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초전법륜경

황령산산지기 2020. 5. 9. 09:56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초전법륜경

 

 

부처님이 처음 설법했을 때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부처님이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사성제를 설했을 때 꼰당냐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기 마련이다.”(S56.11)라고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에서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했다. 법안(法眼)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과 같다.

 




꼰당냐가 깨달은 것은 일종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은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조건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송으로도 확인된다.

 

꼰당냐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이를 수다원송또는 수다원선언이라고도 한다. 생멸에 대한 진리를 알았을 때 이를 견도(見道)’로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사성제는 연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사성제는 궁극적 진리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성제의 설법을 듣고 생멸의 진리를 이해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과 같다. 남은 것은 수행을 하여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을 말한다.

 

마침내 자신에게 더 이상 오염원이 없음을 확인 했을을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이를 아라한송또는 아라한선언이라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완성이고 가르침의 완성이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무학도(無學道)’인 것이다.

 

꼰당냐의 선언은 우주적 사건이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마치 의사가 임상실험을 성공한 것과 같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실제로 실험에 적용해서 동일한 결론을 얻었을 때 보편적인 이론이 된다.

 

꼰당냐가 진리를 이해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삽시간에 소문이 우주로 퍼졌다. 가장 먼저 땅의 신이 알았는데, 땅의 신이 감격에 벅차서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 소식을 사대왕천이 듣고 똑같이 외쳤다. 이렇게 욕계천상의 신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꼰당냐의 깨달음은 마침내 하느님까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梵天)를 번역한 것이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한 것에 대하여 최초로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느님의 귀에 소식이 전달되자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했다.

 

우주가 진동하고 빛이 우주끝까지 비추는 현상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 번 있다. 보살이 입태했을 때와 보살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이다.


이렇게 빛이 우주 끝까지 비추었을 때 빛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사이지옥(lokantarikā) 중생들도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사이지옥은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들이 가는 무간지옥을 말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자들을 말한다.

 

사이지옥에 있는 자들은 일겁의 우주기가 지나도 구제받지 못하고 여러 겁 동안 빛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보내는 중생들이다. 그들이 처음 빛을 보았을 때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M123)라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빛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식(眼識)이 생겨나지 않아서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없었는데 부처가 출현하자 비로소 옆에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구제받을 수 있는 희망의 빛인 것이다.

 

흔히 감동의 도가니라고 한다. 감동과 흥분이 범벅이 되어서 모두가 환희하고 환호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슴 울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팝아티스트가 공연할 때 감동의 도가니를 볼 수 있다.


논산신병훈련소에서 실로암공연을 할 때 병사들이 실로암, 실로암,..”하며 외치는 것도 감동의 도가니일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도 감동의 도가니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을 접했을 때이다.

 

초전법륜경을 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초기불교를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초전법륜경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좀 늦게 접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상윳따니까야 56가지 주제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주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윳따니까야 끝 부분에 실려 있는 초전법륜경은 마치 숨어 있듯이 실려 있다. 그래서 잘 노출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면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다. 고락중도에 대한 이야기, 팔정도에 대한 이야기, 사성제를 세 번 굴린 이야기 등도 감동적이지만 무엇보다 극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마치 하나의 장엄한 대서사시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우주적대서사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신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선언했다.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있게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부처님이 선언한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sammāsambodhi)’ 라고 한다. 이를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열 가지 별호중의 하나가 정등각자이다.

 

빠알리어 아눗따라(anuttara)라는 말은 ‘nothing higher’라는 뜻으로 무상(無上)으로 번역된다. 우리말로는 위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위가 없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incomparable, unsurpassed, second to none’라는 표현을 한다. 비할 수도 없고, 견줄 수도 없고, 아무에게도 두 번째가 아닌 것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따나경(寶石經, Sn.2.1)에 이런 게송이 있다.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부처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Stn.234)

 

 

게송에서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어 와라(vara)‘excellent; noble’의 뜻이다. 그래서 와란뉴(varaññū) 열반을 체득한 자’, 와라도(varado)위없는 가르침을 주는자’, 와라하로(varāharo)여덟 가지 성스런 길을 가져 오는 자가 된다. 모두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찬탄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최상의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최상의 가르침은 ‘Anuttaro dhammavara을 말한다. 위없는 가르침이라는 말과 같다. 이는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sammāsambodhi)와 같은 말이다.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의 신들에게도 심지어 악마들에게도 당당하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당연히 외도들에게도 선언했다. 이는 대상 중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sassamaabrāhmaiyā)”이라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초전법륜경을 독송하면 가슴 벅차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하는 것 같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대하여 온 우주에 선언했기 때문이다.

