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선우(善友)가 왜 청정한 삶의 전부일까?

황령산산지기 2020. 4. 4. 17:39

선우(善友)가 왜 청정한 삶의 전부일까?

 

 

페이스북에서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주욱 훝어 본다. 자주보면 정든다고 말한다. 한번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이름을 자주 접하니 반가운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람이 친구일 것이다.

 

친구란 무엇일까?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친구의 조건에 대하여 도움을 주는 친구, 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같은 친구,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는 친구, 연민할 줄 아는 친구.”(D31)라고 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다. 그런 가르침 중에 우정의 가르침도 있다. 경전을 보면 네 가지 친구의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움을 주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 유익한 것을 주는 사람,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친구의 조건인 것이다. 나도 그 사람에게 이런 친구의 조건에 들어 갈까?

 

친구라 하여 현실세계에서의 친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또다른 세상이 열렸다. 이를 사이버세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도 무수하게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이버세상에도 친구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숨기고 필명으로만 소통해도 위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친구인 것이다.

 

요즘 페친, 블친, 카친이라는 말이 있다. 페이스북 친구, 블로그 친구, 카카오 친구를 말한다. 이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친구는 블친이다. 2005년 다음에 블로그가 개설된 이래 지금까지 한결같이 찾아 주는 친구들이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댓글 등으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친구이다. 사이버상에서 친구라면 단연 페친일 것이다. 페이스북 정책상 친구맺기를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역시 댓글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블친이나 페친 모두 시간 없다면 공감이나 좋아요추천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관심 보이는 사람이 친구일 것이다.

 

친구맺기에 있어서 나이도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위 네 가지 친구의 조건에 들어 맞는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친구맺기 하는데 있어서 지위고하가 문제되지 않는다. 젠더()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주는 친구가 있다. 보살펴 주고, 돌보아주고, 피난처가 되어주고, 요청했을 때 두 배로 시물을 주는 친구가 도움을 주는 친구라고 했다. 또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 같은 친구가 있다. 한결같은 친구가 있다.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지켜주고, 불행에 처했을 때에 버리지 않고, 목숨도 그를 위해 버리는 친구이다.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을까?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는 친구가 있다. 사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선한 것에 들게 하고,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게 하고, 천상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친구를 말한다. 또 연민할 줄 아는 친구가 있다. 불행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고, 행운에 대하여 기뻐하고, 비난하는 자로부터 보호해주고, 칭찬해 주는 친구를 말한다. 세상에 이런 친구가 있을까?


 

좋은 친구가 있다면 나쁜 친구도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니까야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어떤 친구를 피해야 할까? 경에서는 무엇이든 가져가기만 하는 친구, 말만 앞세우는 친구,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자, 나쁜 짓거리에 동료가 되어주는 자.”(D31)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스마트폰시대라고 하지만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리는 변한 것이 없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정신문명을 따라 갈 수 없다. 오래 전에 정신문명은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 케케묵고 낡아 빠진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담마에 대하여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1)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2)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3)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4)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5)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라고 했다.


끼리끼리 노는 것은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친구도 좋은 친구가 있으면 나쁜 친구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고 했다.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대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인정한 말이다.

 

초기불교에서 악인의 대명사는 데바닷따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데바닷따가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가?”(S14.15)라고 말했다. 데바닷따와 성향이 같은 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사악한 욕망을 지닌 자들이다.”(S14.15)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들은 지혜로운 리더를 중심으로 모일 것이다. 지혜제일이라고 일컫는 사리뿟따 존자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들이다.”(S14.15)라고 했다. 이렇게 끼리끼리 모이다 보니 신통을 지닌 자들은 목갈라나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모이고, 두타행을 하는 사람들은 깟싸빠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모였다.

 

끼리끼리 노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라고 했다.

 

선우(善友)가 왜 청정한 삶의 전부일까?

 

불교에서 좋은 친구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깔랴나밋따(kalyāamitta)라고 한다. 영어로는 ‘a good companion; honest friend’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선우(善友)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선우가 아니다. 구도의 길을 함께 간다면 좋은 친구 이상이다.

 

어느 날 아난다는 한적한 곳에서 명상하다가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됩니다.(S3.18)라고 말 했다. 아난다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약과 같아서 모두를 위해 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발이 드는 사람도 있고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르침을 설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악한 친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좋은 친구를 가지고 충고를 받아들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된다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다.

