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황령산산지기 2020. 7. 18. 10:40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살다 보면 삐끗할 때가 있다. 잠시 한눈 팔거나 잠시 살피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

아니 사고가 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사고가 호시탐탐 노리다가 헛점을 발견하고 들어오는 것 같다.

 

삐끗했을 때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옥외 주차장에 주차하고 내려 가다 미끄러져서 넘어진 것이다. 삐끗한 것이다.

비가 와서 신발에 물기가 있었던 것 같다.

미끌하면서 뒤로 넘어졌는데 팔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났다.

좀더 천천히 걸었더라면, 좀더 살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작업을 하다가 실수했다. 도면 수정작업을 하다가 고정홀 부위가 이동된 것이다.

제작에 들어간 다음 발견했다. 다시 해야 했다. 실수는 손실로 이어진다.

좀더 천천히 했더라면, 좀더 살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작은 것이다.

더 큰 것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아쉬움과 후회로 인하여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전쟁 같은 삶이다. 왜 전쟁 같은가? 마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총알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른다.

옆에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 생과 사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과 사는 알 수 없다. 오늘 무사하다고 하여 내일 살아 있다는 보장이 없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곳이 전쟁터이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평정수행에 대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평정수행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정수행에 대하여 합송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느님으로서 지내는 수행승이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평정의 마음으로 동쪽방향을 가득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남쪽방향을 가득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서쪽방향을 가득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북쪽방향을 가득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정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하느님으로서 지내는 수행승이 된다.”(A4.190)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의 경지가 된다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자애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평정의 하느님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빠알리어 브라흐마를 번역한 말이다. 한역으로는 범천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순수한 우리말인 하느님이라고 번역했다.

 

누구나 자애, 연민, 기쁨, 평정수행을 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 끝까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쪽 방향으로 가득채우고 라고 말했다.

동서남북사유상하 우주 끝까지 한량없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내야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사무량심 핵심을 요약하면

 

어떻게 해야 자애, 연민, 평정, 기쁨, 평정의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 되어 있다.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애에 마음에 대해서는 마치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보고 자애를 일으키듯,

이와 같이 뭇삶에 대해 자애를 가득 채운다.”(Vibh.272, Vism9.9)라고 했다.

 

연민의 마음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역경에 처한 불우한 사람을 보고 연민하듯,

이와 같이 일체의 뭇삶에 대하여 연민을 가득 채운다.”(Vibh.273, Vism9.78)라고 했다.

 

기쁨의 마음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사랑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 기뻐하듯,

이와 같이 일체의 뭇삶에 대하여 기쁨을 가득 채운다.”(Vibh.274, Vism9.85)라고 했다.

 

기쁨의 마음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사람을 보고 평정하듯,

이와 같은 일체의 뭇삶에 대해 평정을 가득 채운다.”(Vibh.275, Vism9.88)라고 했다.

 

 

사무량심은 기본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가득 채우는 것은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이룰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면 나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서 타인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세 가지 편만이 있는데

 

우주끝까지 마음을 내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

우주 끝까지 가득 채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이를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이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한편만에 대해서는 일체의 뭇삶이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Vism.9.50)라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뭇삶(중생), 생명, 존재, 사람, 몸을 소유한 자 이렇게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뭇삶은 오온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으로 집착하고 염착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했다.

생명은 숨을 쉬기 때문이고, 존재는 살고 있기 때문이고,

몸을 소유한 자는 인간을 말하는데 지옥에 떨어지는 존재를 말한다.

 

인간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뿍갈라에 대하여 유사언어학적으로 풀이 했기 때문이다.

뿍은 지옥을 뜻하고 갈라는 간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대상이다. 그래서 무한편만이라고 했다.

 

한정편만은 일체의 여자가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Vism.9.51)라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자, 남자, 성자, 범부, 신들, 인간, 비참한 곳에 떨어진 자, 이렇게 일곱 가지가 있다.

여자와 남자, 성자와 범부, 천신과 인간 이렇게 쌍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일곱 번째를 보면 비참한 곳에 떨어진 자만이 쌍으로 되어 있지 않다.

생명이 있는 존재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한정편만이라고 했다.

 

방향편만은 동방의 일체의 뭇삶이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 (Vism.9.52)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모두 10가지 방향이 있다.

