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다면 남의 삶도

황령산산지기 2020. 7. 26. 04:51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다면 남의 삶도

 

 

시장은 왜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평소 시장을 잘 알던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뚱한다. 에스엔에스에서는 그럴 분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심지어 음모론까지 이야기한다.

 

일은 벌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최악의 선택은 죽음이다. 사람이 죽었다. 죽은 자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혹하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억울함을 밝혀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의혹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죽었다. 누군가는 죽는 것이 대수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고 했다.

 

미투의 끝은 어디일까?

 

미투의 끝은 어디일까? 급기야 시선강간에 이르렀다. 쳐다보는 것도 문제 삼는 것이다. 느끼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도 일종의 폭력일 것이다. 더구나 음흉한 눈으로 5초 이상 뚫어질듯이 바라보았을 때 매우 불쾌할 것이다.

 

단지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대개 한번 보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한번 더 보는 경우도 있다. 매혹적인 대상이거나 특이한 대상일 때 한번 더 쳐다 본다. 그렇다고 5초 이상 계속 쳐다본다면 매우 불쾌할 것이다.

 

음흉하게 느끼한 눈으로 유심히 계속 쳐다보는 것도 폭력이다. 그러나 처벌로 이어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다만 쳐다 본 사람을 폭행했거나 말로 위협했다면 처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의도는 있지만 신체적 또는 언어적 행위가 뒤따라야만 처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정신적 행위도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로 성이 구분되어 있는 한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간의 본능에 대한 문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욕계 중생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성이 나누어져 있어서 이성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에 따르면, 여자에게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남자에게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을 때그러자 여자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다.”(D27.12)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달아 올라 성적인 교섭을 했다.”라고 했다.

 

남자와 여자로 성이 구분되어 있는 한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욕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색계에서와 같이 성이 없는 중성의 존재이면 모를까 양성이 있는 한 성과 관련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극복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미투로 인하여 고통받는 여성들이 있다. 남성들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성추행, 성폭행을 했을 때 이는 폭력적 행위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폭력은 팔정도에서 불상해에 어긋나는 행위에 해당된다.

 

팔정도에 정사유가 있다. 정사유에 대한 것을 보면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S45.8)라고 했다. 여기서 폭력을 여읜 사유(avihisāsakappa)’가 있는데 이를 무해사유(無害思惟)라고 한다.

 

무해사유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무해사유는 정사유에 해당되므로 혜학의 일부가 된다.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는 혜학에 해당된다. 따라서 폭력을 여읜 사유는 지혜로운 것이 된다.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 왜 지혜에 해당될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좌악을 얻어 나쁜 곳에 떨어진다.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

왕 또한 무거운 벌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범하지 말지니.”(Dhp.310)

 

 

법구경 인연담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아내와의 일을 즐긴 자가 있었다. 발각되면 크게 처벌받을 줄 알면서도 남의 아내 범하는 행위를 일삼은 것이다. 이렇게 남의 아내를 범하면 쾌락이 있는 것일까? 게송에 따르면 쾌락 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고 했다. 어떤 두려움인가? 주석에 따르면, 1)죄악을 얻고, 2)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3)비난을 받고, 4)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럼에도 남의 아내를 범했을 때 쾌락이 있을까?

 

남의 아내를 범한 자는 두려움에 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려움에서 얻는 쾌락은 적다는 것이다. 더구나 두려워하는 여자로부터 얻는 쾌락은 적다고 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라고 했다. 이는 남자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여자로부터 얻은 쾌락은 적다.”(DhpA.III.482)라는 뜻이다. 남자도 두려워하고, 여자도 두려워 하고 둘 다 두려워 했을 때 어떤 쾌락이 있을까?

 

두려움을 아는 지혜

 

오늘날 미투가 이슈가 되고 있다. 남의 아내임에도, 남의 처자임에도 성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했을 때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딸 같은 여인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더욱 더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에 알려 졌을 때 더욱 더 두려워할 것이다. 더구나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으로 알려졌을 때 그 비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을 아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앙굿따라니까야 태어남의 경’(A4.121)에 따르면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1) 자신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2)타인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3)처벌에 대한 두려움, 4) 악도에 대한 두려움”(A4.121)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자신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일까? 이는 내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그러한 행위를 계행의 관점에서 어찌 스스로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A4.121) 라며 성찰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타인의 비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면 처벌받는다. 이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한다. 채찍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곤장으로 때리고, 손을 자르기도 하는 등 무려 26가지 처벌이 경에 언급되어 있다. 최종 처벌은 갖가지 형벌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미래 악한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A4.121) 라고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무해사유는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다면 남의 삶도

 

폭력을 행사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자도 두려워하고 폭력을 당하는 자도 두려워 할 것이다. 남자가 위력으로 성추행이나 성폭행 했을 때 남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고 여자는 두려움으로 떨게 된다. 서로 두려운 마음이 되었을 때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다.

 

자신의 비난, 타인의 비난, 처벌에 대한 두려움, 악도에 대한 두려움이 범벅이 되어서 쾌락을 추구해 보지만 고통이 더 클 것이다. 더구나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여인을 보았을 때 쾌락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Dhp.129)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폭력으로 죽음으로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무서워 하는 것은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다면 남의 삶도 사랑스런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지 않다면 남의 삶도 사랑스럽지 않게 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은 남도 사랑스럽게 생각한다. 반면에 자신을 하찮게 보는 사람은 남도 하찮게 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듯이 남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본다면

 

부처님의 무해 또는 불상해에 대한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법구경에서는 살생을 여읜 성자들은”(Dhp.225) 라든가, “불살생과 제어를 갖추고”(Dhp.261) 라든가, “모든 생명의 해침을 여의면”(Dhp.270)라고 했다. 여기서 불살생이라는 말은 폭력을 여읜다는 말과 같다. 빠알리어로는 아힘사(ahisā)라고 한다. 영어로는 ‘non-hurting’의 뜻이다.

 

부처님은 폭력을 여읜 사유가 지혜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는 정사유가 혜학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 했다. 지혜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가 있는 곳에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불살생 또는 불상해를 뜻하는 아힘사를 말했을 때는 이는 사무량심의 계발과 관련이 있다. 특히 연민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폭력을 여의는 것을 현상으로 삼는다.”(Vism.9.94)라고 했다. 그래서 연민은 폭력이 가라앉힐 때 성취된다고 했다.

 

폭력을 행사했을 때 두려움에 떠는 자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게송에서는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라고 했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사랑스럽다면 남의 삶도 사랑스러울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본다면 폭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2020-07-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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