 때문이다.
 
이런 자기애 결핍은, 우리가 동일시하는 자아가 참나가 아니라, 그냥 어떤 자화상일 뿐일 때 생겨난다. 자화상이란 건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 그래서 결코 사랑할 수 없다.
 
- 적에게 느끼는 것이 증오이든, 반감이든, 그 감정을 판단하지 말고 다른 감정과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의 행동이 너무나 불쾌해서 그의 존재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그냥 떠나면 된다.  
 
우리가 불쾌한 상황/사람을 경험하게 되는 건 극성을 가려내어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이니, 그를 판단하는 건 자신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만약 모든 사람/상황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고 환영한다면, 불쾌한 사람/상황을 체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참된 인식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우리는 이 감정들을 전체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그것들의 근원인 전체와 다시 합쳐지게 만든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것들은 두 번 다시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억눌리는 것은 이런저런 식으로 튀어오르게 마련이다.
 
차라리 부정하거나/억누르는(즉 판단하는)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받아들임’이 양극성을 균형 잡는 열쇠이다. 시냇물은 자기 앞길을 막는 바위를 비난하거나/두려워하거나/미워하거나/부정하지 않는다. "바위야, 거기 있었구나. 난 네가 거기 있을 권리를 인정해, 하지만 내 에너지는 다른 식으로 쓰고 싶어”라고 말한다.  
 
- 쾌활함/웃음으로 대한다면, 우리가 그 장면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하더라도, 그 장면이 우리를 따라다니는 일은 없게 된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것들과 똑같은 존재 권리를 가진 것으로서 그것의 에너지와 화해하라.  
 
- 받아들인다는 건,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넌 나와 똑같이 여기 있을 권리가 있어. 인생이란 게임에서, 네가 선택한 놀이 방법이나, 내 선택이나, 똑같은 가치를 갖거든.”
 
- 어떤 감정이 아무리 두렵게 보이더라도 받아들이고/환영하고/마주하면, 그것은 전체 속으로 놓여나게 되고, 그러면 그 두려워하던 것을 직접 체험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균형 잡히지 않은 모든 극성, 통합되지 못한 모든 두려움은, 언젠가는 우리 삶에서 실제 체험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번 생에서가 아니면 다음 번 생에서라도. 그것의 출현은 사랑해달라는/재통합해달라는 외침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 삶은 자신이 분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것에 맞서 음모를 꾸미더라도, 모든 불균형은 결국에는 보상받게 마련이다.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업’이 이런 보상의 법칙이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응보도, 갚아야 할 빚도 없다. 모든 것이 지금 일어나는 거라면, 벌 받아야 할 과거 행동이란 대체 무엇인가? 모두가 하나라면, 벌주는 사람이란 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흔히 인과법칙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냥 균형이다. 물론 그것 역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즉,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상황은,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할 것과 예전에 우리가 건네준 것의 균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이 결론에는, 양극성을 통합시킴으로써 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 가치를 더하지 않는다면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일치하지 않는 모든 에너지가 통합되어, 조화로운 에너지로 되었기 때문이다. 동등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만이 동등하게 평가받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 체험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그것을 삶의 동등한 부분으로 평가할 때만 그렇다.
 
- 힘든 상황을 나쁘다거나 다른 것보다 안 좋다고 평가하지 말고, 조개의 염증이 진주가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라. 그 염증은 우리 속에 지혜라는 진주를 형성해 주므로, 염증 역시 똑같이 유효한 삶의 부분이다.
 
운수 나쁜 날을 만났다면, 그 날을 수축이라는 극성으로 보라. 그날에 반대/저항하지 말고, 확장이라는 짝과 함께 보라. 그러면 그 날은 온전한 날이 된다. 운수 나쁜 날에 저항하는 건 우리를 다시 한 번 헤매게 할 뿐이지만, 그것을 참된 시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날의 체험에서 모든 부조화스런 에너지의 자취를 벗겨낼 수 있다.  
 
- 운수 나쁜 날보다는 운수 좋은 날을 원하는가? 한 쪽 극성을 선호하는 건 괜찮으나, 그 선호 뒤에 의도가 깔려 있다면, 선호는 평가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어떤 감정도 부정하지 말고 환영하도록 하라. 설사 그 감정이 무가치/파괴적인 것이라 해도, 일단 똑같이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통합되면, 그것은 절대 현실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삶의 다른 부분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할 때, 우리는 두려워하고/억누르고/경멸하던 그것을 체험하고 만다.
 
- ‘저항은 그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를 오해하지 마라. 우리 피를 빠는 모기를 그대로 놔두고 보고만 있으라는 게 아니다. 모기를 환영하고/받아들이며, 그것 역시 유효한 삶의 일부로 보면서, 귀찮은 존재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모기가 피를 빠는 곤충으로서 체험 속에 들어오는 일은 절대 없으리란 뜻이다.
 
이 ‘받아들임’을 매순간 실천할 때, 이 진리는 매일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삶에 적용할 수 없고 삶을 바꿀 수 없는 원리라면,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의미있으려면, 그것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삶의 다른 표현물들처럼 모기 또한 사랑스런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모기를 그냥 모기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제 모기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그냥 모기가 된다. 피를 빠는 것은 모기라는 존재의 일부다. 모기는 자신이 두려움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른다. 모기가 양분을 취하는 형태는 어쩔 수 없이 공격이어서, 말하자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해를 가지고 모기에게도 똑같은 존재 권리를 부여할 때, 그것은 두려운 존재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
 
- 만약 모기가 피를 뺀다면, 우리가 그것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짓뭉개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곤충을 미워하거나/싫어하면서 이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그것들을 무더기로 불러들이고 말 테니, 차라리 아직 자신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 무심하게 죽이는 편이 낫다.
 
- 이 교훈을 배우는 데 성공한다면, 즉 삶의 모든 다양성을 믿고/인정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의 영적 영역은 두려움에서 사랑의 진동으로 바뀔 것이다. 이제 그 나쁜 것들은 우리의 주파수로 진동하지 않기에, 우리를 피한다. 우리의 영적 영역은 두려움의 주파수로 진동하는 어떤 존재/상황도 끌어당기지 않게 된다. 모기를 의식하거나 두려워할 펼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여전히 두려움의 주파수로 진동하고 있을 때, 우리의 영적 진동은 그것을 광고하게 되고, 두려움과 그 모든 자식들을 끌어당긴다.
 
이 때, 그 무는 벌레는 물질에 비친 우리 의식이어서, 우리 태도를 비춰준다. 참된 인식은 상황을 바꾸지 않고(=그 벌레를 죽이지 않고),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꾼다.
 
 
- 개가 당신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며 짖는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짐승/인간의 모든 종류의 공격은 사랑해달라는 외침이다. 공격이 거칠수록 더 그렇다.
 
참된 인식을 가지면 이 장면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참된 인식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기 스스로 그 상황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두려움 자체를 만들어낸 것도 자신임을 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자신의 창조물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참된 인식은 이런 이해를 가지고, 도망치지도/저항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참된 인식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진짜 비밀에 접근한다.  
 
참된 인식은, 개의 존재를 그냥 자신으로 인정한다. 그러자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던 개가, 불과 두어 발짝밖에 안 되는 곳까지 왔을 때 갑자기 멈춰 선다. 등을 살짝 두드려주니,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인정받은 것에 만족한 개는, 꼬리를 말고는 어슬렁거리며 가버린다.
 