 

동방, 남방, 서방, 북방, 동남방, 서북방, 동북방, 서남방, 하방, 상방 이렇게 열 가지 방향이 있다.

열 가지 방향에 다섯 가지 무한편만과 일곱 가지 한정편만의 존재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를 방향편만이라고 한다,

 

네 아들로 비유한 사무량심

 

자애의 마음을 낼 때는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이 있다고 했다.

사무량심에는 자애뿐만 아니라 연민, 기쁨, 평정도 있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을 낼 때와 똑 같은 방식으로 한다.

 

자애경을 보면 자애의 마음을 낼 때 어머니의 마음을 예로 들었다.

어머니가 하나 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tn.149)라고 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사무량심을 설명할 때 네 아들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들, 병든 아들, 청년이 된 아들, 자활하는 아들의 네 아들에 대하여,

어린 아들에게는 성장하기를 원하고, 병든 아들에게는 치유되길 바라고,

청년이 된 아들에게는 젊음의 행복이 오래가길 바라고,

자립한 아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한량없음을 닦는 자도 일체 뭇삶에 대하여 자애 등을 통해 수행을 해야 한다.”(Vism.9.108)

 

 

자애는 막내를 대하는 것과 같다. 사랑스런 어린 아들에 대하여 “행복하기를!” 이라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

모든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연민은 병든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병고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며 모든 중생이 불행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기쁨은 청춘의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젊음이 넘치는 아들을 볼 때 마다

“젊음이 늘 계속되기를!”이라며 모든 중생의 성공과 번영을 축하해 주는 마음이다.

 

평정은 자립한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힘으로 살아 가는 아들에게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며 무관한 자를 대하듯,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사무량심이 깨질 때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깨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성취되고 어떤 경우에 깨지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는 분노를 가라 앉힐 때 성취되고, 애착이 생겨날 때 깨진다.

그래서 자애는 연인이나 부부사이에서 닦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연민은 폭력을 가라 앉힐 때 성취되고, 근심이 생겨날 때 실패한다.

 

그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 나기를!”라고 바라면 폭력적인 마음이 가라 앉는다.

원한 맺힌 자에게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노심초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좋지만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되면 연민수행은 실패로 돌아 간다는 것이다.

 

기쁨은 불쾌를 가라앉힐 때 그것이 성취되고, 웃음이 생겨날 때 실패한다.

타인의 성공에 기뻐해 주는 것 까지는 좋지만 들뜸으로 인하여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다면 기쁨수행은 깨지는 것으로 본다.

 

평정은 원한과 애착을 가라앉힐 때 성취되고, 세속적인 무지에 입각한 평정이 생겨날 때 실패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에게도 평정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평정은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마치 세 가지 느낌에 있어서 즐겁지도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사띠가 없을 때 무덤덤한 느낌은 언제 어떻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변할지 알 수 없다.

무덤덤한 느낌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건에 따라서 탐욕과 성냄으로 변질되기 쉽다.

범부의 평정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 평정

 

범부의 평정은 평온한 것처럼 보여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평정은 어떤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평정은 뭇삶에 대하여 무관한 형태를 일으키는 곳을 특징으로 삼고, 뭇삶에 대하여 평등하게 보이는 것을

기능으로 삼고, 적의와 애착이 가라앉은 것을 현상으로 삼고, 이와 같이 뭇삶들은 행위가 주인이다.

 

행위에 따라서 행복하게 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이미 얻은 성취에서 퇴락하지 않게 된다.’라고

생각하여 행위가 주인인 것을 보는 것을 토대로 삼는다.”(Vism.9.96)

 

 

사무량심에서 평정은 행위와 관련된 평정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회장은 평정에 대하여 먼저 인과와 업보를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포기하라고 했다.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원인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인과와 업보를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는 세속의 무지에 따른 평정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과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

사소한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안다면 함부로 욕심내거나 성내지 않을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에 초연해진다.

설령 괴로움을 겪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남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지만 노심초사하거나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

인과에 따른 행위의 과보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업과 업의 과보를 알게 되면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온해진다.

마치 이혼한 전처 보듯 하는 것과 같고, 자립한 아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평온한 마음을 가지려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한다.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2020-07-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