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황령산산지기 2020. 9. 6. 11:17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불교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이것 외 다른 것은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탐욕과 분노와 미혹으로 살 때, 수행자들은 불탐과 부진과 무치의 삶을 살아 간다.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수행자들은 흐름을 거슬러 산다. 마치 연어가 산란기가 되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역류의 삶을 사는 것은 상처투성이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역류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역류의 삶은 눈물로 뒤범된 상처투성이의 삶이 되기 쉽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쪽 길을 갈 때 전혀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이렇게 역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라고 한다.

 

부처님은 역류도를 설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면 역류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초기경전 어디를 열어 보아도 역류도의 삶에 대한 것이다. 궁극적 목적지는 해탈과 열반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아파트건설현장을 보면 먼저 기초공사부터 한다. 땅을 파서 지하주차장 등 지하시설을 먼저 만든다. 모든 기초공사가 완료되면 그 다음 부터는 한층, 한층 쌓아 나간다. 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피시비아트워크(PCB Artwork)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객으로부터 회로도면을 이메일로 받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부품작업이다. 부품을 만드는 것이다. 부품을 만들어 캐드(CAD) 라이브러리에 저장하여 꺼내 쓰는 것이다.

 

피시비아트워크 할 때 부품작업을 하는 것은 기초공사를 하는 것과 같다. 이후 부품배치작업과 배선설계작업을 한다. 대략 대여섯단계를 거쳐서 작품이 완성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습니다.”(A8.1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돈오돈수는 없다는 말과 같다. 있다면 돈오점수가 있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사향사과와 열반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홉 가지 출세간의 법을 얻어야 한다. 이는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사향사과는 성자의 단계를 말한다. 차례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말한다. 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와 과의 단계에서도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다함에서도 사다함의 도와 과의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단계를 거칠 때 마다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수다원의 도와 과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다시 말해서 그는 실로 나는 이 길로 달려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2) 그 다음에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3)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찰하고, 4)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 5) 마지막으로 나는 진리를 대상으로서 꿰뚫었다.”라고 불사의 열반을 성찰한다.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인 흐름에 든 님에게는 다섯 가지 성찰이 있다.”(Vism.22.20)

 

 

흐름에 든 님은 예류자로서 수다원을 말한다.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룬 순간에 대하여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클라이막스는 다섯 번째 나는 진리를 대상으로서 꿰뚫었다.”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체험을 말한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우다나에 이런 게송이 있다.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Ud.66)

 

 

수수께끼 같은 게송이다.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도와 과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구절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Ahu pubbe tadā nāhu)”는 어떤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거룩한 길과 관련된 앎이 일어나기 전에 일체의 탐욕 등의 오염원이 나에게 존재했는데, 그러나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에 그 오염의 무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조금이라도 오염이 남아 있다면, 최상의 길에서 버려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UdA.337)라고 했다.

 

두번째 구절을 보면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nāhu pubbe tadā ahu)”라고 했다. 이는 이 나의 무수한 죄악의 여읨은 지금 수행을 통해서 닦여져 원만하게 되었지만,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 이전에는 없었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최상의 길에 대한 앎이 생겨나자, 그 모든 나의 죄악의 여읨은 완성되었다. 최상의 길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의 모든 것을 아는 덕성이 깨달은 님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UdA.337)라고 했다.

 

세번째 구절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Na cāhu na ca bhavissati)”은 어떤 뜻일까? 이는 죄악을 여의는 고귀한 길이 나의 보리수 아래에서 생겨났다. 그것을 통해 모든 오염원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길은 길에 들어서는 순간의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고귀한 길을 통해서 내가 버려야하는 오염들이 없어졌으므로, 그 오염들처럼 길도 없어지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UdA.337)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na cetarahi vijjatī)”에 대한 뜻풀이이다. 이는 지금 현재에 있지 않다. , 내가 행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인식되지 않는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UdA.337)라고 했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게송에서 가장 마지막 구절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가 핵심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될 때마다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네 가지 길에 대한 앎()과 봄()’이라 하여, “이들 흐름에 드는 길, 한번 돌아 오는 님, 돌아 오지 않는 님, 거룩한 길이라는 네 가지 길에 대한 앎을 앎과 봄의 청정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청정도론 22장에 대하여 앎과 봄의 청정(知見淸淨: ñāadassanavisuddhiniddesa)’이라고 한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예류도 지견청정, 일래도 지견청정, 불환도 지견청정, 아라한도 지견청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각 깨달음의 단계마다 열반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반체험 없이는 수다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다원이 된 자는 열반을 체험하고 난 다음 실로 나는 이 길로 달려왔다.”라며 반조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며 자신이 수다원과를 얻게 된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며 소멸된 번뇌를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열반체험을 하여 지극히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스스로 알게 된다. 남아 있는 번뇌는 어떤 것일까?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에서 오하분결 두 가지와 오상분결 다섯 가지이다. 이와 같은 번뇌는 세 가지 길, 즉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의 도를 통해서 제거된다. 수다원이 되면 세 가지 단계를 통해서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서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수다원도에서 열반 체험을 하게 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게 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 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완전한 열반의 길로 향해 가는 것이다. 다시는 범부중생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아무리 못 잡아도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의 길에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면 남은 생은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을 하게 된다.