 
- 개가 무서우면, 거미/모기로 연습해 봐도 괜찮다. 참된 인식은 똑같이 평가/통합한다. 통합된 삶이란 사랑이고, 사랑이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직면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게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게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 금연가를 예로 들어 보자. 그가 양극성을 통합시키는 순간, 금연은 더 이상 그의 체험이 되지 않을 것이다. 흡연 선택을 금연 선택과 똑같은 유효성을 갖는 것으로 여길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 어느 선택에나 똑같은 존재 권리를 인정한다면, 똑같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본다면, 결국 똑같은 가치를 갖게 되고, 따라서 어느 쪽을 택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개인의 선호 문제일 뿐이다.
 
흡연가는 폐암에 걸리고 말리라는 금연가의 두려움은, 오히려 금연가의 체험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내 형제를 염려하는 두려움이지만, 어쨌든 두려움을 느끼는 쪽은 나여서, 내 삶 속에서 내 체험으로 표출된다. 혹은 흡연가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결국 두려운 질병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이든 내 체험으로 나타난다.
 
- 질병을 건강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합된 전체에서 분리시킨다. 건강에 대한 모든 강조는, 사실은 분리 자체에 대한 강조가 되고, 그 결과로, 질병은 갈수록 더 표면화된다. 그것은 거부당하고 있기에 권능을 받는다. 즉, 건강을 (단순한 선호 이상으로) 강조할 때, 오히려 질병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열대우림의 파괴가 중요한 문제라면, 그 파괴는 물질화되고, 굶주리는 아이들이 중요한 문제라면, 그 굶주림 역시 물질화된다.  
 
 
 
- 중요한 것은 극성 자체가 아니라, 극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임을 잊지 마라.
 
예를 들어, 어떤 사업 거래를 했는데 당신이 손해본 것처럼 느낀다고 해보자. 당신은 분노하고, 배상받으려 한다. 물론 이것은 그릇된 인식이다.
 
하지만 참된 인식이라면, 손실이 아니라, 손실이라는 관념을 문제로 본다. 손실이라는 관념을 버리면, 그 관념 속에 든 모든 손실들도 함께 버리게 된다. 손실이란 관념은 하나의 분리의 관념일 뿐이므로.
 
 
-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사실 우리의 학습 필요에 맞추어 절묘하게 재단된 조건이다. 그것은 교사/친구이고, 실수를 바로잡게 해주는 기회다. 모든 문제의 궁극 목적은, 분리라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그냥 하나의 징후다. 징후를 없애거나/바꾸려고 해봤자,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고, 그래서 문제는 다시 드러난다. 대개는 형태를 약간 달리 해서, 또는 (이전엔 날 가르치는 데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더 큰 충격으로.  
 
손실이라는 관념 자체가, 공급 부족에 대한 두려움이고, 따라서 실체인 신에 대한 부정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마침내 그 교훈을 배우고/소화하게 된다. 이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금전상의 손실이라는 징후는 쓸모가 없어졌기에, 우리가 조작하지 않아도 흩어지고/해체된다. 모든 불균형(=문제의 진짜 원인)을 인정/직면하는 순간, 징후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기에 사라진다. 두려움이라는 극성을 마주한다는 건, 그것에 맞서 저항히지 않고, 그것을 환영하고/받아들이고, 그것의 참된 성격(전체성의 분열)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풀려나, 자신의 전체와 통합되며, 다시는 체험되지 않는다.
 
‘분리’의 관념을 머리/마음으로 이해할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온갖 모습으로 드러나는 분리를 허용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라.
 
- 분리를 치유하려면, 다투거나 다르게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극성들을 화해시켜야 한다. 분리 속에 포함된 온갖 질병들도 그와 더불어 치유된다.
 
양극성의 세계를, 대립하는 힘들의 세계로, 거부해야 할 대립물들로 인식하는 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싫고/좋고의 선호는 있을 수 있지만, 싫어하는 쪽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래야 전체에서 똑같은 가치를 갖는 두 부분으로 남아 있게 된다.
 
- 어떤 나쁜 것들이 현실화되는 이유는, 그것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만약 바람직한 것들과 똑같이 유효하게 보았더라면, 우리에게 중요해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중요하지 않기에 물질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우린 모든 카드들에 똑같은 가치를 준다. 속세의 의식에게는 다소 생소하겠지만, 우리가 가는 곳에는 승리자도/패배자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동전을 주었는데 "난 동전의 뒷면은 싫어. 앞면만 줘”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 이 찰나의 삶 역시 그러하다.  
 
 
- ‘넉넉함’이란, 삶의 모든 측면들에서 풍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급의 법칙은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들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경제적인 면은 공급의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그 반대가 ‘부족’인데, 그것은 바로 공급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 삶에 부여한 의미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다. 참나를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잡다한 것들....집/차/직업/지위/남자/여자/아이/권력/명성/섹스 따위를 추구하며, 이런 것들에 행복/성취가 있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원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결국 우리는 원하게 된다. 나중엔, 공급이 달릴 테니 가질 수 있을 때 가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그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싸우고/수고하고/땀흘리며/걱정하고/안달하면서, 우리 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짓밟는데, 그걸 생존 전쟁이라고 부른다.
 
 
-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미래의 어떤 손실/사건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두려워하므로, 결국 그것들은 올 것이고, 올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소유’ 게임에 빠져 있다. 이 게임은 승률이 아주 낮아서, 대다수 사람들은 실패한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자라고 부르지만, 그들 역시 거지이다. 소유하는 것을 자기 실현의 지름길로 믿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 우리는 삶이 내려주는 하사품의 부스러기에 만족하지 않고, 삶의 모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즉 근원 자체를 요구해야 한다.  
 
 
- 강에서 떠온 물의 출처는 강이 아니라 대양이듯, 당신 소득의 출처는 당신의 직업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자체이다. 직업이란 건 공급물이 흐르는 수단/통로일 뿐이고, 당신의 존재 자체가 당신을 부양한다. 당신이 그런 직업을 가진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다.
 
내 존재 자체가 나를 부양한다. 이런 이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주어진다. 노동/스트레스/수고는 그에게 미약한 잔재로만 남을 것이다. 어떤 일거리가 그를 몹시 열광시킬 때, 그는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매 순간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 3삼자의 눈에는 무척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무엇을 만들고/생산하고/창조하든, 그가 그 일을 하는 것은 일 자체의 기쁨을 위해서지, 대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 사과나무는 모두에게 차별 없이 사과를 주며, 내년에는 더 많은 사과를 맺을 것이다. 어쩌면 사과나무가 인간보다 더 지혜로울지 모른다. 자기 노동의 열매에 신경 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 자체를 즐기므로. 이런 정신의 노동자는,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임을 안다. 이런 마음 상태는, 드러나는 모든 형태가 근원에서 솟아나온 것임을 안다. 그는 무엇이건 바라는 걸 생각하면 그것이 있게 되리란 걸 안다. 물질/환경이 그의 생각 에너지를 중심으로 뭉쳐서, 그의 생각을 현실로 존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근원이 바로 자기 존재임을 안다.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들의 필요는 항상 충족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보수가 아닌, 그 일이 주는 기쁨에 집중한다.  
 
