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눈 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황령산산지기 2020. 4. 25. 09:38

눈 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처럼 올바로 해탈한 님

감각적 쾌락의 속박의 거센 흐름을 건넌 님,

동요를 여의고 지복에 도달한 님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Ud.93)

 

 

부처님이 감흥어라 불리우는 우다나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이다. 쇠망치나 쇠몽둥이나 무쇠로 맞은 황동 그릇 등에서는 안에 불꽃이 튕겨나와 반짝일 것이다. 그러나 머무는 시간은 짧다. 이처럼 불꽃이 사라지는 것을 열반으로 비유했다. 열반을 뜻하는 닙바나(nibbana)는 소멸을 뜻하지만 문자적으로는 불어서 꺼지는 것(to cease blowing)’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것은

 

완전한 열반에 들면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결생되지 않는 지멸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그치고 부수어지고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UdA.435)라고 했다. 여기서 결생은 재생연결식을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빠띠산디(paisandhi)라고 한다.

 

열반에 들면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 생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남아 있는 한 재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도시의 경이 그것이다.

 

도시의 경에 따르면, 재생연결식과 관련하여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도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S12.65)라고 했다. 명색이 일어나는 조건이 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식은 명색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의식이 명색을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온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재생의식이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함을 말한다. 이는 식연명색(識緣名色)’명색연식(名色緣識)’을 말한다. 식과 명색이 서로 조건이 되어 존재가 태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했다.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식과 명색은 상호의존하여 존재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도시의 경에 따르면 식연명색에 대하여 의식이 있으면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S12.65)고 했다. 그런데 도시의 경에서는 놀랍게도 명색연식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S12.65)라고 했다. 이처럼 식연명색과 명색연색이 번갈아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오온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재생연결식에 따른 오온의 형성과정을 말한다.

 

일상에서 십이연기는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여섯 가지 감역이 일어나고,..”로 설명된다. 그런데 재생연결의 과정에 있어서 연기는 의식과 명색이 서로 상호조건이 되어 번갈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구절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이 경에서만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몸과 마음을 만드는 과정, 즉 오온을 만드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도시의 경에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으로 식과 명색을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S12.65)라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고 했다. 무엇이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는 것일까? 중생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것일까? 중생이 윤회하는 것을 말할까? 그렇다면 재생연결식에 따른 태어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것 말고는 다른 어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이 있겠는가?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SAT.ii.102)라고 했다.

 

주석에서 말한 이것이란 식과 명색을 말한다. 식과 명색의 상호작용으로 오온이 형성되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식과 명색 이외에 다른 중생이라는 개념적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SAT.ii.102)라고 했다. 식과 명색 사이에 어떤 개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하일라이트는

 

요즘 우 조띠까 사야도의 수행지침서 마음의 지도를 보고 있다. 수많은 수행지침서가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쓰여진 것 같다.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사야도는 철저하게 청정도론에 근거하여 법문했다는 사실이다.

 

청정도론에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열반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해 놓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먼저 단계적으로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빠사나 지혜 역시 단계적으로 계발된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단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칠청정과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이다.

 

청정도론에서 열반에 대한 설명이 클라이막스이다. 그러나 하일라이트는 지혜를계발해 가는 과정에 있는 세 개의 장이 가장 핵심이라고 본다. 그것은 18장과 19, 그리고 20장을 말한다.  

 

청정도론 제18장은 견해의 청정(見淸淨; diṭṭhi visuddhi)’에 대한 것이다. 칠청정 중에서 세 번째 청정에 해당되고,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는 첫 번째 단계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한다.

 

청정도론 제19장은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道疑淸淨; kakhāvitaraa visuddhi)’에 대한 것이다. 칠청정 중에서 네 번째 청정에 해당되고,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는 두 번째 단계로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 라고 한다.

 

청정도론 제20장은 길과 길아님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에 대한 것이다. 칠청정 중에서 다섯 번째 청정에 해당되고,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는 세 번째 단계로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라고 한다.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앞서 언급된 우다나 최후의 게송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과 유사한 내용이 청정도론에도 있다.  20길과 길 아님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생명도 신체도 고락도

단지 한 마음과 상응하는데,

그 한 마음의 찰나는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팔만사천의 겁의 세월을

사는 천신이 있는데,

두 마음을 함께 두고서는

그들도 생존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나

또는 생존자의 이미 소멸한

존재의 다발은 모두 같다.

이미 갔으니 돌아오지 않는다.

 

직전에 파괴되었어도

미래에 파괴되었어도

그 중간에 파괴되는 것도

특징에는 다름이 없다.

 

생겨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고

현재 생겨남으로 생존한다.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멸하니,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

 

이미 괴멸한 것은 남지 않고

미래의 축적도 없다.

