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내가 괴로운 이유

황령산산지기 2020. 4. 11. 10:27

내가 괴로운 이유

 

 

사람들은 왜 얼굴이 서로 다를까?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다른 구석이 있다. 성격도 모두 다르다. 비슷한 성향은 있을지 몰라도 성격은 모두 제각각이다. 얼굴도 성격도 다르게 태어난 것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이는 육체적 조건이 뛰어나다. 또 어떤 이는 육체적 조건이 부실하다. 정신적 조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떤 이는 눈, , 코 등 의식을 포함하여 여섯 감각기관이 온전하다. 또 어떤 이는 결여된 것도 있다. 왜 이렇게 차별이 생기는 것일까?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 양가집 자제를 말한다. 용모도 아름답고 지혜도 갖추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처럼 인생이 스무스하다. 반면 천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다. 천민으로 태어나 용모도 지혜도 갖추어져 있지 않아 한평생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차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모양 이꼴로 생긴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신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으니 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신의 탓으로 본다면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릴 것이다. 영화 밀양을 보면 목사를 유혹하는 여인이 있다. 목사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며 신의 뜻으로 돌렸다.

 

이모양 이꼴은 부모로 부터 온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디서 왔을까? 그 부모의 부모는? 이렇게 무한소급하다 보면 어디에 이를까?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창조주라 할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소유자라면 박테리아라고 할지 모른다.

 

몸과 마음은 부모를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우연히 생겨난 것일까? 모든 것이 우연발생적인 것이라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아무 이유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럴 때 사는데 이유가 있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살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괴로움 역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태어난 것도 이유가 있고 늙어 병들어 죽는 것도 이유가 있다. 삷 에는 이유가 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때문에 사는 것일까?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요즘 하루 해가 짧다는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짧아 지는 것 같다. 금방 점심시간이고 금방 저녁시간이다.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 같다. 하루를 의미 없이 산다면 축생과 다름없을 것이다.

 

축생들은 삶에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사유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삶이 그렇다. 본능에 충실한 삶일수록 동물적 삶이 되기 쉽다. 먹는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면 먹기 위해서 사는 삶이 될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삶에게 왜 삽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사는데 뭐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살면 되죠 뭐.”라고 말할지 모른다. 짐승같은 삶에는 삶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괴로운 삶에게 왜 삽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이는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죽어 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라면 죽음이 안식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려 놓은 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수습도 못하고 죽는다면 책임을 면하는 것일까?

 

지금 괴롭다고 하여 죽어 버린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것도 원인이 있어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지금 괴롭다고 죽어 버리면 죽음을 원인으로 죽음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기 마련이다.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있다. 동전의 양면 같기도 하고 출입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왜 사냐?”고 물었을 때 사는데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말 한다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동물적 삶이다. 반면에 죽지못해 삽니다.”라고 답하면 인간적 삶이 된다. 삶이 괴로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삶은 본래 괴로운 것이다. 이는 사성제로도 확인된다.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여기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도 있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에 따른 괴로움도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도 있다. 이 모두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여 한자로 고성제(苦聖諦)라고 한다.

 

고성제에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다. 이 중에서 핵심은 오취온고(五取溫苦)이다. 빠알리어로는 빤쭈빠다나칸다 둑카(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라고 한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는 상태에 대하서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지금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팔고(八苦)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늙는 것을 슬퍼한다면 이것도 괴로움이다. 괴롭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은 항상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성제에 답이 있다. 괴로움 발생의 거룩한 진리, 즉 집성제에 따르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갈애(tahā)라고 했다.

 

갈애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즉 감각적 욕망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이 세 가지가 원인이 되어 괴로움이 발생된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는 집성제가 원인이 되고 고성제가 결과가 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2지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된다. 이를 코끼리발자국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M28)

 



 

법의 장군 사리뿟따존자가 설한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라는 커다란 범주안에 다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면 부처님 가르침을 다 아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고와 고소멸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에 인생의 해법이 있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묻거든 사성제에 해법이 있다고 말 해야 한다.

 

누군가 그냥 산다고 하면 그는 감각적 욕망의 갈애로 산다고 볼 수 있다. 동물과 같은 본능적 삶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은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갈애는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다. 만족이 없어서 불만족이 된다. 즐거움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다. 불만족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감각적 욕망의 갈애로 사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성제는 고, , , 도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한가지만 철견해도 나머지 세 가지를 한꺼번에 관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S56.30)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성제에 대해 천착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따라옴을 말한다. 괴로움을 뼈저리게 겪는다면 사성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어느 위빠사나 스승은 말 끝마다 괴로움의 끝을 봅시다.”라고 말한다. 괴로움을 끝장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팔고에 대해 철견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오취온고이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집착된 상태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삶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누군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현자들이 보았을 따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4)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있다면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즐거운 느낌에 대해 인생이 즐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다. 불만족은 넓은 범주로 본다면 괴로움이다. 몸이 늙어 가는 것이 슬프다면 역시 괴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그 사실 자체도 괴로운 것이다. 일체가 괴로운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라 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한다.

 

형성된 것들은 가만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몸과 마음도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아 불만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즐거운 것을 괴로움으로 알아라.”라고 말 한다. 몸과 마음이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오온을 내것이라고 여긴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존재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미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집착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집착되어 있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겁니까?”라는 말에 답하지 않았다.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은 어떻게 발생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적 사유를 의미한다. 괴로움의 원인과 조건과 결과를 말한다.

 

지금 괴로운 것은 우리가 오취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이 있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면 먼저 자아관념을 부수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아관념을 깨기 위해 오온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설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 anatta)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갈애(나의 것)와 자만()과 견해(자아)에 따른 것이다. 이를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 하여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한다.

 

유신견이 부서지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수다원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번뇌를 소멸하려면 수행해야 한다.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었 때 이를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더 이상 배울것도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아라한의 단계를 말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사향사과라고 한다. 그런데 사향사과는 공통적으로 열반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무아가 되는 것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괴로움은 자아관념을 가진 자에게서만 볼 수 있다. 나는 오취온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괴로움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나는 괴로움 덩어리인 것이다. 내가 괴로운 이유를 알 수 있다.

 

 

(네가 사는 이유)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의 전생이 여기에 있게 만들었다.

까르마의 법칙은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돌게 만든다.

 

자연의 법칙은 완전한 것이다.

원인으로 결과를 낳아서

어느 누구도 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불쌍한 존재는 끊임없이 윤회계를 돌고 돌 뿐이다.

 

당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내면을 주시하라 그리고 발견하라!

자연은 순수하고 매우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가슴을 고귀하고 정직하게 만들어라!

또한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고 안정되게 만들어라!

 

이 윤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라!

당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가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부디스트송 'Reason Behind Your Birth' 의 가사, 이병욱 번역)

 

 

2020-04-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