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황령산산지기 2020. 3. 21. 15:54

모략전도와 방편설법, 어디까지 진실인가

 

 

모략전도라는 것이 있다. 신천지에서 사용하는 전도방식을 말한다. 거짓으로 사람을 설득해서 신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모략전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제 밤 피디수첩에서는 신천지2탄으로서 모략전도의 문제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모략이라는 말은 부정적이고 비도덕적 용어이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남을 해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속임수로 남을 해롭게 함.”이라도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략이라는 말이 바이블에 등정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피디수첩에서는 이것 또한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분의 모략(거짓말)이 놀랍고 지혜가 크시다.”(이사여 28:29)라는 바이블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과정이 나빠도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일까? 신천지의 모략전도가 그런 것 같다. 전도대상에게 접근하여 거짓으로 말한 다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신천지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비록 거짓말을 하긴 하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면 문제없다는 것이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부로 거짓말로

 

신천지의 모략전도를 보고서 불교의 방편설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모략과 방편은 다른 말이긴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똑같다. 그렇다면 왜 방편이 거짓말일까? 이는 법화경 방편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시방세계는

1승법만 있을 뿐

2, 3승 없으니

방편말은 버릴지니

일부러 거짓말로

중생 인도한 것이다.”(법화경, 방편품)

 

 



법화경에서는 일불승만 진실이고 이불승이나 삼불승은 방편이라고 했다. 여기서 이불승은 보살승을 말하고, 삼불승은 성문승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중생들의 근기가 너무 낮아서 알아들을 수 없을까 보아서 알기 쉬운 말로 설법했는데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불자라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처님도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진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처님이 45년동안 설한 8만 이상 되는 법문이 모두 거짓말, 즉 방편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라면 이런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면서 또 다른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비밀스런 가르침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51)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권(師券)은 스승의 주먹이라 하여 비밀스런 가르침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외도의 스승은 젊었을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최후의 시간에 죽음의 침상 위에 누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제자에게 말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이것을 말할 것이다.”라며 주먹을 쥐지 않았다.  비밀로 되어 정해진 어떠한 것도 없음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구분교로 설한 가르침 외에 다른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이러한 법은 부처님의 비밀한 법이라 하여 공개되지 않은 가르침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그 뜻이 이해하기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내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 법을 설하지만, 이법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능히 이해할 없는 것이니,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느니라.”(법화경 방편품)라고 했다.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비밀스런 가르침을 설하겠다고 했다.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모두 방편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대승에서는 부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능가경에서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라는 문구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이띠붓따까(如是語經)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It.121)

 

 

이와 같은 말은 능가경과 정반대이다. 부처님은 처음 깨달은 이후 열반에 들 때까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로 말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그 사이에 가르친 일체의 경과 게송 등의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부처님의 말씀은 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부수고,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이,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다.(ItA.II.190)라고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이 설한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분교(九分敎)라고 말한다. 이는  ,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이렇게 아홉 가지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이런 구분교에 대하여 털 끝만큼도 잘못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구분교의 가르침을 단지 방편으로 여겨서 어떤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선언할 때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했다. 이를 아눗따라삼마삼보디라고 한다. 이 말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업는 지극히 원만하고 지극히 올바른 깨달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언어적 분별에 따른 방편이라 하여 어떤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완전한 것이고 덜 완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쐐기를 박는 듯한 말이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It.121)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에 깨달은 것과 열반의 밤에 든 그날에 이르기까지 깨달은 것은 똑 같음 것임을 말한다. 어떤 비밀스런 가르침이 없음을 말한다.

 

화택의 비유

 

법화경에서는 일불승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화택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억만장자의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들이 불난줄도 모르고 장남감에 눈이 팔려 있다. 장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다.


장자는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법화경 비유품)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 말에 솔깃하여 아이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항의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약속한 약속한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 보다 더 크고 화려한 백우의 수레를 전부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아이들이 만족했다는 것이 화택유이다.


그래서 은근하게 방편으로 여러 자식들에게, 불타는 집에서 화재의 난을 면케 하는 보배로 된 큰 수레를 주듯이, 여래께서도 또한 그와 같아서 비록 힘과 두려움 없음이 있지만, 쓰지 아니하시고, 다만 지혜와 방편으로써 삼계의 불타는 집에서 중생들을 제도하시려고, 3승인 성문-연각-벽지불-불승을 설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법화경 비유품) 라고 했다.