- 모든 공급/풍요의 근원으로서의 창조주 정신을 부정했을 때 얻는 결과는, 소유물의 부족이다. 참나와의 합일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완성을, 물질/이미지들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관점이다.
 
물질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참된 정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허약함을 물질의 부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들판/시냇가에서 시간은 위안/영감을 주지만, 물질은 그렇지 않다. 전자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지만, 후자는 우리의 혼을 요구한다.  
 
물건의 가치는,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에 있다. 연을 직접 만든 소년은 연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준 연을 받은 소년이라면 상실감에 슬퍼할 것이다. 그는 다시 연을 만들 능력이 없다. 앞의 소년은 주인이지만, 뒤의 소년은 노예다.
 
-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을 철저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인으로 여기는 사람은 현명하고, 자신을 창조주나인 잠나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니, 그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우리의 개성 자아를 공급자로 간주하면, 그것이 주는 공급 또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진흙 인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더 넓은 관점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존재 전체라는 참된 증여자를 보게 된다. 그 보편 근원이라는 무한한 창고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공기/물/몸..... 우리가 물/공기를 한 번 창조한 적 있는가?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밀이라는 신의 곡물을 가루로 바꾸고, 다시 빵으로 바꾼 것뿐이다.
 
모든 것을 신의 공급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월세도 신더러 지불하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집주인은 제때에 돈을 받는다. 하지만 이 신을 자기 외부의 존재로 여기는 한, 그건 그냥 희망사항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 어떤 공급도 줄 수 없다.
 
개성 자아가 아닌 참나를 근원으로 이해할 때, 공급의 문은 열린다. 그 방법은, 개성 자아를 통해 공급을 일구는 게 아니라, 그 요구를 신 나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구걸할 필요는 없다. ‘나’는 거지가 아니라,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뭔가를 얻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할 때는, 즉 마지못해 나눠줄 때는, 사랑/용기가 빠져 있다. 사랑의 억눌림은 공급의 억눌림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사랑을 주는 걸 힘들어한다. 사랑이 물질 형태---특히 화폐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는, 사랑을 나눠주는 게 고통스런 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될 때가 오면, 신음하고/괴로워한다.
 
 
- 우리는 가격을 흥정한다.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실력 좋은 흥정가들도 있다. 하지만 흥정은 사랑을 억누르면서 주는 것이다.
 
세계의 최빈국들 중에는, 흥정이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자리잡은 곳들이 많다고 한다. 흥정이란 곧, 자기 형제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않는 행위이고, 그래서 그것이 그들의 빈곤의 원인이 된 거라고 할 수 있다.
 
- 빚을 갚거나 세금을 내야 할 때, 수령자를 사랑스런 존재로 여길 수 있을까? 수령자는 언제나 사랑스럽다. 수령자란 바로 우리의 참나이기 때문이다. 참나가 어떤 형태의 수령자의 모습을 취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참나가 참나에게 주는 것이고, 존재 전체가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 아무리 이기적이고/굳은 마음들이라도, 그들 역시 신의 자녀들이고, 똑같이 사랑스러운 존재들임을 인정하자. 실수를 저지르고 있긴 하지만, 그들 또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면서 성장하고/배우고/일하는 인류이다. 따라서 그릇된 행동을 저지른다는 이유로, 그들을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로 가려낸다면, 그 결과는 또 다른 양극성의 불균형밖에 없다.
 
잊지 마라. 이곳은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유의지의 우주이다. 국민에게 착취적인 관료체제의 사람들 역시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사실을 잊고 자기 모래상자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지만,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지배하려는 갈망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나왔다. 그들은 아직 사랑이 국가의 원리임을 발견하지 못했고, 쌓아두는 것에 대단히 집착한다.
 
하지만 다가올 시대에는, 이들이 무척 겸손해질 것이고, 당황한 많은 영혼들은 그 전에 양심의 경고음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것이다.
 
- 이런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관료체제 스스로가 자신을 대단히 사랑스럽지 않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는 언제나 강요/공격으로 부족분을 메우게 마련이다. 이제야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게 되며, 주는 행위에서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아낌/비난 없이 주게 된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자비/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형제자매를 진심으로 보살피는 데서 오는 기쁨도, 영혼의 한없는 넉넉함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얻는 보상이라고 해봐야, 사리사욕이라는 찰나적이고/얄팍한 만족뿐이다.
 
- 흥정이라는 걸 살펴보자. 중고차를 매매의 경우, 구매자는 "최저 가격으로 최고의 차를 주시오”라거나 “1달러 가격으로 2달러어치를 주시오” 혹은 "낮은 가격으로 더 좋은 걸 주시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가능한 한 적은 사랑을 주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셈이다.
 
흥정이라는 사고방식에는, 더 적은 가치로 더 많은 가치를 얻겠다는 관념이, 즉 불균형이 들어 있다. 그것은 보상의 법칙에 어긋나며, 그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주지 않았던 소득분은 곧 자신의 상실분이 된다.
 
또 다른 예로, 공짜로 선물을 받을 경우, 선물의 가치는 ‘0’으로 평가되었으니, 보상의 법칙은 그에 맞춰 균형을 잡는다. 법칙은 선물의 가치를 ‘0’로 만든다. 자연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1천 가지도 넘게 있다.
 
방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법칙의 실행이 늦춰질 경우, 균형 잡혀야 할 가치에다 이자까지 보태진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법칙을 더 많이 알수록, 법칙을 위반했을 때 그 법칙의 실행은 더 일찍 이루어진다.
 
- 이 균형 법칙에는 어떤 처벌의 요소도 없다. 그냥 균형일 뿐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의 경우, 이 법칙의 실행은 대개 다음 3가지 중 하나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1. 그 선물을 잃거나/부수는 것.
2. 똑같은 만큼의 가치를 지닌 어떤 물품을 구입한 후, 그걸 잃거나/부수는 것.
3. (가장 발생 가능성이 높은데) ‘평가절하된 그 선물’의 ‘가치+이자’만큼 다른 거래에서 손해 보는 것.
 
- 우리가 구입한 물품은 우리가 부여한 가치를 갖는다. 옥신각신하면서 가격을 깎으면, 사실 그 물품의 가치를 낮추고 있는 것이다(반대로, 물건을 실제보다 더 비싼 가격에 산다 해도, 그 가격만큼의 가치를 갖는다). 물품은 우리에게 우리가 부여한 만큼의 가치만을 지닌다. 따라서 타인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물건은 결국 0의 가치를 갖게 된다.
 
- 중고차를 구입했는데 값을 화끈하게 깎았다고 해보자. 8천불이었는데 7천불에 산 것이다. 우린 8천불짜리를 7천불에 손에 넣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1천불의 값어치만큼 불균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과정은, 대개 차의 보증기간이 지난 다음에 온다. ‘1천불+이자’만큼의 수리비를 들여야 하는 것이다.
 
중고차 판매자가 차값이 깎이리라고 예상하고, 애초에 가격을 높게 매겼다고 하더라도, 법칙은 동일하다. 그렇게 해서 실제 가격보다 더 비싸게 차를 샀다면, 그 차액만큼의 기쁨/즐거움을 더 얻을 것이다.
 
