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황령산산지기 2019. 8. 25. 17:13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붓다
 
세상은 죽음의 두려움에 차 있지만 나에게 그것은 지복이다.―나낙 구루
(구루는 흰두교 수행 스승으로서 불교의 선사와 같다)
 
생명이 시작되면 발사된 총알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죽게 되어 있다.
이것은 좋건 싫건 불가피하여 우리는 자연적인 이 현상을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실은 빨리 받아들일수록 인생을 더 훌륭한 목적으로 영위해 갈 수 있다.

죽음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죽음에 대한 그릇된 견해(邪見)가 장애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운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도사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서운 것이다.

우리의 수명은 끊임없이 작동하는 생물학적 시계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조만간 이 시계가 정지하면 단 몇 초라도 더 벌기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때가 되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연과정을 맞을 대비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리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항상 큰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임해서야 죽음은 삶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군요.
극소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내가 겪은 바로는 오직 한 사람―
어떤 부인이 누이동생에게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악행을 범한 부인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고
한 수간호원이 말했다. ‘

인생 여정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남자나 여자나 무언가 기이하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더군요.
모든 두려움, 공포가 사라집니다. 죽음은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의 눈동자에 드리운 신비롭고 행복한 표정을 저는 종종 보았지요.
그것은 대자연의 미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월리암 오슬러(William Osler, 영국의 의학자)경은 유명한 내과의사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의 많은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에의 굴복
인간의 성, 인종, 신조에 관계없이 죽음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도피방법이 없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과정이다.
우리는 죽음의 불가피성에 과감하게 대면하는 경우가 별로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풀려나지 않는 한 인생은 자유롭지 못하다.
간디(Gandhi)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헌옷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를 잃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붓다 당시 유명한 불교도인 비사카(Visakha)라는 부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귀여운 손자를 잃은 그녀는 붓다를 찾아가 슬픔을 이길 좋은 말씀을 청했다.
 
“비사카여, 그대는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 수만큼 많은 아들과 손자를 갖기를 바라는가?”라는 붓다의 질문에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 아이들이 매일 몇이나 죽는가?”
“여러 아이들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마을의 아이들이 죽어 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사카여, 그런 경우 그대는 죽은 아이 모두 때문에 울겠느냐?
사랑하는 사람 백 명이 있으면 백 번의 슬픔을 가지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자는 슬픔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슬픔에서 해방된 사람이라 하느니라.”
 
집착을 가지면 그것을 잃을 때 슬픔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대비를 해야 한다.
생애 대한 집착은 때로는 죽음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을 조장한다.
사람이란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도 모험은 하려하지 않으며
소중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세상을
병이나 사고로 끝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산다.

죽음이 확실하다고 것을 알고 나면
영혼이 천상에서 안정과 불멸로 살아남기를 희망하고 기도한다.
이런 믿음은 존재가 영속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갈망에 기초하고 있다.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정신적 압박은 사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인생의 실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데 기인한다.
이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중대한 육체적 질병을 얻게 된다.
병에 대한 걱정과 실망은 분명히 병세를 악화시킨다.

병이란 원하는 대로 선택해 병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도 적당하고 형편이 좋은 때를 택해 죽을 수 없다.
그러나 병과 죽음을 두려움 없이 대하느냐의 여부는 분명히 선택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시체를 보고 무서워하나 엄밀히 말하면 사실 산 사람이 시체보다 더 위험하다.
시체는 위해를 주지 않으나 산 사람은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심지어 살해의 의도까지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시체를 보고 무서워하거나 겁에 질리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출생과 사망의 의미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출생과 사망은 같은 실끈의 양쪽 끝 부분과 같다.
한 쪽 끝은 그대로 두고 다른 쪽 끝을 치워버릴 수 없다.
출생과 사망의 비밀은 아주 간단하다.
마음과 물질 (또는 다섯 가지 집합체(五蘊))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출생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집합체의 출현을 생명이라 부르고 그 해체를 사망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재결합하는 것을 재생이라 하며
열반의 지복을 얻기까지 재생의 순환이 반복된다.

‘죽음’이라 부르는 이 단순하고 자연적인 현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죽음은 존재가 해체되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믿음, ‘
영혼’이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믿음,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영혼의 무한한 방황이라는 주장도 있다.
불교에서 죽음은 무상한 현상의 일시적 종말 외에 다름이 아니다.
소위‘존재’라는 것의 종말이 아니다.
 
인간의 운명으로 주어진 죽음의 역할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귀천과 빈부,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모든 인간이 최후로 쉴 곳은 6자 땅속의 관 아니면 유골함이며
혹은 재가 되어 바다와 땅에 뿌려진다.
 
인간은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무지로 울고 슬퍼하며 때로는 웃다가 다시 운다.
인생의 참된 본질을 알기만 하면 합성된 일체는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자유롭기를―해탈하기를―바라게 된다.
조건 발생적 세속에서 해탈하기까지, 해탈하지 않으면 죽음은 수 없이 반복되며
이 점에서 죽음의 역할은 아주 분명하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생사윤회를 극복할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평화로운 죽음
일생동안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나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를 사람들은 바라지만
이를 확실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예를 들면 가족, 사랑하는 사람, 친구, 국가에 대한 책무와 종교와 운명에 따르는 책무를 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고 있을까?
이 책무들 중 어느 하나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신들도 맞게 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먼저 극복해야할 일이다.
흐르는 세월을 하찮은 일로 보내는 사람은 인생의 종말에 이르러 후회하게 된다.
 
신분이 무엇이든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전생에서 본인에게나 이 세상에 아무런 이익이 없었던 것처럼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 있고 평화로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의 책무에 소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젠가는 죽음이 없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인류의 안녕과 행복에 봉사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기리는 위인은 자신을 위해 일한 사람보다 인류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인간의 육신은 재로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영향력과 활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붓다는 말했다.

위인들의 모범적인 활동으로 남긴 탁월한 업적은 이 시대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있어
그들은 가고 없어도 우리의 인생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그들은 인류에 공헌한 값진 봉사의 증거로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흐르는 강물의 단 한 방울의 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물줄기의 적은 부분이나마 기꺼이 공헌하려 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삶이란 선행을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서
악행을 피하고 해탈을 얻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죽습니다 :
데이비드 모리스(David Morris)는 유명한 서양 불교학자로서 85세에 타계했다.
그의 타계 직후 한 현역작가는
타계하기 전 미리 써놓고 그가 죽으면 곧 우송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보이는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오늘 죽었다는 것을 선생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가 병고의 괴로움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을 선생께서는 아셨기에 안심하실 것입니다.
둘째, 나는 불교신자이기에 오계를 성실히 지켰고
        그 결과 다음 생은 불행한 것이 아닐 것임을 선생님께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죽음은 생의 종말이 아니고 윤회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생의 시작이다.
선행을 하면 더 좋은 내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생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마음속의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우리는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을 많이 보면서도
우리도 조만간 그와 같은 죽음의 희생이 된다는 것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차라리 역설적이다.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의 실제임에도 소름끼치는 것으로 여겨 생각하기를 꺼린다.
죽음은 나와는 먼 것으로 걱정할 것 없다는 망상에 빠져 가능한 한 이에 대한 생각을 멀리하려 한다.
사실에 용감하게 맞서 실재를 맞아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실질적인 사건이며 실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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