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황령산산지기 2020. 3. 21. 15:51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고요한 새벽이다. 모두 다 잠든 고요한 새벽을 사랑한다. 새벽 3시대가 되면 이른 시간이라 할지 모르지만 선원에서는 하루일과가 시작 되는 때이다. 새벽 3시 반에 기상하여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첫 좌선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새벽에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다시 잠 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헤맬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잠이 아닌 선잠을 잘 때에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생각지도 못한 꿈의 세계를 경험한다. 수년전에는 꿈을 분석하고자 노력했다. 융의 분석심리학 책을 읽고서 꿈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 두었다.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니까냐에는 꿈 이야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아이디어가 샘 솟는 듯하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를 니까야문구와 연계하여 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 자판을 톡톡친다.

 

고요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새벽의 고요함에서 보는 것처럼 고요함이야말로 최대 축복이다. 좌선할 때 고요함은 기쁨이고 안락이다. 마음이 착 가라 앉아 있을 때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낀다. 그것은 마음의 오염원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탁할 때가 있다. 욕망의 밤이 되었을 때, 분노의 밤이 되었을 때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기 쉽다.

 

안면방해죄가 있다. 편안한 잠을 방해하는 죄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죄가 실제로 있는 것일까? 요즘은 검색의 시대이다. 검색해 보니 관련법이 있다. 층간소음으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될 때 소송하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안면방해죄가 국민정서법처럼 단지 용어로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있는 것이다.

 

층간소음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될 때 스트레스받을 것이다. 미움을 넘어 증오로 발전되고 혐오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때 고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해 줄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상대방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괴롭다.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일까? 이런 말이 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다.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게송을 보면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불선법으로 불선법을 물리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부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화두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독으로서 제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위험이 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쓰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는 불선법을 놓아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미움, 증오, 혐오, 원한이 일어났을 때 그치게 하는 방법은 놓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오래된 진리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가르침임에도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놓아버린다거나 여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삶의 지혜를 니까야에서 찾고자 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5.161)

 

 

어떤 사람에게 미움, 증오, 혐오, 원한이 일어났을 때, 한마디로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5.161)라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불선법만 증장하기 때문에 사띠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사띠해야 할까? 수행자라면 화가 난 그 마음을 사띠해야 할 것이다. 사념처에서 마음관찰하는 심념처를 말한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화난 마음은 이전마음이 된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화난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화난마음은 바로 이전 마음이 되어 더 이상 화난 마음은 아니다. 그런데 심념처에서는 여기서 그쳐서 안된다는 것이다. 화난 마음을 알아차린 마음을 화난 마음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더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한다고 말한다. 알아차린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 알아차려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념처를 마음보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선가 용어중에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다. 내려놓기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도 끊임없이 내려 놓으라고 했다. 어떻게 내려 놓는 것일까? 방법은 이뭐꼬?’하며 내려 놓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고?”라며 의심하는 것이다.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듯이, 의심이 불선법이기는 하지만 작은의심으로서 큰 의심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누구나 글을 올려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게시판이라면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불로그나 페이스북은 사적인 영역이다. 댓글 또는 좋아요추천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논쟁의 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도발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자극하는 것이다. 한두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사실상 스토커나 다름없다. 그런 글은 삭제해도 무방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 차단조치할 수 있다. 마치 인내력 테스트하듯이 깐죽거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무시하는 것이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Dhp.134)

 

 

언저리가 잘리고 깨어져 땅 위에 놓인 놋쇠그릇이 있다. 손이나 발이나 막대기로 차도 동요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을 것이다. 마치 깨진 종과 같다. 깨진 종이 땅바닥에 있을 때 막대기로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의 어떤 비난에도 일체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풀 수 없다. 원한을 그치는 것만이 원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전쟁광들은 증오심과 적개심을 부추긴다. 전쟁은 증오심과 적개심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선거철에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혐오이다. 코러나사태로 인하여 중국을 혐오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실체도 없는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전쟁광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누구나 승리하기를 바란다. 상대를 굴복시켰을 때 패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법구경에서는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Dhp.201)라고 했다. 승리하는 것이 반드시 좋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승리는 원한을 부르기 때문이다. 패자는 비통해 할 것이다. 패자는 나는 언젠가 적을 패배하게 할 것이다.”라며 분노로 잠 못 이룰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내려 놓는 것이다. 그래서 후송을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Dhp.201)라고 했다. 잠을 잘 자려면 원한을 내려 놓아야 함을 말한다.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려고 하면 원한을 부른다. 상대방이 도발해 올 때 땅바닥의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화를 낸다고 하여 같이 화를 낸다면 개싸움이 되어 버린다. 현명한 자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7.3)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화를 낸다. 맞받아치면 상대방은 더욱더 화를 낼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이기 쉽다. 패자는 분노와 함께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내려 놓아야 한다. 이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화를 냈다고 하여 화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깨진 종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의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자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S7.3)

 

 

사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사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분노하는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더 이상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둘 다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로 윈윈하는 것이다. 양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이를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2020-03-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