- 이 법칙은 물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조건/상황에 부여한 가치는 도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반대로, 어떤 상황을 나쁘다고 평가하면, 필시 또 다른 나쁜 상황을 체험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균형잡아야 하는 자연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양극성을 균형잡아야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극성을 합치고 참나를 무한한 공급원으로 인정할 때만, 우리는 법칙(=업보)에서 벗어나 은총으로 살게 된다.
 
 
- 이번엔, 더 많이 팔고/나아지고/얻으려는 경쟁을 한 번 살펴보자. 작은 노점상이든, 정계/재계의 거물이든, 부족에 대한 두려움을 그 동기로 한다. 그가 거짓 자기의 제단에 놓는 대가는 바로 참나이기에, 경쟁 놀이에 지불하는 비용은 엄청나다.
 
참된 인식이라면, 경쟁 대신 협력을 선택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는 어떤 대가도 필요없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  더 많은 사랑을 줄수록 우리는 더 많이 받을 것이다. 모든 곳에 편재하는 보편에너지인 사랑은, 오직 나누는 것으로만 늘어날 수 있다. 이런 견해는 특히 돈 문제와 관련된 세상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반대다. 이 세상은 주는 것을 잃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내 존재 자체가 나를 유지한다’는 공급의 법칙이야말로 사실이다. 신은 오직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폐 역시 보편에너지인 사랑의 한 유통 형태일 뿐이다.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사랑은 어떤 형태든 다 취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런저런 형태를 취한 사랑이다. 우리의 공급은 사랑을 주는 우리 능력을 직접 반영한다. 그렇다면 ‘통화는 의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거짓 자기는 이것을 부/가난이라는 양극성으로 보는 쪽을 더 좋아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형제보다 더 큰 사랑 능력을 가졌다는 게 아니라, 우리 필요들은 언제나 완벽하게 충족된다는 뜻이다.
 
 
- 부자가 되는 것이 누군가의의 필요라면, 그 필요는 충족될 것이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체험이다. 반면에, 물질 소유에 반감을 느끼는 한 가난한 사람의 필요는, 화폐를 통해 충족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겐 부자가 되는 게 아닌, 다른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사랑은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따라서 부/가난 같은 용어들은, 형태가 아닌 내용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 ‘통화=의식’이라는 사실은 경제에서 확인된다. 침체된 경제는 물질에 반영된 그 국가의 의식임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의식이 두려움에 근거할 때, 그것은 억압된 의식상태로 응축될 것이고, 경제가 뒤이어 거기에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체/가족/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 풍요를 결정/예정하는 것은 우리 의식이니, 설사 이 행성의 부 전부를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더라도, 2년 이내에 부자는 다시 부자가, 빈자는 다시 빈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통화=의식’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의식을 비추는 화폐는,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다. 강제로 황폐해진 마음상태(사랑의 부족)는 자신의 이미지를 물질계에 투영한다. 화폐 형태의 사랑은 공급이 한정되어 있지만, 사랑 자체는 무한히 통화를 공급할 수 있다. 통화는 어떤 형태로든 다 나타날 수 있고, 화폐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즉, 사랑은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다.
 
한 유한 마담이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의 필요는 화폐 형태의 사랑이 아니라, 형태 없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면 그녀를 치유할 것이고, 그녀의 필요를 충족해줄 것이다. 한 빈자가 우울증에 빠졌다. 어떤 이는 그의 우울을 가난 탓으로 돌리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가난의 원인은 우울한 마음상태다. 어떤 종류의 부족이든, 그것은 언제나 사랑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남에 대한 사랑의 부족이 아니라, 언제나 참나에 대한 사랑의 부족이다. 자기 존재를 모든 것들의 공급원으로서 인정하기만 하면, 그 존재는 사랑이라는 보편에너지를 불러와서, 그것을 그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형태로 바꾼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불러온다’는 것이다. 사과나무가 그러하듯 힘들이지 않고 내변에서부터 ‘불러온다는’ 것.
 
 
- 다시 그 가난하고/우울한 사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에게 도움을 보낸다. 그는 자기 존재가 공급원임을 부정하므로, 자신의 근원을 끌어내어 자신에게 공급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료의 사랑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사랑은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 있고, 그래서 동료는 통화로 사랑을 준다. 즉, 동료의 사랑은 그가 필요로 하는 형태(=통화)로 자신을 바꾼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은 우울에서 밝음으로 바뀌고, 이제 그의 주머니 사정을 좋게 만드는 소소하지만/신기한 사건들이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이전에는 사랑이 없던 그곳에 사랑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의 마음을 열어, 그가 사랑의 근원인 자기 존재를 발견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예는, 사랑이 다른 것으로 바뀌는 능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통화는 마음/지갑 모두를 개선했다. 통화는 보편에너지인 사랑의 물질 형태에 지나지 않기에, 통화를 추구하는 건 사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 반면에, 소유 게임은 ‘줌으로써만 늘어날 수 있는 사랑’과는 정반대 결과를 만든다. 여기서도, 한 극성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반대 극성을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볼 수 있다.
 
‘사랑하지 않음’이란 ‘미움의 온건한 형태’이고, 그 역시 미움이긴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뭔가를 참된 인식으로 사랑하려면,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하고, 모든 것에 똑같은 존재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물론 좋고/싫은 선호를 가질 순 있지만, 그 때도 모든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맙소사, 어떻게 내가 이 경멸스럽고/어쩌고저쩌고한 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태도는 더 깊은 분리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이다. 이들을 사랑하는 건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 내 존재를 발견할 때, 나는 그들이 내 존재임을 발견할 것이다.
 
- 앉아 있는 그 의자가 바로 참나이다. 원자들을 붙들어두는 건 의식이니, 의식은 존재이고 참나이다. 의식이 원자들에서 떠난다면 의자는 해체될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런저런 형태의 사랑이다.  
 
우리의 자각 영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의식을 가질 뿐 아니라, 기실 그것들은 의식 자체이다. 우리가 밟고 걸어다니는 카펫이 바로 의식이다. 죽은 물질 같은 건 없다. 신은 존재 전체이거늘 어찌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 우리 존재는 사랑이다. 사랑이 공급할 수 없는 건 없다. 돈/배우자/동료/통찰력/용서..... 이런 게 충족되어야 할 우리의 필요라면, 형태야 어떻든 상관이 없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데 있어 어렵고/쉽고를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그 때 그 때 가장 적합하고/필요한 형태로 자신을 내어준다. 심지어 사랑은, 육신 자아가 어떤 필요를 깨닫기도 전에 그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 사랑을 모든 것들의 공급원으로,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확장되어야만 흐를 수 있다. 이것은 풍요의 핵심 열쇠이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풍요의 열쇠/법칙은, ‘사랑은 확장을 통해서만 불어난다’는 기본 원리이다. 사랑이 확장되지 않을 때는, 도로 움츠러든다.
 