 

법화경 화택유를 보면 신천지에서 말하는 모략전도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거짓말로 회유하여 신도를 만들었을 때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과 매우 유사하다. 집에 불이 나서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으니 좋은 것을 주겠다고 회유하는 것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과정은 옳지 않아도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일까?

 

마치 특허품을 보는 것 같은

 

회사에서 전자제품을 개발했다. 하드웨어 엔지니어로서 이십년 살았다. 처음 큰 회사에 입사 했을 때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런데 개발보다는 일반잡무가 더 많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 보다 책상에 앉아서 서류작업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특허출원이다. 연구원에게는 일년에 몇 건씩 의무적 출원이 있었다. 내지 못하면 점수가 깍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내야 했다. 그래서 특허사무소 사람을 불러서 출원방법에 대하여 교육을 받기도 했다.

 

특허출원하는데도 요령이 있다. 그것은 비교하는 것이다. 이전 것과 비교하여 얼마나 개선 되었는지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과 이후를 비교표 작성하듯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특허도 기존 것을 바탕으로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기존것과 차별화 했을 때 특허로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것을 비판하고 새것의 장점을 말해야 한다. 대승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승경전을 보면 기존 불교를 비판한 것이 많다. 때로는 비난이나 비방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불승은 진실이고 성문승과 같은 삼승은 방편이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일불승사상을 구현해 놓은 것으로 마치 특허출원품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법화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일불승이 진실이라고 하는데 딱히 집히지 않는다. 다만 방편품에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하여 개시오입을 설명해 놓은 구절이 있다.

 

일대사인연은 개시오입으로 설명된다. 부처님들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에 대하여 1)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청정케 하려고 출현하시고, 2)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는()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고, 3)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는()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고, 4)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는() 연고로 세상에 출현했느니라.”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도 잘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무엇인가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잡히지 않는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처럼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등으로 논리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인터넷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다. 법화경에 나오는 부처님에 대하여 아득한 옛날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이른바 구원불로 나타난다.”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구원불로서 부처님은 어떤 개념일까까?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아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전부터 부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열반의 모습을 보 준 것이라고 했다.


이는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그러므로 여래는 비록 멸도하지 않지만 멸도한다고 했느니라.”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기존 전통불교와는 다른 것이고 차별화된 것이다. 마치 특허품을 보는 것 같다.

 

목사의 환희

 

법화경은 참으로 놀라운 경전이다.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과는 완전히 다른 불교경전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부처님도 니까야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완전히 다르다.


 열반에 들지도 않았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원주의는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에도 없고 무상, , 무아라는 삼법인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목사는 모두 이미 성불하였다(皆已成佛道)’라는 법화경의 핵심사상에 대하여 이렇게 감탄했다.

 

 

그런데 이 분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환희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들이 강론한 이 법화경의 진리가 정확하게 기독교의 특히 내가 20년 동안 외쳐온 복음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 놀라운 진리의 선언을 듣다, 곽현영목사)

 

 

곽현영 목사는 이시대의 강백이라 일컫는 무비스님 등의 강론을 듣고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진리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완전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모두 이미 성불하였다(皆已成佛道)”라는 구절이라고 했다.


이 말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마음 산란한 이도 탑묘 중에 들어가서 나무물 한 번에 모두 다 성불했고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이성불도는 바이블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기독교의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맥을 같이한다.”라고 했다.

 

개신교에서는 이단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그들의 교리에 벗어난 것이 있으면 이단으로 간주하여 처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불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없다. 불교에서는 그 대신 진화론적 관점으로 본다. 불교도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시대에 맞는 사조가 유행하고 시대에 적합한 경전이 편찬되는 것이다. 이를 불교의 발전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이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법화경을 보면 몇몇 사상을 보면 오늘날 유일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화경에서는 부처의 생명이 영원하다고 하여 부처님을 구원불로 보고 있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영원주의와 다름없다. 더구나 개이성불도라고 하여 부처의 이름만 불러도 성불한다고 보는 것은 타력신앙이다.


이와 같은 타력신앙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중생이 여러 가지로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노라.”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기독교에서 주의 이름만 불러도 구원한다고 보는 것과 일치한다.

