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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황령산산지기 2018. 6. 9. 07:32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영화를 보면 의외로 건질 것이 많습니다. 줄거리도 좋고 장면도 좋지만 배우 입에서 튀어 나오는 문구가 심오할 때가 있습니다. 이른바 명대사라 하여 별도로 유통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주로 케이블채널로 영화를 보는데 인상에 남는 대사를 스마트폰 메모앱에 기억해 둡니다. 나중에 써 먹을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명구절이 있는데

 

책을 읽을 때도 명구절이 있습니다. 전혀 보지 못했던 대사를 접했을 때 흔히 하는 말로 건졌다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빠알리 삼장을 보면 온통 건져야 할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Iminā pana ñāena samannāgato vipassako buddhasāsane laddhassāso laddhapatiṭṭho niyatagatiko cūasotāpanno nāma hoti.

 

그리고 이러한 앎을 갖춘 통찰수행자는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자, 발판을 얻은 자, 운명이 정취된 자, 작은 흐름에 든 자라고 불린다.”(Vism.19.27)

 

 




청정도론 19장 의혹의 극복에 대한 청정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구절입니다. 삼세에 대한 모든 의혹이 해소되었을 때 그를 안식을 얻은 자(laddhassāso), 발판을 얻은 자(laddhapatiṭṭho), 운명이 정취된 자(niyatagatiko), 작은 흐름에 든 자(cūasotāpanno)라고 네 가지를 열거 했습니다.

 

작은 흐름에 든 자(cūasotāpanna)

 

청정도론은 칠청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혹의 극복에 대한 청정 (Kakhāvitaraavisuddhi: 度疑淸淨)은 칠청정에서 계청정, 심청정, 견청정에 이어 네 번째 단계입니다. 네 번째인 도의청정 단계에 이르렀을 때 안식을 얻은 자 등으로 네 가지 예를 들었는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작은 흐름에 든 자(cūasotāpanna)’입니다.

 

작은 흐름에 든 자를 쭐라소따빤나(cūasotāpanna)라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작은 수다원입니다. 쭐라라는 말이  ‘small; minor’의 뜻이고, 소따빤나는 흐름에 든 자를 뜻하는 데 수다원을 말합니다. 따라서 쭐라소따빤나는 작은 흐름에 든 자 또는 작은 수다원이라 합니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그 길로 죽 가기만 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서 부처님의 교법이 성취됩니다. 일곱생과 관련하여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생 이내에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는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230)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 즉 수다원이 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tn.235)라 하여 완전한 열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띠붓다까와 상윳따니까야에 그 사람은 최상으로 일곱 번 유전하다가 일체의 결박이 부서지는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It.17, S15.10)라는 구절로도 알 수 알 수 있습니다.

 

수다원의 조건에 대하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Stn.231)라 하여 세 가지 결박에서 풀려 나면 수다원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다원이 되면 완전한 열반에 이르기 까지 최대 일곱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학습계율의 경(A3.86)’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1) 칠유자(七有者)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최대한 일곱 번 다시 태어나는 님으로 최대 일곱 번 신들이나 인간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2) 가가자(家家者)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고귀한 가문에서 고귀한 가문으로 태어나는 님으로 두 번이나 세 번 고귀한 가문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3) 일종자(一種者)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다시 한번 태어나는 님으로 오직 인간으로 한번 태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4) 일래자(一來者)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감소시켜 한번 돌아오는 님으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A3.86)

 

 

경에 따르면 일곱생 이내에도 완전한 열반이 가능합니다. 공통적으로 한번은 더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칠유자(七有者)의 경우 최장 일곱생입니다. 칠유자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러한 자들은 윤회를 지향하고 윤회를 즐기다 비로소 여섯 천계를 정화하고 색구경천에 머물며 열반에 들것이다.”(Srp.III.238)라 되어 있습니다. 일곱생까지 가는 것은 윤회를 즐기는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가자(家家者)의 경우 환경이 좋아야 함을 말합니다. 이는 주석에서 흐름에 든 님으로두 번이나 세 번 훌륭한 가문에 유윤회하고 나서 괴로움의 소멸을 이룬다면 훌륭한 가문을 전전하는 자이다.”라 했기 때문입니다. 양가집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잘 좋은 조건에서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은 집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가르침이 살아 있는 불국토에 태어나는 것도 좋은 조건이 됩니다.

 

일종자(一種者)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흐름에 든 님으로서 한번 더 자신의 개체를 태어나게 해서 거룩한 경지(阿羅漢)을 얻는다면, 이것이 한번 태어나는 님(一種者)이다.”라 했습니다. 수다원으로 죽어서 한번 더 태어나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생에서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라는 세 개의 과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일래자의 경우 사다함으로 죽어서 사다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이르는 자를 말합니다. 네 가지 경우에 있어서 최단코스입니다. 그런데 이들 네 가지 경우를 보면 공통적으로 한번 더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생에서 수다원이 되었다고 하여 이번생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길은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완전한 열반에 들어 나고 죽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수다원이 되는 것입니다. 수다원이 되는 조건으로 유신견과 의심과 계금취견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유신견(sakkāyadiṭṭhi)입니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근처에도 들지 못하고 열반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도의청정(度疑淸淨)

 

쭐라 소따빤나를 작은 수다원이라 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度疑淸淨)에 이른 자에 대하여 부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자, 발판을 얻은 자, 운명이 정취된 자, 작은 흐름에 든 자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수다원이 되기 전에 예비단계가 갖추어진 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칠청정의 네 번째 단계인 도의청정(度疑淸淨)은 무엇을 말할까?

