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아! 머지않아 이 몸은

황령산산지기 2020. 9. 12. 17:49

! 머지않아 이 몸은

 

 

우린 이제 어쪄죠?” “나도 모르겠소.”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대사이다. 지바고는 라라를 만나 하루 밤을 보낸다. 러시아 벌판 늑대가 울어대는 눈내리는 농장에서 추운 밤을 함께 보낸 것이다.

 

흔히 내로남불이라고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행위는 좋게 말하면 로맨스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륜이다.

 

일은 벌어졌다. 남자옆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는 여자는 우린 이제 어쪄죠?”라고 말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남자는 나도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최근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보았다. 무인도를 빠져 나온 주인공에게 미래 어떤 일이 전개될까? 전 직원이 주인공에게 이제 어떻게 하실거죠?”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주인공은 나도 모르겠어.”라고 답했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다. 대략 어떻게 전개되리라고 예상은 해 보지만 다만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기대수명 같은 것이다. 지금 나이로 계산해 보아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 보지만 그때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현재 나의 삶은 불확실하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의 명상(maraassati)’을 보면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예경지송, 723)라고 명상하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어머니?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누구도 나의 수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섯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의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8.29)라고 했다.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 이와 같은 다섯 가지는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업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익었을 때 과보로 나타난다.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행운에 웃고 불운에 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괴로운 자는 한시바삐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난다마따는 사리뿟따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여, 바로 저에게는 난다라고 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이 그를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끌고 가서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존자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았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어머니를 보는 것 같다. 자식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경에서 네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난다마따는 살면서 정신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또 의도적으로 계율을 어긴 적도 없었다. 더구나 네 번째 선정에 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저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있는데, 저는 그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제 안에서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A7.53)라고 말했다.

 

난다마따는 불환자였다. 재가의 여성수행자로서 삶을 산 것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 오하분결을 끊어 버린 성자인 것이다.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 욕망, 분노를 끊어 버렸기 때문에 외동아들이 잡혀가고 폭행당하고 죽임을 당해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난다마따에게 외동아들은 나의 아들이 아니었다. 나의 아들이었다면 이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들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아들은 나의 것이 되어서 괴로워하고 슬퍼할 것이다.

 

유신견이 타파된 성자에게 아들은 더 이상 나의 것은 아니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아들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존자는 난다마따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난다마따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대는 일어난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A7.53)라고 말했다.

 

부처님 당시에도 숫따니빠따가

 

난다마따는 아나함의 단계였다. 재가불자로서 최상의 단계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출가해야 한다.

 

재가신자로서 유일하게 아라한이 된 케이스는 야사가 처음이다. 야사는 출가하기 전에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된 재가신자와 백 안거를 보내며 마음이 해탈된 수행승 사이에는 해탈자와 해탈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S55.5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밀린다팡하에 따르면 재가신도는 출가한 날 거룩한 경지를 얻거나 죽을 때에 거룩한 경지를 얻는다.”(Mil.264-266)고 했다.

 

난다마따는 재가의 불환자로서 피안의 길(Pārāyana)’을 읽고 있었다. 숫따니빠따 제5품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숫따니빠따는 널리 읽혀 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5품 피안으로 가는 길이 널리 암송되어 있었던 것 같다. 숫따니빠따가 가장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이는그런데 그때 재가의 여신도인 벨루깐다끼야 난다마따가 날이 밝자 일어나 피안으로 가는 길을 암송하고 있었다.”(A7.53)라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죽는 것이 대수냐?”

 

흔히 하는 말 중에 죽는 것이 대수냐?”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소리하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 약해지거나 비굴해지지 말라는 뜻도 있다. 과연 누가 죽음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죽는 것은 대수가 아니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Anacchariya kho paneta, ānanda, ya manussabhūto kāla kareyya)”(S55.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난다여,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죽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번역했다. 빠알리 원문에 태어난 자는 보이지 않는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나의 삶은 어떻게 전개 될지 알 수 없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움으로 맞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선업을 지은 사람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산 사람들이라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으면 선처에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것이 대수냐?”라는 뜻과 유사하게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섯 가지 정신적 재물이 있는 한

 

죽음은 기본적으로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했어도 죽는 순간 사띠를 놓친다면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마하나마는 만약 이때 내가 죽는다면 나의 운명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S55.21)라며 생각했다.

 

늘 사띠하고 있어야 한다.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사띠를 놓쳤을 때 갑자기 죽음이 찾아 온다면 어떻게 될까? 이와 같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에게 악한 죽음이나 악한 임종은 없을 것입니다.”(S55.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법문으로 안심시켰다.

 

 

마하나마여, 예를 들어 사람이 버터가 든 단지나 기름이 든 단지를 깊은 호수에 집어 넣어 깨뜨리면, 그 단지의 파편이나 조각은 가라앉을지라도 그 버터나 기름은 상승하여 승화됩니다. 마하나마여,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부모에게서 태어나 음식으로 부양되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찢겨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마음을 닦고, 계행으로 마음을 닦고, 배움으로 마음을 닦고, 보시로 마음을 닦고, 지혜로 마음을 닦았다면, 이 몸을 까마귀들이 삼키고, 독수리들이 삼키고, 매들이 삼키고, 개들이 삼키고, 승냥이들이 삼키고, 여러 가지 종류의 야생동물들이 삼킨다고 해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닦여지고, 계행으로 닦여지고, 배움으로 닦여지고, 보시로 닦여지고, 지혜로 닦여진 마음은 승화됩니다.”(S55.21)

 

 

부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다섯 가지, 즉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의 세월을 보냈다면 이 공덕의 힘으로 악처에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평생 모은 재물은 가져 갈 수 없어도 정신적 재물은 가져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만든 공덕과 죄악, 바로 이 두 가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 다니네.”(S3.4)라고 했다.

 

! 머지않아 이 몸은

 

죽으면 몸은 버려진다고 했다. 생명이 기능이 끝난 몸은 동물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 독수리, , 승냥이 들이 먹을 것이라고 했다.

 

몸이 동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가져 가는 것은 공덕이기 때문이다.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라는 다섯 가지 정신적 재물이 있는 한 안심이다. 그래서 추모경송품에 죽음에 대한 명상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니라.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하느니라.

 

! 머지않아 이 몸은

!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니라.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723-7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