 

법화경과 복음서는 여로 모로 유사한 면이 많다. 그래서일까 민희식선생은 예수복음서에 대하여 법화경의 이스라엘판이라고 했다. 법화경은 기원전후에 성립되었는데 신약에서 인용된 글들이 법화경과 일치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이 바이블 복음서에 영향을 주었는지, 반대로 복음서가 법화경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

 

법화경에 대하여 두 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불교사적으로 보았을 때 법화경은 시대가 요구하는 산물로서 불교의 진화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반대로 법화경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교이단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다. 심지어 정반대의 것도 있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근본가르침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 시대가 요청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망상이 일어나는 원리

 

초기경전을 읽다보면 놀라운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오늘날 불교가 정다른 방향으로 갈 것을 염려해서 예언해 놓은 것 같은 문구를 말한다. 앞서 언급된 사권이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와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맛지마니까에는 망상에 대한 것이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가장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근본법문에 대한 경’(M1)이다. 경에 따르면 모두 23가지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열반을 열반으로 여기고, 열반을 열반으로 여기고 나서, 열반을 생각하고 열반 가운데 생각하고 열반으로부터 생각하며 열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열반에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M1.27)

 


보통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도 내것이고 마음도 내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면 오온은 내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내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망상때문이라고 본다. 이를 다른 말로 인식론적 왜곡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식론적 왜곡은 갈애, 자만, 견해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세 가지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渴愛)이고, 이것은 나(自慢)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見解)이다.”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공통적으로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오온에서 발생되는 모든 것을 내것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으로 보았을 때 망상이 생겨난다. 경에서는 땅을 비롯하여 창조주, 하느님, 심지어 열반에 이르기까지 나의 것, , 나의 자아로 보았을 때 망상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의 창조주가 되고 나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열반마저 나의 열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열반에 즐거워한다.”(M1)라고 했다. 이것이 망상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에서는 망상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했을 때, 나의 것은 갈애를 말하는데, 갈애는 욕망과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고 했을 때, 나는 자만을 말하는데, 자만은 욕망과 탐욕을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에 따라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자라고 했을 때, 나의 자아는 견해를 말하는데, 견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명칭에 집착하는 것은 갈애이고 자만이고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창조주에 대하여 창조주는 나의 것이고, 창조주는 나이고, 창조주는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도 개념이고 열반도 개념이다.

 

하느님이나 열반에 대하여 나의 것, , 나의 자아라고 하여 나가 개입되어 있는 한 모두 개념이 된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이런 개념을 즐긴다고 했다. 하느님, 구원불도 개념이다. 명칭에 집착하는 것은 망상이다.

 

모략과 방편, 어디까지 진실인가

 

니까야에도 방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말다툼하고 언쟁을 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를지도 모른다.”(M5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알아듣기 쉽게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을 방편설법 또는 대기설법(pariyāya-desanā)이라고 한다. 반면에 중생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비유나 대기설법 없이 법을 있는 그대로 설한 것을 아비담마라고 한다.

 

방편 또는 대기설법은 중생의 기질과 근기를 고려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비유와 신화와 전설 등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방편설의 경우 중생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는 배제 되어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모략이나 거짓말로 설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니까야에서는 방편이라는 말 보다는 대기설법이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모략전도와 방편설법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공통적으로 거짓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과정이야 어쨋듣간에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보는 것 때문일 것이다. 신천지에서 사람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화택의 비유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좋은 결과만 나온다면 모략전술이나 방편을 써도 무방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거짓말을 하면 불선업을 짓는다. 기독교에서도 십계명으로 금하고 있고, 불교에서도 오계로서 금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 그 불선업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진다고 했다. 당장 이 세상에서도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서 비도덕적인 삶을 살면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모략전도라는 이름으로, 방편설법이라는 말로 거짓말을 한다면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방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방편이라는 말이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쉽고 편하게 치룰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말이라는 뜻도 있다. 모략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천지에서 말하는 모략과 법화경에서 말하는 방편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도 방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보이지 않는다. 신화적인 이야기는 있지만 이는 속이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에서 말하는 방편은 대기설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략, 방편, 대기설법은 다른 것이다.

 

 

2020-03-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