 

초전법륜경은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리고 나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이전과 전혀 다른 앎āa: )과 봄(dassana: )이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아라한 선언은 구원의 메시지와 같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갔다. 처음에는 타락한 자라 하여 배척하려 했으나 가까이 다가올수록 위의가 있었다. 결국 무릎을 끓고 맞이했다. 그리고 설법을 들었다. 그때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 최초로 생긴 것이다. 마치 알이 부화한 것과 같다.

 

알은 낳는 것에 있어서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부화하는 것에 있어서는 순서가 없다. 어미닭은 알 낳는 순서와 관계없이 똑같이 품어 주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알을 품듯이 사성제를 설법했다. 그래서 마치 가장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듯한 수행자가 꼰당냐였던 것이다.

 

꽁당냐는 부처님이 설법했을 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라고 이해했다. 이것은 역사적 순간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 대사건이다.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우주 곳곳에 빠짐없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광명은 삼계 사이에 있어서 버려진 세계라 불리우는 곳, 사견을 가진 자들이 여러 겁 동안 암흑의 무간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남김 없이 빛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감흥어린 말로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라고 읊었다. 여기서 안냐(aññā)‘highest knowledge’의 뜻으로 궁극적인 앎이라고 번역되었다.

 

초전법륜경을 다 외었다. 2013년도의 일이다. 약 한달보름가량 걸렸다. 마치 벽돌쌓기 식으로 하루에 한 단락 또는 한 게송씩 외었다. 이전에 외운 것을 확인해야 다음 것을 외우는 식으로 했다. 이전에 외운 것이 확인되었을 때 진도가 나갔다. 마지막 단락을 외웠을 때는 모두 다 외우게 된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모두 빠알리원문으로 외웠다. 그런데 외우는 과정에서 환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 팔정도, 사성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극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부분을 외웠을 때는 마치 내가 그 상태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꼰당냐가 처음으로 법의 눈이 생겨나서 무엇이든 생겨넌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했을 때 꼰당냐가 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신들의 흥분이다. 땅의 신부터 시작하여 범천의 하느님에 이르기 까지 신들이 법의 바퀴가 굴러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흥부하듯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친 것을 말한다.

 

꼰당냐가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다고 했다.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는 뒤로 물릴 수 없는 것(appaivattiya)’을 말한다. 이는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서 쎌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담마의 왕으로서 부처님의 진리의 수레바퀴는 후진불가의 수레바퀴이다. 결코 뒤로 물릴 수도 없고 옆으로 갈 수도 없는 수레바퀴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는 바퀴인 것이다. 이는 고대인도에서 말이나 소에 매달린 바퀴를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1번 게송을 보면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릇듯.”(Dhp.1)라고 되어 있다. 수레바퀴는 수레의 굴대에 연결된 견인용 황소의 뒤를 따른다. 그래서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낸다.


이와 같이 바퀴는 두 방향으로 황소의 운동을 제어하며 한발 한발 황소 뒤를 따른다. 마찬가지로 법의 바퀴는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멈춤 없이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갈 뿐 결코 후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후진불가이고 오로지 직진만 있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을 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처지와 벗어난 것이 없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확신에 찬 믿음(saddha)’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마치 정복왕이 적군의 성을 향해 진격하는 사군, 즉 코끼리부대, 전차부대, 기마부대, 보병부대로 이루어진 사군과 같은 것이다.

 

정복왕이 막강한 사군을 거느리고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네 가지 진리, 즉 사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꼰당냐가 법의 눈이 생겨나서 진리의 수레바퀴가 처음 구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굴러 왔다. 그 진리의 수레바퀴는 결코 뒤로 구르지 않는 후진불가의 바퀴이고,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는 바퀴인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읽다보면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논산훈련소에서 병사들이 개신교 교회에서 실로암, 실로암,..”라며 실로암을 합창하며 흥분의 도가니로 빠지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일어난다. 이는 반야심경의 감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약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한다. 그 클라이막스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은 반야심경 못지 않게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이 270자도 되지 않는 글자에 심오한 의미가 새겨져 있어서 뜻을 모르고 외우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초전법륜경은 마치 천수경 못지 않은 글자수를 가지고 있어서 뜻을 알고 독송할 수 있다. 더구나 극적인 요소도 갖추고 있어서 독송하면 할수록 절정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예불시간에 조석으로 반약심경을 독송한다. 어느 법회에서는 반야심경은 빠지지 않는다. 그런 반야심경에 대하여 대승경전의 정수라고 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의 정수는 어떤 것일까?


단연 초전법륜경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한국불자들이 반야심경 독송하듯이, 예불시간에 초전법륜경을 독송한다면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들지 않을까? 한국불교 예불문에 초전법륜경이 들어갈 그날이 올 수 있을까?

 

 

2020-05-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