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어떻게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인가?

황령산산지기 2020. 8. 29. 13:34

어떻게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인가?

 

 

저 세상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내세와 윤회를 믿는 불자로서 저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세상은 기대수명 연령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밤일 수도 있다. 아니 한시간 후일 수도 있다. 한시가 급한 것이다.

 

일주일전 이사를 했다. 집 없이 산지 이십년 만에 비교적 작은 평수인 스물 세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집없이 산지 이십년만이다. 이를 작은법회모임 동기카톡방에 올렸더니 어느 법우님이 부자되세요.”라고 했다. 이에 감사합니다. 정신적 부자 되려고 합니다.”라고 답글을 달았다.

 

부자가 되면 불행해지기 쉽다

 

누구나 물질적 부자가 되려고 한다.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부동산투기 하는 것이다. 경매 물건을 잡아서 은행대출을 받는 식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방식이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갭투자 등 갖가지 방식이 동원된다.

 

부자가 되면 불행해지기 쉽다. 왜 그런가?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세상에 막대한 재화를 획득하고서 거기에 취하고 방일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고 뭇삶에게 죄를 짓는 사람은 많습니다.”(S3.6)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와 비례하여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질 위험성이 매우 높다. 재벌 이세나 삼세가 마약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정한 방법으로 불로소득의 성을 쌓았을 때 재난이 되기 쉽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재난이다.

 

예산에 있어서 한정이 없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기 쉽다. 감각적 쾌락을 즐긴다면 이는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탐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탐욕, 성냄, 미혹을 삼독이라고 한다. 오로지 즐기는 삶으로 일관했을 때 이는 탐욕의 삶이 된다. 일생동안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을 즐겼다면 그 인생만큼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저 세상 갈 때 고스란히 안고 가는 것이다.

 

정신적 부자가 되고자

 

정신적 부자가 되고자 한다. 언제 갈지 모르는 저 세상에 갈 때 가져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질적 재산은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정신적 재산은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정신적 재산과 관련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버려야 할 때

무엇이 진실로 자기의 것인가?

그는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를 따라 다닐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만든

공덕과 죄악, 바로 이 두 가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 다닌다네.

 

그러므로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서

미래를 위해 쌓아야 하리.

공덕이야말로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S3.4)

 

 

 

상윳따니까야 사랑스런 이의 경(piyasutta)’(S3.4)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공덕이 저 세상에서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공덕을 가져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착하고 건전한 행위(kusala)’를 말한다. 십선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는 다름 아닌 정신적 재산이다. 정신적 재산은 저 세상에도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다.

 

업이 작용하는 원리대로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이 없으면 저 세상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한 저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 세상에 갈 때는 행위(kamma: )만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겼다면 그 불로소득을 가져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불법과 탈법, 편법 등의 행위를 가져 가는 것이다. 또 불로소득으로 감각적 쾌락을 누렸다면 탐욕의 행위를 가져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선업은 몸에 붙어 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서 떼려야 뗄 수 없다. 저 세상에 갔을 때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재생될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대로 세상에 태어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이 작용하는 원리대로’ 라는 말을 사용했다. 부처님은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A5.145)라고 말씀했다. 업의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남을 말한다.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겼다면 이는 넓은 의미에서 도둑질에 해당된다. 업은 엄중하게 작용되기 때문에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재생될 것이다.

 

한평생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이는 탐욕으로 산 것이다. 이는 ,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나의 것이면 정말 좋겠다.”(A10.211)라고 다른 사람의 부와 재산에 탐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탐착에 대하여 그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10.211)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탐착하니, ‘,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나의 것이면 정말 좋겠다.’라고 다른 사람의 부와 재산을 탐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다니고, 언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다니고, 정신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다닌다. 그의 신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언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정신적 굽어 있고, 그의 운명도 굽어 있고, 그의 다시 태어남도 굽어 있다.”(A10.216)

 

 

세 가지 굽은 것이 있다고 한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굽은 것을 말한다. 이는 불선업을 말한다. 탐착하는 것도 불선업에 해당된다. 다른 사람의 것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내기만 해도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불선업을 짓는 사람은 특징이 있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몰래몰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뱀처럼 몰래 기어다닌다고 했다. 이렇게 탐하기만 해도 불선업이 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수행승들이여, 그의 운명이 굽어 있고 다시 태어남이 굽어 있는 자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의 운명, 즉 오로지 괴로움 뿐인 지옥이나 몰래 기어다니는 종류의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A10.216)라고 했다. 업이 작용하는 원리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아무리 나의 안전에 주의를 해도 아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어떤 죄악을 저지를지 모른다.