- 내 존재를 내 형제와 나눠가지려면, 먼저 육신 너머에 있는 그의 참나/존재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그의 존재를 그의 근원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곧 나와 그가 같은 근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런 게 진짜 나눔이며, 그것은 반드시 가슴 속에서 먼저 태어나야 한다. 이제 누군가가 자신의 필요를 주장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걸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가 진짜로 요구하는 건 오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통화/사랑 형태가 어떤 것이든, 우리에게는 다 똑같다. 만약 그의 요구가 과도하다면, 우리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타이르듯 뭔가 얘기해줄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고 있고, 사랑으로 반응함으로써 그를 치유했고, 그와 교류했고, 그의 필요에 귀를 기울였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공격적이더라도 분노하지 않도록 하라.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그저 주면 되지만, 정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저 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랑으로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그의 가슴이 굳어 있더라도, 그가 원하는 통화 형태를 주라. 이것은 사랑이고, 지금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랑 형태이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사랑은 진짜로 그에게 필요한 도움으로 바뀐다. 이제 그 사랑은 굳어 있던 그의 가슴을 열기 시작하고, 그는 자기 존재가 근원임을 발견한다. 이렇게 사랑은 확장되었다. 둘 다 유복해졌다. 그의 존재에게 줄 수 있는 건 내 존재뿐이고, 둘은 사실 한 존재다. 사랑은 결국 자신에게 주는 것이고, 줌은 곧 받음이 된다.
 
- 사랑은 끌없이 늘어난다. 물건을 줄 때, 겉보기에는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물질 형태로 준 그 물건은, 우리가 그것과 같이 준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자신을 확장했고, 나중에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되돌아오며, 그 가치는 물건에 우리가 부여했던 가치보다 더 크게 된다.
 
따라서,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거짓 자기라면, 그 문제를 물질 차원에서 볼 것이고, 그걸 결국 법정으로 가져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인식이라면, 어떤 형태로 줬든 그 사랑은 반드시 더 커져서 돌아온다는 공급의 법칙을 알고 있으니 안심할 것이다. 어떤 사람/통로를 통해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 주의할 점이 있다. 만약 사랑이 되돌아오게끔 하려는 목적에서, 그 이익을 노리고 사랑을 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대가가 아닌 사랑 자체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안 그러면 그것은 흥정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만다.
 
-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지만,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가 친절/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면서, 그에게 돈을 건네줄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선물의 제공자는 개성 자아가 아니라 우리 존재/근원임을 인정한다면, 사랑을 가지고 주는 일은 기쁨이 된다. 사랑이란, 그의 존재이자 내 존재인 그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인간 하나하나가 신의 특별한 표현들이고, 그들의 존재 하나하나가 사랑의 근원이다.
 
내면의 신을 부정하는 건 흐름/공급을 가로막지만, 자신의 근원을 인정하는 건 (그가 자신을 자기 근원/존재/참나와 동일시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 흐름/공급을 터준다.
 
 
- 공급의 법칙의 2번째 핵심은, 뻗어감으로 커지는 사랑의 성질이다. 사랑이 사랑이려면, 뻗어가야 하며, 사랑의 정신으로 준다면 결국 그 양이 늘어난다. 모든 것이 다 사랑이니, 어떤 형태로 주는가는 상관없다. 그 내용은 언제나 사랑이다.
 
내 존재 자체가 나를 부양한다---이게 공급의 법칙이다. 이걸 우리 삶 속에서 이해/적용한다면, 어떤 종류의 부족도 없다.
 
참된 인식을 고정시키는 비결은, 참나에 대한 굳은 신뢰/믿음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화내고/비웃고/조롱할 테지만, 나중엔 자신의 잃어버린 보물이 여기에 있음을 느끼고 관심을 보일 것이다.
 
- 자신을 되찾는 사람에게는 권능이 주어질 것이다. 그가 대중의 경멸을 받는 이유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신의 게임 규칙을 부인하는 불일치를 몹시 싫어한다. 사회 자신도 게임 규칙이 지겹고/소모적이란 건 알지만, 내면의 영성을 부정하는 악습/역부족 때문에 그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순응의 문에 들어서고 나서도 여전히 위대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미지의 영토로 걸어들어가 새로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과감성/열정이다.
 
인간들은 신의 법칙에 맞서 자신의 법칙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타락일 뿐이었다.  
 
 
- 참나를 믿는 사람은, 신성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나름의 기준들을 설정하고, 참나라는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 신의 법칙에 따라 산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법이다.  
 
진리를 이해했다면, 이제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힘든 과제다.
 
 
- 급격한 속도로 영적 자각이 일어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자라는 식물처럼, 영혼도 때가 되어야 비로소 펼치고/뻗어나간다.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그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인데, 그런 행운은 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온갖 숫자놀음/생존의 세계에서 아주 편안하고/익숙했고, 그것을 우리의 현실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젠 정처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사회현실 속의 집을 떠나, 내면의 진짜 집을 발견할 때까지 걷게 될 이 코스는 낯설고/황량한 사막과도 같다. 하지만 깨어나는 영혼이라면 누구나 이 코스를 거쳐야 한다. 속세의 지배력에서는 벗어났지만, 자신의 참된 길을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는, 따라서 무척 취약한 시기이고,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아직도 사회의 산란함/공격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참나를 부정하는 마비상태 속으로 도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집이라는 은신처 안에서 자신에게 충실하기는 쉽다. 하지만 사회의 한가운데로 걸어나가 온갖 적들 앞에서라면 쉽지 않다.
 
 
- 내면의 영성에게 헌신하는 시간을, 날마다 따로 떼어둘 필요가 있다. 매일 규칙적으로 그런다면, 그것은 매우 건설적인 습관이 될 것이다. 고귀한 생각에 바치는 이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면서, 진실로 변하려는 갈망/자세로 그런다면, 이 시간의 이로움은 곧 일상의 나머지 시간들에까지 흘러갈 것이다.
 
분잡스런 마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밀실 속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라. 홀로 있기는 완전한 하나됨이고, 자연스런 존재상태로 돌아감이다. 나는 자연 속에서 자주 혼자 시간을 보내라고 권한다. 순수한 자연의 에너지는 신의 진동, 엄청난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
 
완전히 홀로 자신과 보내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이다.
 
 
- 진정한 기도의 비밀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그대 가슴 속 신성한 방들 속에서 기도하라.
 
-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공원을 걷거나, 시냇가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우리는 내면의 방에 홀로 있을 수 있다.
 
차크라를 활성화하는 기술들은 우리를 신에게로 데려가 주지 않지만,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갈망을 가지고 내면의 신을 찾는 것은, 확실하게 차크라를 활성화한다. 신을 향한 소망이 그 사람의 진동을 최대한으로 높여주기 때문이다.
 
정신/감정/신체 차원에서 내면을 정화하고자 할 때는, 진동하는 흰 빛의 물결이 정수리 차크라를 통해 우리 몸 속으로 들어와 우리 존재를 씻어내는 모습을 그려보면 도움된다.
 
- 이 고요의 시간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갖는다면, 우리는 폭력/혼란/분산/들뜸, 즉 부정성에서 벗어나는 리듬을 만들 수 있다. 그저 가슴 내면의 밀실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명상이다. 우리를 다시 단순하고/솔직하고/어린애답게 만들어주는 곳이며, 우리는 여기서 다시 근원과 접촉하고, 전지전능한 영성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존재의 의기양양함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이런 고요의 순간이다. 이제 가슴에 울려퍼지는 선명한 음조의 노래를 듣게 될 것이다. 귀가 듣지 않는 것을 듣고, 눈이 보지 않는 것을 보며,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기 시작한다. 감각의 왕국을 넘어서, 세속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성의 힘을 끌어낸다. 이 습관이 자리잡고 나면, 이 성스러운 시간을 가장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 이런 힘을 가지고 일상 영역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완전히 달라진다. 내면의 고요와 창조주와의 교류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를 집중하게 만들고, 그것은 내면 밀실의 중심부로부터 우리의 직장 생활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일단 이것이 자연스런 마음상태로 발전되면 혼자 있는가, 군중 속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물론 흔자 있는 쪽을 더 좋아하겠지만. 어쨌든 사회가 우리 정신에 미치는 오염은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다. 그리고 참된 인식의 원리들은 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연스런 이해가 된다.
 
