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오취온(五取溫) 이해하기

황령산산지기 2020. 5. 2. 09:51

오취온(五取溫) 이해하기

 

 

한국불교에서는 갈애라는 말보다 집착이라는 말을 더 애용하는 것 같다. 말끝마다 집착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집성제에 대하여 집착으로 오해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집성제에서 집()자라는 말을 집착의 의미로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성제에서 집자는 집착과 관계없는 말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빠알리원문을 보면 집성제에 대하여 둑카사무다요 아리야삿짜(dukkhasamudayo ariyasacca)’ 라 하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라고 번역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과 관련된 것이 없다.

 

또 하나 한국불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오취온(五取溫)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다는 오취온에 대하여 집성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취온은 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의 형태로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오취온고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은 원인에대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취온은 집성제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오취온에서 집착을 뜻하는 취()라는 말 때문에 오취온을 집성제로 본다는 것은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전을 바탕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

 

집성제와 고성제는 인과관계로 되어 있다.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항상 고성제가 먼저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숙(異熟)의 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행위를 하여 과보가 익어서 현재 나타난 것이 괴로움이다. 그래서 괴로움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괴로움이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괴로움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성제에서 집성제이다. 집성제에서 볼 수 있는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부처님은 분명히 갈애라고 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은 경전을 바탕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견해가 되어 버린다. 그런 견해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중구난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말하면 모든 것이 정리가 된다.

 

한국불교와 달리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말한다. 만일 경전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모독하는 구업이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불교인들이 삼귀의를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불교인이라면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래서 마치 코끼리발자국 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들어가듯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자들은 사성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집성제에 대하여 집착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오취온에 대하여 또 집성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무지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집성제에서 갈애로 설명한 것은

 

부처님이 집성제에 대하여 갈애로 설명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집착이 아닌 갈애로 설명한 것은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고 했다. 여기서 느낌은 결과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 이 세가지 느낌은 이숙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전의 행위가 익어서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 괴롭다면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까운 것일수도 있고 먼 것일수도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불쾌해졌다면 이미 과거에 그사람에 대하여 좋지 않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에 따르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하여 불쾌한 느낌이 발생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더욱 더 불쾌해지기 때문에 갈애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가 원인이 되어 또 다른 업을 발생시킨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느낌단계에서 차단하는 것이다. 이숙의 결과로서 나타난 낙수, 고수, 불고불락수를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려서 미래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 전개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느낌과 갈애 사이에 하나의 인과연결이 있다.”(Vism.17.289)라고 했다.

 

갈애의 강을 건넜을 때

 

미얀마 양곤에 모곡국제선원이 있다. 건물 꼭대기와 입구 담벼락에 원형 그림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유명한 십이연기도표이다. 이를 삼세양중인과도표라고도 한다. 모곡선원 창시자인 모곡사야도가 십이연기를 바탕으로 수행지도했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 십이연기도표는 모곡선원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다.

 



 

삼세양중인과 십이연기도표를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하나의 도표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도표 하나만 잘 이해하면 부처님의 설한 핵심 가르침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삼세양중인과십이연기도표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이 있다. 그것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는 링크를 말한다. 이 링크에 대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도록 알아차리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윤회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형의 순환고리로 되어 있는 삼세양중인과도표를 보면 윤회의 출구는 오로지 한 곳뿐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십이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도표를 보면 느낌과 갈애 사이에는 하나의 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느낌-갈애의 강이라 할 것이다. 느낌의 입장에서 본다면 갈애의 강이 된다.


그런데 한번 갈애의 강을 건너면 되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한다. 느낌에서 좋고 싫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강을 건넌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이제 앞으로 갈 일만 남았다. 루비콘 강을 건넌 케사르는 로마로 진격했다. 그리고 황제가 되었다. 갈애의 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여 갈애의 강을 건넜을 때 연기가 회전되어서 윤회하게 된다.

 

갈애의 강을 건넜다는 것은 윤회의 강을 건넜다라는 말과 같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십이연기 가장 마지막 고리를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갈애의 종착지는 절망인 것이다.

 

갈애와 집착은 어떻게 다른가?

