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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무명을 대죄라 하는가

황령산산지기 2018. 6. 23. 08:25

 

왜 무명을 대죄라 하는가

 

 

6 8일은 니까야강독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5월 한달간은 전재성박사의 개인일정으로 인하여 방학했습니다. 한달에 두 번 모이는 모임에서 두 번 빠지게 된 셈입니다.

 

강독모임을 앞두고 서둘렀습니다. 마무리 해야 할 일을 빨리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는 일은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기 일쑤입니다. 어제 자료 넘겨 주고서는 오늘까지 해내라고 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공교롭게도 강독모임 있는 날 일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보냈습니다. 속도전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트웍을 하고 또한편으로는 전화와 메일을 주고 받는 등 초분을 다투었습니다. 납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해내야 합니다. 초치기 한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삼송역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명학역에서 전철을 기다릴 때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한가지 더 해달라는 것입니다. 문자를 하나 추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략난감했습니다. 고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 교정본이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다시 전철역으로 되돌아 오니 그 사이에 20여분이 흘러갔습니다. 이날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처음으로 30분 이상 지각했습니다.

 

탐짐치 삼독은 잘못이다

 

6월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탐진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를 독송했습니다.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8)’입니다. 이교도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어떤 구별이나 차별이 있는지에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해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rāgo kho āvuso appasāvajjo dandhavirāgī,

doso mahāsāvajjo khippavirāgī,

moho mahāsāvajjo dandhavirāgī'ti.

 

벗들이여, 탐욕은 작은 잘못이지만 극복하기 어렵고,

분노는 커다란 잘못이만 극복하기 쉽고,

어리석음은 커다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극복하기 어렵다.”(A3.68)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탐, , 치를 위와 같이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이 경이 유일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경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가르침은 탐, , 치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무명이 대죄라 하는데

 

법문을 들을 때 종종 무명이 대죄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알고 저지른 것 보다 모르고 저지른 죄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사회적 통념을 뒤집어 엎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 했을 때 알고 지은 죄가 모르고 지은 죄보다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크다고 했습니다. 모르면 더 큰 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경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잘못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잘못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밧자(vajja)’를 번역한 말입니다. 밧자는 영어로 ‘fault’의 뜻입니다. 한역으로는 , 罪過로 번역됩니다. 초불연에서는 허물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죄가 됩니다.

 

어리석음이라는 말은 무명과도 동의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무명이 대죄이다.”라는 말은 성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비롯된 말임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 한 걸까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케이블채널에서 본 영화 대사입니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 했지만 살아 남은 자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스무 살도 안되는 앳된 처녀입니다. 모두 떠나버린 텅 빈 마을에서 혼자 살아 갑니다. 그때 중년의 사내가 등장합니다. 용케 살아남은 엔지니어 입니다. 그런데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을에서 둘이 돕고 살아갑니다.

 

어느 날 처녀는 술에 취했습니다. 본능을 절제 하지 못합니다. 처녀는“내가 잘못 한 걸까요?”라고 말합니다. 이에 남자는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합니다.

 

남녀관계는 미묘합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남자는 처녀에게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에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됩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중년 남자는 철모르는 처녀를 설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갔습니다. 영화 ‘최후의 Z(2015)’에서 본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마치 불교적 지혜를 보는 듯합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일을 저질렀을 때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클 것입니다. 이를 짧은 행복 긴 고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욕망은 잘못이고 죄임에 틀림 없습니다.

 

탐욕과 분노는 어느 때 드러나는가?

 

경에 따르면 가장 무거운 죄가 어리석음입니다. 가장 낮은 잘못은 탐욕이고, 그 다음은 성냄입니다. 그런데 탐, ,   세 가지 잘못 중에서 가장 드러나기 쉬운 것이 성냄입니다. 다음으로 탐욕입니다.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사람의 인품을 알려면 성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자라도 분노를 표출한다면 성냄이 소멸되지 않은 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냄과 관련하여 꼭지에는 꿀이고 뿌리에는 독이라 하는데 이는 분노의 가학성(加虐性)을 말합니다. 분노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S1.71) 라 하는 것에서 근거합니다.

 

탐욕은 일반적으로 밥 먹을 때 드러난다고 합니다. 젓가락 놀리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탐욕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경에서는 어리석음은 잘못이라 했습니다. 왜 어리석음이 잘못인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섬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섬에는 해안선이 있습니다. 큰 섬일수록 해안선이 길고 복잡합니다. 작은 섬은 짧고 단순합니다. 여기서 섬은 그 사람의 지식이나 인품 등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역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경계에 부딪쳤을 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섬의 해안선으로 비유했습니다. 땅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섬을 작게 만든 사람도 있고 섬을 크게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해안선 길이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재성 박사는 무지의 해안선을 만듭니다.”라 했습니다. 섬을 크게 만들어 해안선이 길수록 무지도 따라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배울수록 무지의 해안선은 넓어집니다.”라 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으면 모르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섬을 크게 만들어 무지의 해안선이 길어질수록 이와 비례하여 자신이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을 작게 만든 자는 무지의 해안선이 짧기 때문에, 조금 아는 것 가지고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위합니다. 이런 자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고 말한 것이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우리속담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조금 아는 자가 세상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또 우리속담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 합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겸손해짐을 말합니다. 이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어리석음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Yo bālo maññati bālya,         

paṇḍito vā 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 ti vuccati.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릅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줄 알면 그는 더 이상 무지한 자가 아니듯이, 어리석은 자가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면 그는 더 이상 어석은 자가 아니라 현명한 자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모릅니다.

 

오욕락을 즐기는 자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자신이 얼마나 화를 잘내는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는 자신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10, 20, 30, 평생 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술이 좋아 술독에 빠져 평생 살 수도 있습니다. 그는 술 마시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색에 빠져 평생 살 수 있습니다. 음행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강변할지 모릅니다. 조물주가 남녀를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이런 강변이라면 술은 마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눈이 있으면 보고 즐기라고 있는 것이고, 귀가 있으면 듣고 즐기라고 있는 것이라 강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탐진치를 극복하는 방법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제제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을 설하였을 때 그것으로 그쳤다면 비관론자로 간주되어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이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굴러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탐, , 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 , 치가 잘못이라면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벗들이여, 그런데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욕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탐욕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인가? 그 아름다운 인상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욕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탐욕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 이러한 조건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욕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탐욕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이다.”(A3.68)

 

여기서 키워드는 아름다운 인상(subhanimitta)’입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형상을 보았을 때 거머쥐려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탐욕이 생겨남을 말합니다. 이런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고통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하는 것(ayoniso manasikaroto)”라 했습니다.

 

잘못이나 죄악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탐욕의 경우에는 아름다운 인상을 예로 들었고, 성냄에서는 정반대로 혐오스런 인상(Paighanimitta)’을 예로 들었습니다. 어리석음에서는 단지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ayoniso manasikaroto)’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해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삼독이라 합니다. 이를 경에서는 잘못이라 했는데 죄라는 말도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탐진치는 삼독일뿐만 아니라 세 가지 잘못이고 또 세 가지 죄도 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yoniso manasikara: 如理作意)이라 합니다.

 

 

2018-06-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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