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지혜와 자애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것

황령산산지기 2020. 7. 18. 10:31

색계선정에 들면 색계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몸은 욕계에 있지만 정신은 색계에 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경’(A4.190)에서는 하늘사람으로 지내는(devappattā viharanti)’ 수행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승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회장은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이 된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느님으로서 지내는 수행승이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우고,..”(A4.190)

 

 

사무량심 중에서 자애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연민, 기쁨, 평정도 위의 정형문에 단어만 바꾸어 넣으면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아함경의 범천(梵天)’을 그대로 사용했다.

 

브리흐마는 ‘the Creator’의 의미이다. 우리말로 창조주이다.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의 최고신이었다. 이와 같은 브라흐마에 대한 묘사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 1번 경에 하느님에 대한 묘사가 있다. 경에 따르면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39)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 유일신교와 똑같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누구나 자애수행을 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의 경’(A7.66)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때 스승인 쑤넷따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내가 미래에 제자의 무리들과 전혀 동일한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더 높은 자애를 닦아보는 것이 어떨까?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쑤넷따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다.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동안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A7.66)

 

 

경에 따르면 7년동안 자애수행을 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쑤넷따는 인간으로 있을 때 7년 동안 자애수행을 하여 하느님이 되었다. 하느님이 되어서 7겁동안 살았다. 이에 대하여 거기서 그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였다.”(A7.66)라고 했다.

 

불교에서 하느님이 되려면 자애를 닦아야 한다. 이는 유일신교의 구약에서 분노하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 하느님은 자애로 가득한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되려면 자애수행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주 끝까지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운다.”(A4.190)라고 했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분노의 하느님이지만 불교에서 하느님은 자애의 하느님이다. 누구나 자애수행을 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도 윤회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미얀마에서는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자애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숫따니빠따 자애경(Sn1.8))에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끝날 때 마지막으로 합송하는 멧따숫따를 말한다. 핵심은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7)라는 구절이다. 우리말로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라고 번역된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애의 마음이다.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할까? 자애경에서는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바쳐 구하듯” (Stn.149)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자식은 소중하다. 나의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낼 때는 나의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라고 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 대하듯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냈을 때 하느님이 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자애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하면 악몽을 꾸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자애수행 하는 방법은 청정도론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 총23개의 장에서 제9장은 하느님의 삶(brahmavihāraniddesa)’에 대한 것이다. 사무량심에 대한 것으로 주로 자애수행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청정도론 한 개의 장에서 자애수행하는 방법이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누구나 청정도론을 보면 자애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전재성회장은 자애수행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무한히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주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삼계 모든 중생이 자애의 마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2017년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처음 열렸을 때 소라고동의 비유로 설명했다. 그때 당시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에 대하여 소라고동 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2017-02-11)라는 글을 남겼다.

 

소라고동소리와 자애의 마음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부처님은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라고 말씀했다.

 

전쟁영화에서 소라고동을 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라고동은 적은 노력으로도 소리가 크게 멀리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소라고동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비유했다.

 

이른 새벽 골방에서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에게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소라고동처럼 멀리 퍼져 나갈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스승에게, 친구에게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역시 멀리 퍼져 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애의 마음을 무한대로 확장하라고 했다. 우주 끝까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애의 마음을 우주 끝까지 실어 보낼 수 있을까?

 

전재성회장은 언젠가 금요강독모임에서 무너짐을 관하라고 했다. 우주가 무너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길을 걸어가면서 조차도 무너져 간다.”라고 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철저하게 무상을 관찰했을 자애의 마음이 나옵니다.”(깨달음과 기연(機緣), 바구존자의 문지방깨달음, 2017.05-02)라고 했다. 그러면서 틈새 이야기를 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틈새가 있다고 했다.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틈새로 자애의 마음이 스며 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틈새와 관련하여 최근 빤냐완따 스님의 시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가장 예리한 지혜의 바늘 하나가 그 틈에 꽂히는 순간, 온갖 감정이나 감각의 구속으로부터 일순 자유로워진다. 기쁨과 슬픔, 정신적 고뇌, 육체적 고통에 동요하지 않는 그 어떤 현상도 들뜨지 않는 평온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빤냐완따 스님, 발바닥에 핀 연꽃 28)

 

 

빤냐완따 스님은 틈새를 공략하라고 했다. 이는 형성된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라는 대전제에 따른 것이다. 커다란 둑도 미세한 구멍이 나면 무너진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에 틈이 있다. 그 틈을 공략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형성된 것은 반드시 물질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 슬픔 등 정신적 형성도 있는 것이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무너져 내리는 것에는 틈이 있다. 그 작은 틈에 지혜의 바늘 하나를 꼽자는 곳이 빤냐완따 스님의 시이다. 그런데 2017년 전재성 회장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틈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자는 것이다. 그것도 우주 끝까지 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무상을 관찰했을 자애의 마음이 나온다고 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애라고 했다. 무상, , 무아에 기반한 자애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혜와 자애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것이다.

 

 

2020-07-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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