- 이제 우리의 시야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이다. 진흙 인간의 눈이 아닌, 신인의 눈으로 본다. 우린 사회의 피상적인 가치들이 아닌 신에 투자하며, 그 결과 우리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초조하고/안달하는 것이 사라지고, 친구들 역시 사라지고/줄어들지만, 대신 오래 지속되는 친우 관계가 형성된다. 직장 생활의 지겨움은 순간의 스릴로 바뀐다.
 
여전히 이 세상의 잡다한 견해/소음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우리의 밀실/평화/기쁨, 깨달음의 고요한 저수지 한복판에 서 있게 된다. 그렇게 영적 태양인 신 나가 주는 빛/온기 속에 서 있을 때, 질병/혼란/부족은 떨어져나갈 것이다.
 
 
- 당연히 혼란의 순간이 올 것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럴 땐 그저, 내면의 밀실 속에 고요히 있으면서 “전지전능한 내 존재에게 명확성을 요구한다”고 말하라. 그러면 또렷한 시야가 되돌아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수시로 이유 없이, 경이로운 순간들에 듬뿍 취한다. 일몰/밤하늘/저능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파문을 풀어내어, 의지와는 무관하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것은 우리가 활짝 열려 있으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 고요의 이 순간에는 우리 마음이 참나와의 의식적인 교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처음에는 2~3분 정도만 하라. 하지만 규칙적이어야 한다. 얼마 지나고 나면 놀랍고/기쁘게도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혹시 우리 마음이 세속적인 주제들 사이에서 다시 이리저리 떠돌더라도, 억지로 다시 집중하게끔 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도록 부드럽게 다독이는 게 중요하다.
 
-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물결을 잠재워, 우리가 수면 아래를 꿰뚫어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때서야 영혼은, 무수히 많은 생애에 걸쳐 필사적으로 찾아왔던 것이 줄곧 자기 안에 있었고, 그게 참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때 영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마주한 상태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경외심으로 몸을 떨며, 한 영혼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말을 더듬거릴 것이다.
"나는 나다, 나는 나를 있게 한 바로 그 영성이다.
나는 존재 전체요, 인류요, 삶이며, 신 나다”
 
이제 그 영혼은 집에 왔다. 새로이 태어났기에, 평화롭고/자유롭다.
 
 
- 이제 우리는 예전보다 더 분별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자제/용서/선의가 함께 하는 분별력이다.
 
이것을 이루는 데 치열한 연습/금욕, 생소한 명상 기법 같은 게 필요하진 않다. 해야 할 것도, 이뤄져야 할 것도 없다.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진지한 가슴이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더 낫게 만들고/조절하고, 영적 등급을 높여줄 뭔가를 해야 하고, 아직 되지 못한 뭔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에 쫓긴다.
 
‘영적으로 된다’는 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표현이다. 이 표현 자체가 도리어 분리가 될 수 있다. 영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신이 존재 전체라면, 모든 게 영적이지 않은가?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역할 모델로 지니려는 그런 희망은, 다시 한 번 세상사고방식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 영적인 사람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아줌마/구두닦이/농부/사업가이다. 소박하고/친절한 마음들에게 축복 있기를. 그들은 진실로 이 땅의 소금이다.
 
조지 노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있다. 셀리는 그와 인삿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갑자기 세상이 안전하고/유쾌하고/평화롭고/친절한 곳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 그에게 얘기하려 하면, 그는 주제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는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올림푸스 산에서 신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 스스로 못났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적 깨어남은 정확히 그 반대여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정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자들은 오히려 그 대립물만을 이룰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을 조건 없이 사랑하며,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태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무관심하다. 당신이 어떤 상태이든, 신은 이미 당신을 받아들였다.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신의 표현이거늘.
 
- 신 나와의 합일에서 오는 존재의 뿌듯함을, 세속인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내면의 밀실인 참나에 중심을 둔 사람은 실체 속에서 살게 되니, 꾸민 세상인 자화상의 현실에서 벗어난다.
 
세상은 권력/인종/민족/교리/돈/외모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들은 자화상이란 걸 모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한다. 참된 인식 역시 그러하다. 그를 그 속의 참나와 동일시하지, 그의 역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왜 유명 인사는 그토록 존경/숭배 받을까?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것(부/명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몇몇 사람들이 물질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사고/토론의 대상을 옮길 때, 그들의 참나는 진리를 용솟음치게 하고, 그들은 그들 가슴 속의 앎의 풍성함에 놀라게 된다. 이제 지성은 우회로가 될 뿐이고, 그들은 가슴(=덕/영성이 거주하는 곳)을 통해 교류하게 된다.  
 
영혼의 지혜를 지닌 사람은, 외면적 소유가 아니라, 참나라는 영원한 부 속에 뿌리를 내린다. 그는 자신이 ‘영성/신’인 그 존재의 개별 표현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에, 잠자는 형제도 깨어 있는 형제도 똑같이 참나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가 그에게 영향받아 잠시 꿈틀대는 걸 느낀다.
 
- 내면의 신인 자신의 참나에 근거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변명하지도,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을 억누르지도 않는다. 그는 사회의 공허하고/천박한 요구/윤리에 순응하지 않으며, 사회가 그의 길에서 벗어나게끔 만들게 놔두지도 않는다. 선동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지만, 그 자신이 곧 도발 그 자체다. 붓다/공자/노자/루터 같은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반역자들이다. 그들은 형제들에 맞서 새로운 사고를 고취했기에, 사회의 분노를 사곤 했다.
 
- 참된 인식은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집 밀짚 위에서처럼, 귀족의 비단 보료 위에서도 편안하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이 참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가 숙녀든/농부든 관계없이, 그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존재다. 그에게는 만물이 참나이다. 그에게 만물은 다양한 모습을 한 신이다. 참된 인식은 자신에 의지하며, 사회가 제안하는 세상사고방식에 굴복하지 않는다.
 
반면에, 내면의 신이 깨어날수록 더 두려워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온갖 질병들을 공공연하게 경고하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결국 정착시킨다.  
 
 
- 진리가 확장되려면,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 이야기들 속의 진동/지혜를 주변 사람들은 얼마 안 가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으로 우리 주장을 증명해야 한다. ‘내 존재 자체가 나를 부양한다’는 말은, 누구도 내 삶에서 일말의 염려/불안을 감지하지 못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갈 것이다. 만약 내가 돈이나 다른 문제를 놓고 안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내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 어떤 종류의 부족이든 간에 그걸 체험했다면, 참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인식은 설사 굶주리는 아이일지라도, 보석으로 치장한 동료로 본다. 그 아이에게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 신의 특정한 표현이 풍요로워 보이지 않더라도, 참된 인식은 그 역시 똑같이 풍요로운 존재임을 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체험에서 지혜의 진주를 얻어내고, 그것이야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부이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참나가 될 때, 우주는 온갖 차원의 풍요로 이 부에 공명한다. 참나에 의지하는 사람은 ‘나’의 반영물들을 한껏 즐긴다. 세상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진다 해도, 그는 그 태풍 속에서 평온할 것이다. 자신에게 청할 것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받고야 만다.
 