 

수다원을 견도라고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을 수행도라고 한다. 아라한을 무학도라고 한다. 수다원도의 단계에서 열반이라는 궁극의 체험을 하고 나면 남은 생은 오로지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길어야 일곱 생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완성이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한번 수다원도를 이루면 두 번 수다원도에 이르지 않음을 말한다. 거듭해서 수다원도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수다원도를 이루면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원도는 단 한번만 있게 된다. 그러나 수다원과는 제한받지 않는다. 수다원과는 수다원도의 결과로서 나온 것이다.

 

수다원이 되어서 열반을 무수하게 체험해도 수도원도는 한번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다함도 한번 뿐이고, 아나함도도 한번뿐이고, 아라한도도 한번 뿐이다. 그래서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

 

마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이루면 과를 맺는다. 그런데 도는 이루기 어렵지만 과는 도가 이루어지는 순간 즉각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라따나경’(Sn2.1)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Stn.226)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도를 이루면 과는 즉각적으로 따른다. 도를 이루면 과는 즉각적인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원도를 이루면 즉각 수다원과가 따른다. 그런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수다원도에 이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실천의 경’(A4.161)이 있다. 경에 따르면, 네 가지 실천에 대하여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이 있다.”(A4.16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네 가지 실천을 보면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빠른 것도 있고 더딘 것도 있다. 그러나 과보로서 나타나는 결과는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도를 이루는 순간 과가 따라옴을 말한다. 그래서 수다원도를 이루면 곧바로 수다원과가 따르는데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번뇌를 부수기 위해 더디지만 즉각적인 것을 얻는다.”(Vism.22.15)라고 했다.

 

각 단계마다 깨달음은 한번뿐

 

한번 수다원도에 이르면 계속 수다원이 된다. 거듭해서 수다원도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거듭해서 수다원이 된다면 이는 수다원도에 이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한번 사다함이면 계속 사다함이고, 한번 아나함이면 계속 아나함이고, 한번 아라한이면 계속 아라한이다.

 

깨달음은 한번 뿐이다. 각 단계마다 한번 깨달았으면 되었지 거듭해서 깨닫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 게송에서는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Ud.66)라고 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UdA.337)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Sn3.11)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수행자로서 높고 낮은

여러 가지 길에 대해서 나는 말했습니다.

거듭 피안에 이르지 못하지만

생각건대 단번에 이르지도 못합니다.”(Stn.714)

 

 

게송에서 거듭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한길을 통해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Prj.II.497-498)라고 했다. 수다원도는 오로지 한번만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보로서 나타나는 수다원과는 여러 번 있게 될 것이다.

 

후송을 보면 생각건대 단번에 이르지도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그 피안에 단번에 도달할 수가 없다.”(Prj.II.497-498)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를 거쳐서 피안에 도달함을 말한다.

 

바로 옆에 보물창고 있음에도

 

불교인으로서 삶을 살고 있다. 매일 경전적 글쓰기를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경전을 접하면 놀라운 것으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한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마치 보물창고에 온 것 같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가를 삼보라고 한다. 세 가지에 대하여 보물 또는 보배, 보석이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보석 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라따나경에 따르면,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Stn.224)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은 어떤 보석일까? 이에 대하여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Stn.225)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승가는 어떤 보석일까? 이에 대하여 깨달은 님들 가운데 뛰어난 님께서 찬양한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이니, 그 삼매와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Stn.226)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삼보예찬을 보면 부처님과 가르침안에 보물이 있다고 했다. 특히 법보와 승보에서는 공통적으로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르침은 보물창고임을 말한다.

 

보물창고를 매일 접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보물창고가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접하지 않는다. 바로 옆에 보물창고 있음에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인류문화유산을 넘어설 수 없다. 초기경전은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이다. 지혜의 보물창고와 같다.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보물창고를 여는 것과 같다. 동시에 지혜의 지평도 넓어진다.

 

 

2020-09-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