 

청정도론에서 도의청정(度疑淸淨)에 대한 부분은 매우 짧습니다. 불과 27절 밖에 되지 않고 페이지로 14페이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의심 내지 의혹을 건너야 청정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명색, 즉 정신-물질의 작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론으로 니까야를 읽으면

 

어떤 학자는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정신-물질로 파악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파악했을 때 모든 것이 개념화 되어 있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파악합니다. 오온에서 물질도 인식된 것으로 파악합니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유식론처럼 일체유심조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용수의 중관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중론으로 니까야를 읽으면 부처님 가르침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보았을 때 문자나 말로 이야기 되는 것은 모두 모순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중론에 입각하여 초기경전을 재해석하고 있는 L교수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논장이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맹비난 합니다.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이론이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라고 각종 강연이나 저서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론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면 가르침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불교학자 L교수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실려 있는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로 시작 되는 15가지 의문에 대하여 놀라운 해석을 합니다. L교수의 유튜브동영상 강좌에 따르면 “실제로 부처님은 불경속에서 우리들이 윤회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라며 15가지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이 윤회를 부정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정도론 도의청정(度疑淸淨)에서도 삼세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15가지 의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L교수가 말한 것처럼 윤회가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논장을 읽어 보지도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경전을 해석했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라 봅니다.

 

정신-물질의 작용만 있을 뿐

 

우리는 항상 나를 세웁니다. 그러나 나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명칭으로만 있습니다. 삼세에 걸쳐서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심 했을 때 아마 평생가도 나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청정도론 도의청정입니다.

 

청정도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의 부정입니다. 나라는 것은 인습적이고 관습적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명칭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있다면 정신-물질 작용만 있을 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명색조건의 파악1’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명색은 원인이 아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상태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주재자 등이 원인인 것도 아니다. 명색 이외에 주재자 등이라고 부르는 자에게는 주재자 등이라고 불리는 명색에서 원인의 상태를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인연이 있을 것이다.”(Vism.19.3)

 

 

우선 명색, 즉 정신-물질 작용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흔히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데 정신-물질의 작용을 파악하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지어져 발생함을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우리들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정신-물질의 작용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조건발생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등과 같이 조건에 따라 명색이 생겨납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현재세가 그렇듯, 과거세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났고, 미래세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Vism.19.5)라고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세에 대한 의혹을 건넜다고 해서 도의청정이라 합니다.

 

도의청정단계는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에 해당됩니다. 위빠사나 16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가 견해청정이라 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가 걸음마 단계라면, 두 번째 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는 이제 본격적인 수행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예비단계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의청정단계가 되면 작은 수다원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줍니다.

 

아무리 나를 찾으려고 해도

 

한국불교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자고 합니다. 그러나 삼계 어디에도 나는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찾자고 하는 수행은 결국 나를 찾지 못하는 수행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있는가?’ 등으로 삼세에 걸쳐 의문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무리 나를 찾으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있다면 인습적으로 관습적으로 불리는 나는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칭이 실체일 수 없습니다. 명칭에 불과한 것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나는 없지만 정신-물질로서 나는 있습니다.

 

오온으로서 나는 단지 그때 그때 조건 발생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작은 흐름에 든 자, 즉 작은 수다원이라 합니다. 또 다른 말로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자라 합니다. 또한 조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 자입니다. 이렇게 발판이 마련된 자는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운명이 정취된 자라고도 합니다.

 

 

업의 행위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

 

이와 같이 업과 이숙이

원인과 함께 일어나므로

종자와 나무 등에서처럼

전제는 알려지지 않는다.

 

미래에서의 윤회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의취를 알지 못해

이교도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뭇삶이라는 지각을 붙잡고,

서로 어긋나는

예순 두 가지 견해를 고집한다.

 

그리하여 견해에 묶이고

갈애의 흐름에 휩쓸려 가니,

갈애의 흐름에 휩쓸리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승은

이와 같이 그것을 알아서

심오하고 미묘하고 공() ,

연기의 원를 꿰뚫어 본다.

 

업은 이숙 가운데 없고,

이숙은 업 가운데 없다.

상호 양자는 공하지만,

없이 없이는 과보가 없다.

 

미치 태양에도 불이 없고,

보주에도 쇠똥에도 없고

그들 이외에 불도 없지만,

연료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업 가운데

이숙을 얻을 수 없고

업 이외에서도 얻을 수 없으니

업은 그 가운데 있지 않다.

 

그 업은 결과가 공하고

결과는 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업을 취해서

그것에서 결과가 생겨난다.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사실들만이 일어난다.”(Vism.19.20)

 

 

 

2018-06-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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