 
- ‘내 존재 자체가 나를 부양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외부 상황/조건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는 자유를 얻는다. 이것은 우리를 삶의 주인으로 만들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 존재 전체이자 신이라는 우리의 유일한 부를 차지하게 한다. 자연은 언제나 아낌없고/넉넉하며, 모든 것을 넘치게 생산한다.
 
삶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걸 즐긴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선물도 줄 수 없는 법이다. 신 나를 승인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의 초석이다. 그럴 때 신의 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 속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낸다.
 
당신이 받아들이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것은 2배 3배 계속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눠라. 그러면 그것은 더 커져서 돌아올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의 본성이다. 당신은 자신을 주는 것이니, 그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 짓밟힌 자들에게는 참된 희망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길을 보여줘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웃는 법을 가르쳐주고, 희생자들에게는 행복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해 줘라. 불친절/무자비하다고 비난하지 말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라.
 
당신의 적들을 사면하지 말고, 용서로 받아들여라. 굳어진 가슴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풀어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영성의 존엄성을 들려주어라.
 
무엇보다도 당신의 형제자매들에게,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라. 그들 자신의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신 나의 상태로 있어라.  
 
당신의 모든 지금을 결정하고. 미래를 설계하지 마라.
 
그리고 부탁하건대, 제발 당신 자신에게 친절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 강함이기 때문이다. 웃음/춤으로 삶을 축하하라. 이것은 신의 의지이다. 환호하고, 산꼭대기에서 노래 부르라. 당신이 영원할 것임을 알고, 이 앎 속에서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라. 당신 자신을 찬미하라. 그것이 곧 신을 칭송하는 것이니.
 
- 우리가 함께 한 이 여행의 목적지는 당신의 참나이다. 삶은 영원히 계속되는 무한한 모험이기에, 이 여행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 ‘존재하는 유일한 부‘인 신에게 가슴을 연 우리는, 틀림없이 축복받을 것이다.
 
 
 
 
 
- 에필로그 -
 
 
- 1961년에 과학자들은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둘러싸고 있는 광자띠를 발견했다.  
 
- 우리 태양은 25,860년을 순환 주기로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돈다. 이 광자띠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00년이다. 다시 말해, 우리 태양계가 이 영역을 떠난 디음에 다시 광자띠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500년이라는 이야기다.
 
- 1962년에 우리는 이 광자띠의 영향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 계산상으로 우리가 실제로 광자띠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략 2011년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주가 최고 팽창점에 이르는 때와 관련된다.  
 
- 광자띠의 에너지는 물질적이 아니라 에테르적/영적인 성격을 갖지만, 물질과 상호 작용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 2,000년에 달하는 빛의 기간들 사이에 있는 10,500년 어둠의 시간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영적 진화를 되풀이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성숙한 영혼들을 성령의 빛 속으로 모아들이고, 이제 막 성숙해가는 더 약한 영혼들에게는 안정된 유예 기간을 주어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 그리고 10,500년의 육화 기간동안에도 성스러운 사랑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인정하지 못하거나/안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 사실 절박한 상황/재난에 관한 예언들은, 인간이 사랑의 에너지로 정돈하고 두려움을 놓아버린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은 아니다. 지진을 일으키는 것은 지구가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쪽은 두려움에 마비된 인류다.  
 
두려워하는 한, 인류는 언제라도 조종당하고/노예화될 수 있는 존재다.
 
- 빛으로의 전환이 비록 지구에서 실행되고 있지만, 지구와 관련된 과정일뿐 아니라, 우주적 과정임을 이해해야 한다. 지구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키려는, 우주 곳곳에서 온 빛/어둠 세력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두려움의 지배하에 묶어두려는 온갖 종류의 조작에 우리가 계속 노출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회색인들Greys로 알려진 이 세력들이 주요 정부들/금융기관들과 협력하여 일한다는 사실은, 지금에 이르러 거의 상식이 되고 있다.  
 
- 회색인들과 그 하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빛의 가족Family of Light이다. 그들은 사실 애초부터 지구에서 진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행성의 고중량/고밀도의 진동에 충분히 익숙해질 만큼 지구에서의 많은 육화 과정을 통해 토착화된 세력이다. 이들은 두려움의 가면을 폭로하여 인류가 깨어나도록 돕고,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있게 한 영성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대전환 전에 많은 무리를 이루어 지구로 왔다. 이들은 거대한 빛의 세력의 반을 대표한다.
 
나머지 반이 사랑의 가족Family of Love이다. 이들도 이미 지구에 있지만, 상당수는 아직 어린애로 있다.
 
- 빛의 세력은 우리를 교육하는 반면, 사랑의 세력은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사건들에 영향/변화를 줄 수 있다. 빛의 세력은 이미 회색인들의 집단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 회색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빛의 세력들이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움직이기 시작할 거대한 교육의 물결이다. 두려움을 거둘 때 인류는 영성의 빛 속으로 끌려갈 것이며, 두려움의 계율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자기 영혼의 목적을 향한 전진을 늦추고 있으니, 그들을 동정하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마라. 악은 사랑의 빛 속에서 영성을 마주하면, 움츠리고 자신을 먹어간다. 그들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짧게밖에 존속되지 않을 것이다. 빠른 속도로 끝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형상/신분에 관계없이 그들 역시 똑같은 신의 자녀들이다. 이 세력들에게 주는 우리의 선물은 판단/비난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용서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잘못 생각하는 영혼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려면, 그들의 분리 상태를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다. 환상의 게임을 즐기는 유아 단계의 영혼들은, 신의 빛 속에서 무력하다.
 
 
- 부정적인 사건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다. 물질주의에 너무 깊이 빠져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힘든 수천의 영혼들을 이 행성에서 끌어올리는 온갖 지진/홍수 따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과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복수/공격/증오/두려움/억압/탐욕/용서못함의 옛 사고방식을 놓아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빛의 시대에는 있을 자리를 갖지 못해 물러나게 될 것이다.
 
 
- 전환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지구의 자전축은 똑바로 서겠지만, 자기극들의 양극/음극은 서로 뒤바뀔 것이다.
 
마나직 방사는 아원자 차원에서 작용하여, 모든 원자들이 자신의 오라 영역을 눈에 보이게 방사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지구 전체의 생체 영역이 빛을 낼 것이고, 인간의 신체도 자기 오라의 광휘로 빛날 것 이다. 모든 것이 영성의 빛이 뿜어내는 광휘로 적셔질 것이기에, 바깥이든/안이든 지구 전체에 어두운 곳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림자조차도 없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인간/동식물/광물)이 자신의 오라 영역 속에서 빛날 것이다. 그 광휘가 너무 강하고/찬란하기 때문에,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은 이제 과거의 광경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밤/낮의 이원성도 없을 것이고, 분리 전체가 끝날 것이다. 빛/어둠, 천국/지상의 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참된 나는 완전함으로 들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상 처음으로 여기에 있게 될 것이고,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시간 자체가 존재하기를 그만둘 것이니, 나이를 먹는 게 불가능해진다. 질병은 과거의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이승을 떠난 영혼이 지상에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전환을 체험하는 잔류 인류도 자신의 역사를 잊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탄생을 뜻하는 다음 차원으로 성장한다.
 