현재 생겨나 존속하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

 

사실들이 생겨나더라도

그들의 괴멸은 예정되어 있고,

괴멸의 원리는 현존하니,

과거와는 섞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와서

괴멸한 뒤에 보이지 않게 된다.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

 



 

마지막을 게송을 보면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라고 했다. 이 구절은 우다나에서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가니”(Ud.93)라는 구절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번개가 칠 때 천둥소리도 난다. 이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동시에 아는 마음도 있다. 이렇게 보고 듣는 것은 색에 대한 것이고, 아는 것은 명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번개와 천둥이 지나가면 아는 마음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이 함께 생겨나서 함께 사라진다고 말한다. 현재가 있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고 했다.

 

소리가 나면 소리를 듣고 소리가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때 소리를 아는 의식도 일어나서 사라진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진다. 소리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이미 괴멸한 것은 남지 않고 미래의 축적도 없다. 현재 생겨나 존속하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라고 했다. 이 게송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이

어디로 가거나 어디에 모이지 않은 것을 압니다.

단지 사라질 뿐입니다.

일어나기 전에 그것들은 어디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 조띠까 사야도, 마음의 지도, 182)

 

 

우 조띠까 사야도에 따르면 이 게송은 짧지만 매우 심오하다고 했다. 이 게송 안에 명색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마음 순간, 어떤 현상, 감각, 경험들이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어떤 경험을 하기 전에 그 경험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경험을 한 후에 그 경험이 어디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이 아니고 현상의 직접적인 경험이라고 했다. 이런 경험은 지금 일어나서 지금 사라지기 때문에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했다.

 

존재적 개념에 대하여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은 개념으로 아는 것이고 보는 것은 경험으로 보는 것이다. 청정도론과 사야도의 수행지침서를 보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생겨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고 현재 생겨남으로 생존한다.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멸하니,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 (Vism.20.72)라고 했다. 여기서 시설(施設)이라는 말은 개념을 말한 것이다. 빠알리어로 빤냣띠(paññatti)라고 한다. 그런데 궁극적 시설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의 시설을 말한다. 존재의 시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목숨도 자기 자신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오로지 한 마음과 관련된 것으로

찰나지간 급속히 바뀐다.

 

죽어있건 또는 살아 있건

소멸된 존재의 다발은

일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가서 다시 오지 않는다.

 

생겨나지 않으면 태어남이 없고

현기하면 생존한다.

마음이 부서지면 세상은 죽은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Vism.8.39)

 

 

청정도론 제8장에 실려 있는 죽음의 명상(maraasati)’에 대한 게송이다. 게송에서 이것이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Vism.8.39)라고 했다. 개념이긴 하지만 존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 대한 것이다.

 

오온은 진실하고 궁극적 의미에서 존재하는 법이다. 오온에 대하여 개념으로 설명해 놓았지만 경험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의해서 가립된 개념, 즉 여자, 남자, 중생과 같은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비존재적 시설이라고 한다. 당연히 신도 존재하지 않고 창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 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존재한다면 오온이 존재한다.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명색으로 설명했다. 명색을 알면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했다. 청정도론 제18장 견해의 청정을 보면 있는 그대로 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있을 때 뭇삶이나 개인이라는 명칭만이 있고, 하나하나의 사실로 관찰할 때는 궁극적 의미로는 내가 있다.’라든가, ‘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오직 명색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자의 봄을 있는 그대로의 봄이라고 한다.”(Vism.18.28)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여실견(如實見)’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야타부따닷사나(yathābhūtadassana)’라고 한다. 여기서 닷사나(dassana)라는 말이 본다()’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닷사나라는 말은 정견(正見)’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눈 있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눈 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세상에 수행승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본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나서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져서 적멸에 든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눈 있는 자들은 본다.”(Vism.18.30)

 

 

눈 있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본다고 했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본다.”라고 했다. 이 말은 명색을 보라는 말과 같다. 정신-물질적 현상을 보라는 것이다. 조건 발생하여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중생, ,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 끼여들 틈이 없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정신의 세계의 직후에

시각의식이 오는 것처럼,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직후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결생이 있을 때

마음의 상속이 일어나니,

앞의 전심이 파괴되고

그 다음의 후심이 생겨난다.

 

그것들에게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게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어떠한 것도

오지 않지만, 결생이 일어난다.”(Vism.19.23)

 

 

게송을 보면 중간자가 없다고 했다. 정신-물질의 과정에서 중간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이는 앞서 언급된 도시의 경’(S12.65)에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의 관계로도 알 수 있다. 식과 명색 사이에 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창조주도 없다. 따라서 중유(中有)’도 있을 수 없다. 천도재가 성립될 수 없는 근거가 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수행은 알아차림의 연속

 

있는 그대로 보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하여 정신-물질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수행은 순간순간의 의식, 즉 사띠 즉 알아차림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알아차림도 무상, , 무아라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현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도비도지견청정에서는 열 가지 경계에 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무상, , 무아로 알아차림 하라는 것과 같다.

 

모든 것에서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나가 있을 수 없다. 수행하는 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알아차림과 수행의식의 연속인 봄 그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수행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사띠, 알아차림의 연속입니다.”라고 말했다.

 

 

2020-04-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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