 

아난다의 선우론은 맞는 것일까? 선우와 악우 개념으로 본다면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친구가 삶의 반이라고 보는 것은 어쩌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우는 청정한 삶의 절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을 보면 다르다.

 

아난다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안전하게 조심스럽게 선우는 청정한 삶의 절반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아난다가 확신이 있었다면 삶의 전부라고 이야기했어야 할 것이다.

 

주석에서는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좋은 친구와 스승을 만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의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아난다는 이 두 가지 조건 중에서 선우와 스승만을 생각하여 삶의 절반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머지 반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의지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현되는 것일까? 의지만 믿고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밤샘 용맹정진한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에 기초하는 앎(padesañāa)은 독립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 가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다.”(Srp.I.157)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부처님 가르침에 기초하는 앎(padesañāa)’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기초하는 앎을 뜻하는 빠데사냐나(padesañāa)‘limited knowledge’를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 만의 한정된 지식으로는 부처님 가르침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라며 두 번 거듭 부정했다. 이어서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라고 말했다.

 

경전문구는 심오하다. 짤막한 구절에 놀랄만한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알려면 주석을 읽어 보아야 한다. 아쉽게도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도반전부론에 대한 주석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부처님은 청정한 삶에 있어서 도반은 전부와도 같다고 했다. 이는 개인의 독립적 의지만으로 깨달을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나는 누구인가?”라며 맹목적으로 육단심으로 용맹정진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처럼 보인다.

 

부처님은 개인의 독립적 의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승과 도반이라고 했다. 스승과 도반을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한 것이다.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아난다여,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이 있는 수행승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힐 것이다.”(S3.18)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씻겨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청정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도반이 전부와도 같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반은 스승을 포함한 도반을 말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청정한 삶, 즉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살려면 팔정도를 닦고 익히라고 했다. 이는 반복적으로 익히고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팔정도를 닦아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 그 과정은 팔정도를 닦고 익히는 것으로 실현된다. 이때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다름아닌 승가라고도 볼 수 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말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이어야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이는 서로 배우기 때문이다. 마치 바구니에 있는 감자씻기와 같은 것이다. 커다란 바구니에 감자와 물을 넣고 흔들면 서로가 서로를 씻겨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존을 벗으로 삼아, 태어나야 하는 존재가 태아남에서 벗어나고 늙어야 하는 존재가 늙음에서 벗어나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에서 벗어나며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져야하는 존재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

 

 



여기서 키워드는 세존을 벗으로 삼아(Mama hi ānanda kalyāamitta)”라는 말이다. 이 구절에 대한 두 번역서의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 좋은 친구의 경’(S3.18)에서 도반전부청정론의 가장 핵심어라고 볼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스승과 도반, 그리고 자신의 독립적 의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에 있어서 전부와도 같다고 했다. 스승과 도반이 삶의 전부와도 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독립적인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정견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정견은 다름 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이고,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팔정도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청정한 삶이 된다.

 

청정한 삶을 살려면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스승이나 도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스승과 도반이 속해 있는 승가공동체에 의지해야 한다. 스님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삼보 중의 하나인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승가공동체에 부처님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승가공동체에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그래서 세존을 벗으로 삼아청정한 삶을 살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이야말로 좋은 친구이자 도반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을 벗으로 삼아

 

오늘도 친구를 만날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19 시기에서는 넷상에서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친구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그러나 악우는 피해야 한다.

 

살아 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스마트폰 주소록에는 수백명의 전화번호가 등재되어 있다. 학교친구에서부터 거래처 고객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많이 기록해 놓았다.

 

주소록을 적극활용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전화가 왔을 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누구세요?”라는 식으로 응대하는 것은 실례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호가 아니라 이름이 뜨게 만들었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의 기본 예의에 해당될 것이다.

 

그 많은 전화번호 중에 친구는 몇명이나 될까? 경에 따르면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라고 했다. 그 많은 주소록 중에서 삶의 전부와 같은 친구는 있을까? 아니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만 있어도 성공적인 삶일 것이다.

 

삶의 전부와 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는 행운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경의 문구 중에 세존을 벗으로 삼아”(S3.18)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책장에 있는 경전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지금에 있어서는 니까야가 삶의 전부와도 같다.

 

 

2020-03-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