 

어떤 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화를 참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더 큰일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논리라면 욕망이 생기면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즐기는 삶이다.

 

사람들은 맛 있는 음식을 찾아서 맛집순례를 한다. 갖가지 고급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을 갖는다. 이는 욕망을 충족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불선업의 원인이 된다.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욕망대로 살면 불선업을 짓게 된다.

 

사람들은 즐기는 삶이 불선업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감각에 충실하는 삶,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탐욕으로 사는 삶은 불선업이 된다. 탐욕의 마음을 내는 것이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이나 모두 동일한 불선업의 과보를 받는다. 업이 작용하는 대로 저 세상에 가는 것이다.

 

업이 작용하는 대로 저 세상에 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굽은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도 굽은 것이라고 했다. 지옥이나 축생, 두 가지 운명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수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인가?

 

오로지 자기자신만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수호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럴 경우 외부의 힘을 빌어야 한다. 문화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문화는 마치 외장하드와 같은 것이다. 자신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인류의 축적된 지혜가 집약된 것이 문화이다. 이런 문화를 접하면 전쟁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악처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전을 접하면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라는 문화, 불교라는 외장하드와 접속하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했다. 먼저 어떤 사람들이라도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에게 자기자신은 수호되지 않습니다.”(S3.5)라고 했다.

 

오계를 어기면 자기자신이 수호되지 않는다. 처벌을 받아야 하고 저 세상에 갈 때 굽은 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구의 삼업이 악업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에게 수호는 밖에 있으며 그들에게 수호는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S3.5)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한 수호는 밖에 있지 않다. 나의 대한 수호는 나의 안에 있다. 어떻게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했다.

 

 

신체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고

언어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고

정신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니,

모든 면에 자제하는 것은 훌륭하네.

어디서든 자제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는

진실로 수호된 사람이라 일컬어지네.”(S3.5)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하는 것에 대하여 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아닌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계를 지키면 자신이 수호된다. 동시에 남도 수호된다.

 

보물창고와 같은 가르침을 접하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 (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Thag.303)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제하는 것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제하지 않는 다면 자신을 수호하지 않는 것이 되어서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진실로 수호된 사람은 자제할 줄도 알고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실로 잘 수호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눈을 수호하는 것도 훌륭하고

훌륭하다. 귀를 수호하는 것도,

코를 수호하는 것도 훌륭하고

훌륭하다. 혀를 수호하는 것도.”(Dhp.360)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도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된다. 눈을 수호한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고 그 대상에 매혹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대상을 혐오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도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대상에 미혹되지 않는다.”(DhpA.IV.85)고 했다. 이를 눈이라는 감관의 문의 수호, 제어, 다스림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귀, , , 감촉, 의식에도 해당된다.

 

수호나 불수호는 즉각 일어나지 않는다. 아비담마 인식과정 17단계에 따르면, 스호와 불수호는 속행(javana)때 일어난다고 했다. 이는 순간적 앎을 말한다. 그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 예를 들어 불신, 불인, 나태, 방일, 무지와 같은 불선법이 찰나적으로 파지될 때 감관은 수호되지 못한다. 그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 예를 들어 믿음, 정진, 인내, 새김, 지혜와 같은 선법이 찰나적으로 파지될 때 감관은 수호된다.

 

자신을 수호하려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마치 보물창고와 같은 가르침을 접하면 자신을 수호할 수 있다. 자신의 인식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인식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문화에 접해야 한다. 문화는 인류의 축적된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살아 가는 방법이 있다. 안전하게 생존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인류의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다. 마치 인터넷에 접속하면 갖가지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처럼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 가는 삶의 방법이 있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안전하게 자신을 수호하는 방법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재산을 축적해야

 

세상사람들은 한평생 재물 모으기에 올인한다. 그러나 남아 있지 않다. 일과의 대부분을 돈 버는 일에 바치지만 통장은 항상 텅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 설령 재산이 축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저 세상에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재산은 자신을 수호해주지 않는다. 이럴 경우 정신적 재산을 축적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A7.7)을 말한다.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을 칠성재(七聖財)라고 한다. 칠성재가 있으면 자신을 수호할 수 있다. 칠성재가 있으면 여섯 가지 감각의 문도 수호된다. 칠성재가 있으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제할 수 있어서 자신이 수호된다. 그래서 일체를 수호하는 수행승은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Dhp.361)고 했다.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된다.

 

한때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런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세간에서의 삶은 다름 아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삶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정신적 부자가 되어야 한다.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지면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정신적 부자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저 세상에도 가져갈 수 있다. 오늘 카톡에서 부자되세요.”라는 법우님의 말에 정신적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답한 것은 자만일까?

 

 

2020-08-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