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흘러 가는 시간속에서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있었다. 신체장애를 겪은 사람의 책제목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불만족스럽다. 이를 ‘과거불만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을 가능하면 삼간다. 심지어 7080콘서트에 나오는 노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사람이 지나간 과거에 살면 늙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는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라고 했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 될 순 없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숲 어딘가에 떨어지면 재사용되지 않는다. 인생은 화살과도 같은 것이다. 숲 어딘가에 떨어졌을 때 다시 사용될 확률은 거의 없다. 일부러 찾아 가지 않는 한 재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늙음이 그렇다.
늙은이는 버려진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도 같다. 한번 활시위를 떠나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늙은 자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옛날을 회상하는 것밖에 없다. 아마 영광스러운 일보다는 후회와 회환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은 아마도 “내가 십년만 더 젊다면.”라는 말이다.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을 보면 은연중에 부러워한다. 만약에 젊은시절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약 십년전으로 되돌아 간다면 그는 정말 인생을 알차게 잘 살 수 있을까?
지금 이 모양이라면 십년전이라고 해도 크게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십년만 더 젊었다면.”이라는 말은 크게 의미가 없다. 십년전으로 되돌려 놓아도 맨 그 모양일 테니까.
지금 여기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누군가 ‘늙음타령’하며 옛날을 애도한다는 것은 잘못 살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치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을 때
나의 십년전 모습은 어땠을까? 다행스럽게도 기록을 남겨 놓았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한 의무적 글쓰기가 무르익어 간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 밖에 없었다.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시대구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이 그날 같은 사람에게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없다. 어느 해에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이를 잘살았다고 해야 할까 못살았다고 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면 ‘허송세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생을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무언가 남기는 삶을 살았을 때 잘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잘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잘 산 것이다. 더 잘 산 것은 자손을 남긴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을 때 잘 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자손을 보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가장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형편없는 사람도 자손을 남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경멸조로 “새끼 깐다.”라고 말한다.
언젠가 장학퀴즈를 본 적이 있다. 흑백TV시절이다. 사회자가 어느 학생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려고 합니까?”라며 물었다. 학생은 “저는 기필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학생은 아마 틀림없이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보통사람에게 있어서 자손을 남기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을 한 것이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짝을 찾는다.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잘 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물적 삶에서 인간적 삶으로
누구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부모가 되는 일은 동물들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하여 새끼를 낳는다. 인간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사유한다.
뒤돌아서 보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설령 자손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감각적으로만 살았다면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아도 정신적으로 공허하다면 빈곤한 삶이 된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공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Vin.I.230라고 말씀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오로지 감각적 즐거움만을 위해서 산다면 역시 동물적 삶이나 다름 없다. 동물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다. 사유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난다.
부처님은 공자들에게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그렇다고 “나는 누구인가?”라며 궁극적 실재로서 나를 찾으려 한다면 평생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를 알려면 초기불교를 접해야 한다. 초기불교를 접하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동물적 삶에서 인간적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십년전에도 의무적 글쓰기를 했다. 매일매일 오전일과는 글쓰기로 보냈다. 이번에 십년전인 2010년 상반기 글을 하나로 모았다. 책을 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출판사에 의뢰하여 책을 내는 것은 아니다. 문구점에 인쇄와 제본의뢰하여 보관용으로 두 권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 정리한 글은 아비담마에 대한 것이 많다. 초기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2009년이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2010년에 쓴 글이다. 크게 일상적인 글과 담마에 대한 글 두 종류가 있는데 이번에 정리한 것은 담마에 대한 것이다. 아비담마논장과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십년전의 글은 오류가 없을까? 아마 오류가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라면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이 인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문화유산에 의존해야 한다.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인식의 지평은 넓어진다. 마치 숨겨진 보물창고를 접하는 것과 같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 있다. “그 오랜 옛날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며 감탄사가 절러 나온다.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류의 축적된 정신문화유산은 물질문명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이천오백년전에 이미 완성된 정신문명을 따라잡을 수 없다. 설령 에이아이(AI)시대가 되어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누구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이미 우리 곁에 있음에도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마치 인터넷시대에 바로 옆에 훌륭한 블로그가 오래 전부터 있었음에도 지금 발견하는 것과 같다. 빠알리삼장은 마치 외장하드와 같다. 외장하드에 접속하면 마치 대양과도 같이 그 넓이를 알 수 없고, 마치 심연과도 같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거침없이 흘러 가는 시간속에서
십년전 글을 빠른 속도로 스캔해 보았다. 자신이 쓴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다. 삶의 흔적이다.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거침없이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시간을 붙들어 매 둔 것 같다. 이럴 때 와 닿는 게송이 있다.
“벗이여,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
부처님의 제자 싸밋디가 말한 것이다. 바라문성직자로 변신한 악마는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십시오.”(S1.20)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답한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자 한다. 그래서 영원히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글 만한 것이 없다. 감각적 즐거움은 시간과 함께 지나가버리고 말지만, 한번 써 놓은 글은 남아 있다. 시간을 붙들어 매 두는 것과 같다. 마치 부처님의 담마가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듯이, 한번 써 놓은 글은 시간을 초월한다. 아니 시공간을 초월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인터넷시대에 있어서 검색만 하면 십년전에 써 놓은 글도 소환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세월을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다. 누군가 “십년전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쓸 것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십년전의 글을 소환하여 이제 한권의 책으로 내고자 한다. 보통불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는 ‘이 다음에 커서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더욱 값진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일생일대에 있어서 빠알리삼장을 접한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다. 설령 늦은 나이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음 생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접한 빠알리삼장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
2020-08-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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