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무착(無着)의 안온

황령산산지기 2020. 4. 11. 10:29

무착(無着)의 안온

 

 

올해도 벚꽃이 피었다. 예전보다 일주일가량 빠른 것 같다. 이는 지난 10여년 동안 한 벚꽃나무를 지켜 보았기 때문이다.

 

십오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1978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42년된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낡아서 여기저기 터지기 일쑤이다. 윗층에서 배관이 터져 물이 새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이제 재건축만을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재건축은 지지부진하다. 추진위와 비대위간의 싸움이 십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아파트 역사가 오래 되다 보니 벚꽃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었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마치 웨딩드레스 입은 것처럼 사뿐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중에 한 벚꽃 나무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십여년동안 매년 지켜보아 온 나무이다. 올해도 예외 없이 화사하게 피었다.

 


(2020년 벚꽃나무)


아파트 앞 40년 벚꽃나무

 

아파트 앞에 핀 벚꽃나무는 십여년전이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매년4월 초에 벚꽃철이 피면 흐드러지게 피어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래서 카메라를 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매년 찍다 보니 나무의 역사가 된 듯하다.

 

나무의 이름은 없다. 그냥 아파트앞 벚꽃나무라 하지만 이럴 때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일년에 한번 반짝 필때만 쳐다 볼 뿐이기 때문에 이름을 필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나무로 하기로 한다.

 

그나무을 알게 된 것은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 후 부터이다. 이사 온 해 봄날 일터로 가는 길에 화사하고 사쁜한 벚꽃을 보고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이후 매년 봄만 되면 그나무를 쳐다보게 되었다. 이삼년 후 부터는 카메라에 담았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2008년에 촬영된 그나무 사진을 발견했다.

 


(2008년 벚꽃나무)


2008년도에 본 그나무는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벚꽃으로 가득했다. 그때 ’(2009-04-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벚꽃이 필 때 아파트 단지에 야시장이 열린 것을 기록해 둔 것이다.

 

그나무는 12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더 자라지도 않고 크기도 그대로인 것 같다. 오히려 12년 전 당시가 더 화사하고 사뿐한 모습이다. 올해 그나무가 초라해 보이는 것은 가지치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는 지역이 재개발됨에 따라 공사판과 같은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아파트가 재건축 된다고 하여 관리에 손을 놓은 것 같은 분위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밝고 화사한 벚꽃이 피었을 때 또 카메라를 대지 않을 수 없다.

 

십여년전의 벚꽃이나 지금의 벚꽃이나 꽃모양은 변함이 없다. 마치 불꽃이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전단향나무의 불이나 소똥의 불이나 불의 형태와 광채 등 불꽃 모양이 변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옛날의 벚꽃이나 지금의 벚꽃이나 꽃의 형태, 색깔 빛깔 등에서 변함이 없는 것이다.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가

 

벚꽃은 해마다 피고진다. 그러나 벚꽃은 예전의 그 벚꽃이 아니다. 벚나무는 그대로이지만 벚꽃은 매년 다른 벚꽃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 이렇게 생존해 있지만 지금의 모습은 십년전의 모습과 다르다. 이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십년전의 나의 모습은 지금의 나의 모습보다는 확실하게 젊어 보인다. 앞으로 십년 후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 늙어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십년전의 사진을 보고서 나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런 나는 없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십년전의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때도 나이었고 지금도 나인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Vism.19.19)라고했다. 이 말은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다는 말인가?

 

잡아함경에 유업보무작자라는 말이 있다. 제일공경에 있는 말로 업보는 있지만 짓는 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 뜻이다. 니까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청정도론에서 명색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상세히 나온다. 행위의 주체도 업보의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의 연속으로 통해서 일어나는 명색만이 나타난다.”(Vism.19.19)라고 했다. 과연 이말은 맞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행선과 좌선을 병행한다. 물론 일상에서 사띠도 해야 한다. 특히 경행을 할 때 유업보무작자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발을 들려고 할 때 먼저 의도가 일어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도 아니다.

 

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들려지는 것이다. 이는 행위에 해당된다. 발을 들어 이동할 때 이는 발이라는 물질이 이동하는 것이다. 이동한다는 것은 이동하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정신-물질 작용이다.

 

좌선할 때 배의 호흡을 관찰한다. 배가 부르고 꺼지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배가 부르는지 꺼지는지는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정신-물질적 현상이다.