 

모든 것이 갈애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느낌 단계에서 차단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성제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집착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애와 집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가 강화된 것이다. 이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한다.”라는 정형구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갈애와 집착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어둠 속에서 도둑이 손을 뻗치는 것처럼, 아직 얻지 못한 경계를 갈구하는 것이 갈애이고, 그가 물건을 훔친 것처럼, 이미 도달한 경계를 취하는 것이 집착이다.”(Vism.17.242)

 

 

도둑의 비유를 보면 갈애는 훔치고자 하는 것이고, 집착은 훔친 상태를 말한다.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upādāna)라는 말은 ‘clinging’의 뜻으로 이미 들러 붙은 상태를 말한다. 이는 갈애를 뜻하는 딴하(tahā)와는 다른 말이다.

 

한번 들러붙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갈망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지만 이미 고착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집착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upādāna),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upādāna),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sīlabbatupādāna),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 이렇게 네 가지 집착이 있는데 이 중에서 무려 견해에 대한 것이 세 가지나 된다.

 

흔히 개과천선했다는 말을 한다.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에 처하면 곤조가 나올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사상이나 신조 등 한번 견해가 생기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고정된 견해가 평생가는 것이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다는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에 빠지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규범과 금계로 청정이 있다고 집착하면 전도된 규범과 금계의 집착으로 인하여 고행을 하게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아가 있다는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이다.

 

집착중의 집착은 유신견이다. 오온을 자아로 여기거나, 오온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오온이 있다고 여기는가 하면, 오온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유신견을 가지면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된다는 것이다. 느낌도 마찬가지이고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착은 한번 들러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도둑이 이미 물건을 훔친 것과 같다. 그래서 오온은 집착된 존재이다. 그래서 빤쭈빠다나칸다 (pañcupādānakkhandhā)라 하여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하고, 한자어로는 오취온(五取溫)이라고 한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일곱 가지 괴로움을 열거하고 난 다음에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성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고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에 따르면 오취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재가신자 위사카가 개체(sakkāya)에 대하여 묻자, 담마딘나 비구니는 벗이여 비싸카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두고 개체라고 합니다.”(M44)라고 말했다.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가 있는데 이를 줄여서 말하면 오취온고라고 했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집착된 오온에 대하여 오취온이라고 했는데 이는 고성제에서 오취온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담마딘나가 말한 오취온은 고성제의 오취온고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고성제에 대하여 단지 집착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집착을 고성제로 보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재가신자 비싸카는 존귀한 여인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입니까?”(M44)것에서 알 수 있다.

 

재가신자 비싸카는 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존귀한 여인이여라고 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담마딘나 비구니는 비싸카의 전처였다. 그녀는 출가하자마자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남편 비싸카가 재가신자로서 전처였던 아라한에게 존귀한 여인이여라며 궁금한 것을 물어 본 것이다. 여기서 존귀한 여인은 빠알리어 ‘ayyā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mistress; lady’의 뜻이다. 담마딘나가 비싸카의 전처였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이야의 뜻과 전혀 다르게 스님이라고 번역했다. 전처였던 담마딘나 비구니는 이렇게 답했다.

 

 

벗이여 비싸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지니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바로 그 집착입니다.”(M44)

 

 

담마딘나 비구니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오취온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했다. 집착은 오온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집착은 욕망처럼 형성의 다발의 한부분이므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 아니다.”(Pps.II.359)라고 했다.  집착은 형성다발(행온)에서 하나의 마음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오취온이라고 하여 오온을 떠나 별도로 오취온이라는 집착다발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색취온, 수취온과 같은 별도의 집착다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취온이라는 별도의 집착다발이로 없다면 오온과는 별도로 분리된 집착이 있어서 집착이 생겨날 때마다 집착이 붙어서 오취온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리고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분리된 것도 아니다.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분리된 집착은 없기 때문이다.”(Pps.II.359)라고 했다.


주석에서는 분리된 집착은 없다고 했다. 집착이라는 형성의 한부분이 오온에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오온에는 태어날 때부터 집착이 붙은 채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오취온적 존재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오취온에 대하여 집성제로 본다. 이는 사성제를 모르고 한 말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분명히 오취온고가 고성제에 속해 있는 것이다. 오취온에서 집착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집성제로 단정하는 것은 무지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오취온의 존재일까?


 

인생이 괴로운 것은

 

지금 이렇게 태어난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면 오온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미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자연스로운 것이다. 그래서 항상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 나의 자아라고 하여 갈애와 자만으로 살고 유신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라는 것은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고성제가 집성제와 인과관계에 있어서 항상 결과로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성제가 인과관계에서 결과이기 때문에 항상 괴로운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오온에 집착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 괴로운 것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020-04-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