우리가 3차원에서 4차원으로, 물질에서 에테르 영역으로 옮아갈 것이라고 여러 번 표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물질에 대한 자각을 잃는다는 건 아니다. 우리 몸체는 더 저중량/저밀도로 될 것이고,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형체로 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된다.
 
3차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4차원을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4차원의 존재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3차원의 현실을 방문할 수 있다. 또 좀 더 순수하고/필수적인 물질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겠지만, 직접 에테르로 신체를 부양/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물질의 조작/창조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설 것이고, 영성과의 균형을 이룬 과학이 꽃필 것이다. 기술은 크게 진보한다. 자력장/크리스털 기술 덕분에, 지금의 제트기 따위는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다. 영적으로 크게 발달하여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
 
 
-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변화는, 끔찍할 정도로 제한되었던 우리의 자각이 신 의식과 하나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황금 시대, 신의 시대다. 그것을 표현할 다른 용어는 없다.
 
 
- 다가올 전환은 비밀 사항이 아니고, 그것이 가져다줄 선물은 커다란 고양/기쁨이지만, 준비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충격을 줄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사랑/빛 속으로 들어가는 우주의 재탄생이며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외계 존재들의 방문은 전환 이전부터 이미 시작될 것이다. 이들을 직접 만나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아마 적임자인지를 테스트받게 될 것이다.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생물을 차별/부정하는지 안 하는지. 만약 그들의 마음 속에서, 삶의 신성에서 배제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어떻게 비인간적 외모를 한 존재들에서 평온을 느끼고 그들을 동등하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타 종교/인종의 사람들과 빵을 나눌 수 없다면, 어떻게 외계 종족과 저녁을 먹을 수 있겠는가?
 
 
- 우리는 마나직 혹은 황금방사를, 우주 탄생만큼이나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질 의식확장을 위한 발사력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창조 시대에서 태어나는 것, 즉 영적 재탄생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뉴에이지/초월의식 같은 용어들도 바로 이 전환을 의미할 뿐이다.
 
지구/태양 중 어느 쪽이 먼저 광자띠에 진입하는가에 따라, 어둠의 날들과 빛의 날들을 경험하는 순서가 달라진다. 이 과정은 마지막으로 미적거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바꾸어,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일종의 협박용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때, 두려움을 내려놓고 빛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거부하는 영혼들은 긴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나중에 또 가질 것이다.
 
- 과거에도 새 문명이 시작될 때마다, 그것은 이전 문명의 자취에조차 기댈 수 없었다. 새 문명은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했다. 10,500년에 달하는 어둠의 주기가 끝나고/시작될 때마다, 지구의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정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문명 등이 전혀 자취를 안 남긴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전달된 메시지들은 얘기한다. 지금의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높은 지적 이해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번 전환을 앞두고는 그런 지구적 변화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 깨어남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21세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10년 동안, 전례 없을 정도로 많은 빛의 세력들이 떠오르는 것이 목격될 것이다. 이 때 지구의 모습은 마치 학교 같다. 한 쪽은 시험을 통과하고, 다른 한 쪽은 낙제하여 학기를 반복하는 학교.
 
 
- 그렇다면 25,000년간의 빛의 시대가 끝난 후, 인류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구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비약을 이룬 인류가 다시 그것에 적응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일직선 방식으로 사고하는 우리는 지구를 단 하나뿐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지구는 여러 개가 있다. 동그라미가 아니라 나선형을 그려본다면, 우리는 그 나선 위의 특정 지점에 존재하는 다른 지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다차원이다. 그 지구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다른 시간 연속체에 위치한다. 즉, 밀도가 다른 지구이다. 다가올 전환은, 그 나선 위의 다음 번 지구 현실 속으로 우리를 옮겨다준다.
 
4차원 인류에게는 다른 고귀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여러 믿을 만한 자료들에 따르면, 우리는 별들로 가게 된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긴 하지만, 나는 이것이 논란을 불러올 수 있으며 이 자료의 목적을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4차원으로의 전환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3차원 지구에 남게 된다. 3차원 지구는 나름의 변화들을 겪을 것이다. 나선 위의 어떤 단계에서나 진화 방향은 위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성장을 피할 순 없다.
 
 
- 1987년, 백색 형제단은 지구 둘레에 특별한 에너지띠를 둘렀다. 이 에너지의 목적은 감정들을 증폭/가속화시키는 것이다. 덕분에 억압자들이 더 억압적으로 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더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자들이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보고 있다. 즉, 의식의 균열(분리)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은 선택을 북돋우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빛의 진동에 맞춰진 것만이 빛 속으로 움직일 수 있고. 두려움과 함께 하는 것은 그럴 수 없으므로. 이 책의 목적 역시, 참된 인식의 도움을 받아 우리 자신을 빛의 진동에 맞추도록 돕는 데 있다.
 
에너지도 음식물처럼 소화/흡수된다. 이 때 흡수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는 부정적 에너지는, 마치 폐기물과 흡사해서, 배출되고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한다. 안 그럴 경우, 마치 독극물처럼 우주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구는 우주의 진화 과정에서, 그 폐기 에너지들을 자신의 고밀도 물질 속에 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에너지가 지구에서는 무해할 수 있었고, 서서히 해방/변형되면서 위대한 창조 순환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 지구의 영혼들은 변환 과정을 배우고 싶어서 지구에서의 환생을 선택했다.
 
그 변환 과정 동안, 지구는 천사들조차 밟기 두려워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그게 바로 지구가 얻은 진화의 부산물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기억/정체성을 잃을 위험이 있었고, 우리는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이 행성에서 한 번이라도 환생했던 영혼들은 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정적 에너지는 더 이상 지구를 통로로 삼지 않는다. 이제 지구는 본격적인 진화의 궤도로 들어갔기에, 이 희생적인 과제는 우리 태양계 바깥의 다른 한 행성에게 넘어갔다. 이제 지구에서 고통/괴로움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
 
- 지구와 지구의 에너지에 자신을 맞춘 모든 영혼들은, 우주에서 전례 없던 대규모의 사건을 준비해 가고 있다. 영성과의 재합일, 별빛/물질의 혼인, 사랑의 포옹/행위, 우주적이고/영적인 오르가즘..... 온 우주의 형제들이 이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지구로 몰려들고 있다.
 
지구의 시작을 제외하면, 이것은 지구를 축복하는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지구의 자녀로서, 우리는 분리라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 내면서 지구의 청소부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위대한 창조의 신비 속으로 들어갔기에, 이제 언제나 지구의 본질을 가슴 속에 지닐 것이다. 지구와 우리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영겁의 세월 이후로, 지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는 인류를 도와, 부정적 에너지들을 빨아들였다.
 
이제는 지구의 자녀들이 같은 일을 하는 걸 배울 차례다. 이제 지구는 여신으로, 사랑을 내뿜는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 지구는 자신에게 맞추는 아이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모험에 함께 나설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창조의 새 날이 사랑의 길을 선택할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때까지 잠들어 있어야 한다.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그 모든 존재들을 가진 우주 전체가 이 굉장한 축하 잔치, 빛으로의 재탄생이라는 신의 춤에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지구와, 지구의 자녀로서의 우리가, 마침내 영혼의 태고적 갈망을 이뤄내게 되었으니.
 
 
우리는 집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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