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황령산산지기 2020. 7. 26. 04:47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천수경에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라는 말이 있다. 도량이 청정해야 우리의 몸도 마음도 깨끗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했을 때 삼보청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가 될 것이다. 불법승 삼보와 천룡이 이땅에 내려오실 것이라는 말이다.

 

도량은 청정해야

 

도량(道場)은 불도를 닦는 곳을 말한다. 또 사원의 법당에서 이루어지는 법회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도량은 절을 뜻하기도 하고, 법당을 뜻하기도 하고, 또한 법회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량은 청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삼보가 온다고 했다.

 

만일 도량이 청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삼보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다나에 따르면 포살일에 부처님이 아난다여,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Ud.51)라고 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대중이 청정하지 않았을 때 포살법회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천수경에서 도량청정무하예 삼보천룡강차지는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모티브로 삼은 것인지 모른다. 똑 같은 내용이 율장소품 의무계율송출의 다발’(Vin.II.236)과 앙굿따라니까 포살의 경’(A8.20)에서도 보인다.

 

부처님은 세 번이나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을 발견했다. 그리고서는 퇴장하라고 했다. 이에 불응하자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그러자 존자 마하 목갈라나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내고 빗장을 잠그고 세존께서 계신곳으로 갔다.” (Ud.51, Vin.II.236, A8.20)라고 했다. 청정하지 못한 자를 강제로 추방한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서 부처님은 법을 설했다. 여덟 가지 바다의 비유를 들어 담마와 위나야의 여덟 가지 공덕을 설한 것이다.

 

도량은 청정해야 한다. 법당뿐만아니라 모든 수행처는 청정해야 한다. 한사람이라도 청정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도량은 구린내가 날 것이다. 왜 그런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아주 소량만 있어도 똥은 악취를 풍긴다.(A1.348) 라고 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7월 두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날이다. 평소보다 한시간 일찍 도착했다. 세 가지 때문이다. 처음 오기로 한 유법우님과 6시에 서고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가장 크다. 그 다음은 수행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은 청소에 대한 것이다.

 

오후 6시에 서고에 도착하니 청소가 진행중에 있었다. 자발적인 것이다. 지난 5월 모임이 재개되면서 처음 청소를 했다. 이전에는 단지 사용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늘 시간에 쫓겨서 오고가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무려 3개월만에 모임이 재개되었을 때 무언가 하나는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서고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한번 하고 나면 두 번 세 번은 쉽다. 서고 청소도 그렇다. 누군가 일찍 오는 사람은 쓸고 닦는다.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이 깨끗하면 자신도 기분 좋고 타인도 기분 좋을 것이다.

 

집에서 청소해 놓으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다. 도량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법당을 청소하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런 기분은 꽤 오래 갈 것이다.

 

모임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찍 온 사람은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 한다. 예경지송을 책상에 놓는다든가 차를 준비하는 일 등을 말한다. 여기에 청소까지 더해져서 도량이 청정해지는 것 같았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모든 것은 자발적이다. 누가 시키지 않은 것이다. 전재성회장은 한번도 청소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도량을 깨끗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의 법당또는 나의 서고라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마치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는 것과 같다. 이는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M128, Vin.I.352)라는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여기 쓰레기가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식이었다. 쓰레기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치우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라면 화합의 모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탁발에서 먼저 돌아온 사람이 자리를 깔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준비했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음식을 먹고 난 다음 치웠다.

 

부처님 제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거나 음식을 치우는데 있어서 지시를 하거나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M128, Vin.I.352)라고 했다.

 

말을 할 때는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말을 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M128, Vin.I.352)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화합의 모임을 넘어서 정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가

 

724일 두번째 금요모임에서 서고를 대대적으로 청소했다. 이렇게 크게 청소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서고 2층을 수행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모임에서 수행이야기가 나온 것이 발단이었다. 한시간 일찍 와서 수행하자고 제안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금요니까야강독모임 홍보 포스터에서 명기되기에 이르렀다. 금요모임이 있는 날 오후 5시 반부터 6시 반까지는 수행시간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강독모임이 단지 듣는 모임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단지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수행시간을 별도로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큰 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세 가지 모임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모임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최상의 모임, 불화합의 모임, 화합의 모임이다.”라고 말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각종 모임이 있다. 모임은 모여야 열리는 것이다. 모이지 않으면 모임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모임이 있다. 이를 불화합의 모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임은 기본적으로 화합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승가를 화합승이라 하는 것도 화합의 모임임을 말한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줍기식이라면 화합의 모임이라 할 것이다.

 

화합의 모임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화합의 모임에 정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최상의 모임이 되려면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 한다.(A3.93)

 

 

이 가르침을 보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승보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에서 승보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한글삼귀의문에서는 스님들을 승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승가공동체를 승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스님들을 승보로 본다면 화합의 모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스님들이 모여서 화합하며 사는 것이 연상된다. 그러나 승가공동체에서는 자자와 포살이 있다. 이런 점이 단순히 스님들 모임인 것과 승가공동체인것과 다른 것이다.

 

승가공동체는 스님들의 커뮤니티를 말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커뮤니티는 자연스럽게 정진의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하게 되어 있다. 경에서 있는 것처럼 정진의 모임이 되면 본받고자하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셋이서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정진의 모임에서는 잘하는 사람을 모두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라고 했다.

 

서고 2층을 수행공간으로

 

7월 두번째 모임부터 수행을 하기로 함에 따라 앉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서고 2층에 있는 수행공간을 먼저 청소해야 했다. 수행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한번도 수행공간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수행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나 바닥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소를 먼저 하기로 했다.

 

모두 5명이 청소에 참여했다. 한사람은 서고 책정리를 했다. 한사람은 주방을 정리했다. 두 명은 송판으로 되어 있는 바닥을 쓸고 닦았다. 또 한명은 아래층 바닥을 쓸었다. 이렇게 거의 사오십분 청소했다.

 

어느 정도 도량이 깨끗해지자 앉아 있고자 했다. 청소 때문에 길게 앉지 못했다. 십분가량 잠시 앉았다. 도량을 청정하게 한 다음 앉아 있으니 몸과 마음도 청정해지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강독모임에까지 연결되었다.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미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미인은 상대적이다. 인간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도 천상에 가면 암원숭이같다고 했다.

 

미인은 액면으로 따지기 보다는 내면으로 따져야 한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의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명상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명상하는 사람이다. 명상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다 아름답다. 그리고 거룩해 보인다. 왜 그럴까? 욕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욕계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했을 때 더 이상 욕계의 존재가 아니다. 색계천상의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색계존재는 성이 없다. 남성과 여성이 없어서 무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성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성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예로 들 수 있다.

 

관세음보살 이미지는 중성이다. 얼굴모습은 여성인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콧수염을 그려 놓은 것으로 보아 남성같기도 하다. 수월관음도를 보면 관세음보살은 천상의 존재를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천상의 존재는 한번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정해진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그랬을 것이다. 성자라고 말해지는 사람도 한번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이는 천상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욕계천상이 아닌 색계 이상, 즉 범천의 이미지인 것이다.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넘어서 숭고해 보인다. 아름다움과 숭고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고귀함 또는 성스러움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경외와 외경도 일어날 것이다.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다움 이상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명상이 정착될 수 있을까? 도량을 청정하게 한 다음 명상으로 이어졌을 때 정진의 모임이 될 것이다.

 

 

2020-07-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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