 

어느 것 하나 정신-물질적 현상 아닌 것이 없다. 의도하여 이미 결과로서 나타났다면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정신-물질 과정의 연속이다. 그래서 원인 이외에 행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숙의 생성 이외에 이숙의 향수자를 발견하지 못한다.”(Vism.19.19)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유업보무작자론에 따르면 과보를 경험하는 자는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내가 있어서 행위를 하고 내가 있어서 과보를 경험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원인이 있을 때 행위자라고, 이숙의 생성이 있을 떄 향수자라고 현자들은 인습적으로 말하는 것뿐이라고 올바른 지혜로 잘 보는 것이다.”(Vism.19.19)라고 했다. 나 또는 너, 중생, 신 등 이런 말은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흔히 나라는 말을 한다. 행위를 해도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이다. 과보를 받아도 내가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기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는 없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모든 이름 붙여진 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뭇삶(중생)이라는 말도 단지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만 있을 뿐이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동차라는 말은 있어도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다.

 

자동차가 있다면 수만개 부속으로 이루어진 기계장치가  있을 뿐이다. 편의상 자동차라고 부른 것일 뿐이다. 사람도 사람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뿐이다. 마치 자동차의 부속품처럼, , , , , 식 등 여러 개의 덩어리가 조합된 것이 있는데 편의상 이를 사람, 또는 중생, 뭇삶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을 받는 자도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가 업을 지어 내가 과보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때 나라는 말은 단지 관습적으로 붙인 것이다. 잘 관찰해 보면 나는 없고 오온의 무더기, 즉 색, , , , 식이라는 다발의 복합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 , 중생, 뭇삶 등과 같은 말은 인습적으로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부처님은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해도, 세상에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라고 한 것이다.

 

나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래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없다. 있다면 명칭만 있을 뿐이다. 이는 정신-물질 과정을 잘 파악하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Vism.19.20)라고 했다.

 

조건발생과 상속

 

작년의 벚꽃이 올해의 벚꽃이 아니다. 작년의 나는 올해의 나는 아니다. 그럼에도 같은 벗꽃이라고 하고 같은 나라고 하는 것은 상속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이처럼 조건을 얻은 그것만이

다음 생에 이르니 그것이

그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없이

원인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Vism.17.161)

 

 

흔히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 한다. 이는 연기법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조건(paccaya)이 연기법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이연기를 보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연기법은 조건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조건발생에 있어서 주체가 있을 수 없다. 연기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연기법은 조건발생하는 법이다. 그런데 조건발생할 때 마다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상속(相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것이 조건이 바뀌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조건의 고리로 이루어져 있을 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나인 것이다. 당연히 작년의 나와 다르고, 십년의 나와는 더욱더 다르다. 더 나아가 이전 생의 나와도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남이 아닌 것은 조건에 따라 상속된 나이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지만 그런 나는 없다. 단지 세상에서 부르기 쉽게 통용되는 명칭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 없는 것이지만 정신-물질의 과정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물질의 과정에 지나지 않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이와 같이 조건을 얻은, 뭇삶도 아니고 생명도 아닌, 물질적-비물질적 사실들이 일어나면서 다른 생으로 간다고 한다.”(Vism.17.162)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하면

 

아파트 앞 오래된 나무에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며칠 지나면 마치 눈내리듯이 흩날릴 것이다. 이에 어떤 이는 자연무상을 느낄 것이다. 자연무상을 보면서 인생무상도 생각할 것이다. 이 봄이 가면 내년 봄이 올지 기약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정에 이른 벚꽃을 보면서 슬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꽃은 피고 진다. 사람도 태어나서 죽는다. 그렇다고 끝은 아니다. 조건에 따라 상속하기 때문이다. 꽃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죽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한 자에게도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에게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면, 물질의 변화에 수반하는 의식이 출현한다. 그리고 그에게 물질의 변화에 따라 수반된 두려운 현상들이 생겨나면 그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음이 사로잡히면 곤혹해 하고 간구하고 집착하고 전율하고 공포에 떤다.”(S22.7)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물질 대신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집어넣어서 읽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물질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1)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라는 정형구로 설명된다. 이를 오온에 대입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있게 된다. 이런 유신견은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집착되어 있으면 마음이 동요하기 쉽다. 이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몸이 늙어 기능이 퇴화하면 근심을 하고 심지어 중병에 걸린 것처럼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몸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착(無着)의 안온

 

몸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근심,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몸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지 정신-물질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이 조건발생하고 상속하는 것으로 본다면 나라는 명칭이 끼여들 틈이 없다. 그래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자아는 본래 없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변화함에 따른 두려움이 발생한다. 몸이 늙는 것을 서럽게 생각하는 것도 몸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을 나의 것, 느낌을 나의 것, 지각을 나의 것, 형성을 나의 것, 의식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무착의 안온 (anupādāparitassanā)’을 갖는다고 했다.

 

벚꽃이 활짝 피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떨어질 줄 모른다. 날씨가 풀리면 눈처럼 날릴 것이다. 벚꽃이 피면 좋아하고 벚꽃이 지면 슬퍼하는 것은 벚꽃을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면 근심과 두려움을 유발한다. 이제 더 이상 아파트 앞 벚꽃에 집착하지 않는다.

 

 

2020-04-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