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저 세상이 있다면, 파스칼의 내기와 현자의 내기

황령산산지기 2017. 11. 26. 08:41


저 세상이 있다면, 파스칼의 내기와 현자의 내기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이는 한번뿐인 인생을 소중하게 여겨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것이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왕 죽을 것 즐기며 살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한번뿐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부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고자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내기를 걸 것인가?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학자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론을 말합니다. 파스칼의 내기에 따르면 누군가 신이 있다 없다로 논쟁했을 경우 신을 믿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률이 반반인 경우 있는 쪽에 내기를 거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함을 말합니다. 만일 신이 없는 경우에 내기를 걸었을 때 정말 신이 없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에 내기를 걸었을 때 어느 경우에서이든지 이득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가르침이 불교에도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이 그것입니다. 경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어느 누구도 부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이를 믿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부처님은 오로지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치셨지 믿을 수 없는 내세와 윤회에 대한 가르침은 말씀 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경전을 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경전을 접했다고 하더라도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회의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은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합니다. 가르침을 반신반의 하다 보니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합니다.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또한 경험 된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만 말씀 하셨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시지 않으셨다.’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에 증거를 대거나 경전적 근거를 대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이 생각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을 견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견해는 사견입니다. 사견이란 개인적인 생각 또는 삿된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빗나간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과녁을 빗나간 것이 사견입니다.

 

현자에게 있어서 윤회는 사실

 

현자에게 있어서 윤회는 사실입니다. 범부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윤회가 사실일까?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 따르면 현자들만이 윤회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의 법칙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원리에 따르면 내세와 윤회는 성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어떤 논리로도 논파할 수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세와 윤회에 대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부처님이 꼬살라국을 유행하다가 쌀라라고 하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부처님의명성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마을의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의문 나는 것을 질문 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당시의 사조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라 하여 수 많은 사조가 유행했는데 마을사람들이 듣기에는 도무지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문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M60)라 했습니다. 마을을 다녀 갔던 외도 사상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M60)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은 내세와 윤회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현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범부들에게는 믿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현자들에게는 명백히 드러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법의 눈(法眼: Dhamma cakkhu)이 생긴 현자에게 있어서 내세와 윤회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를 부정하면

 

여기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 자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럴 듯합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말하면서 이야기 할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말만 믿고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이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랜 세월 불이익이 되고 불행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도들은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을까요?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자들이여,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설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는 이와 같은 가르침과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기대됩니다. 그들은 세 가지 착하고 건전한 것 즉, 신체적인 착한 행동, 언어적인 착한 행동, 정신적인 착한 행동을 피하고, 세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동 즉, 신체적인 악한 행동, 언어적인 악한 행동, 정신적인 악한 행동을 받아들여 실천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서 재난이나 타락이나 오염을 보지 못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서 출리의 공덕과 정화의 면모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M60)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다 보니 업과 업의 과보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책임도 없음을 말합니다.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등 오계를 어겨도 죄가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 몸과 마음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모두 소멸됨을 말합니다. 이렇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했을 때 자연스럽게 내세와 윤회도 부정됩니다. 이를 단멸론이라 합니다.

 

현자들이 말하는 저 세상

 

불교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 하며 자신의 체험이야말로 진리이고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 보아도 부처님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경전이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경전을 이야기하면 깨닫지 못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깨달은 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만 하다보니 가르침과 정반대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요?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경전의 가르침과 맞으면 진리로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쳐야 합니다.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스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 단멸론자가 있습니다. 그는 깨달았다고 하지만 내세와 윤회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저 세상이 있을 때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M60)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믿고 따를 수 없는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승으로 하라고 했는데, 경전에서는 분명히 저 세상은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부처님은 현자들이 말하는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이것이 현자들이 말하는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부처가 출현할 때 마다 공통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저 세상에 대한 존재여부입니다. 그래서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이라 하여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단멸론자가 있습니다. 그는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바램대로 저 세상이 없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이 있을 확률과 없을 확률이 반반이라고 한다면, 저 세상이 없다면 단멸론자에게는 안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을 확률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단멸론자에게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죽으면 끝이다라 하여 막행막식하며 살아 왔는데 죽어 보니 저 세상이 전개 되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이렇게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M60)라 했습니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부처님 가르침은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 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원리와 같습니다. 살인을 하면 살인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살인을 하고서도 들키지만 않고 살다 죽는다고 본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라는 것입니다. 오계를 어겼을 때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어떤 업을 지어도 과보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극악무도한 행위를 해도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단멸론자들은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즐기는 삶을 살자고 주장합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어린 아기가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멸론자들은 이미 살아 있을 때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비난 받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M60)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단멸론자들은 살아서는 현자들에게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고, 죽어서는 악처에 떨어지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하면, 두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으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Dhp.15)라 했습니다.

 

저 세상이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의 수입니다.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저 세상이 없으면 바라는대로 될 것이지만, 저 세상이 전개된다면 낭패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저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저 세상이 있다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현자의 내기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을 보면 마치 현자의 내기처럼 보입니다. 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내기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에 따르면 현자라면 저 세상이 있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며 막행막식하며 사는 자에게 윤회는 두려운 것이지만, 계행을 지키고 보시를 하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 있어서 내생은 축복일 것입니다. 설령 단멸론자의 말대로 어린 아기가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현생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현명한 자들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행운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여, 양쪽으로 충족하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린다.”

 

 

만약 저 세상이 없다고 여기고 산다면 아무렇게나 살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얼굴이 모두 다르고 또한 성향이 모두 다르듯이 반드시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중에는 악하고 불건전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악하고 불건전하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분위기와 환경에 따라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세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행위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착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나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저 세상이 있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이 이득입니다.

 

저 세상이 있건 없건 간에

 

이왕이면 저 세상이 있다고 여기고 사는 것이 훨씬 도덕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삶을 살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멸론자들의 주장대로 아기가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있다.”(M60)라 했습니다. 이런 칭찬은 설령 저 세상이 없다고 해도 유효한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는 저 세상이 있건 없건 간에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는 정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업자성정견이라 합니다.

 

업자성정견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 저 세상이 있으나 없으나 도덕적인 삶을 살 것입니다. 저 세상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로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세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정견을 갖는 자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M60)라 했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좋고 저 세상에서도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업자성정견에 따라 사는 자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선행을 행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Dhp.16)라 했습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현자의 내기는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에 파스칼의 내기가 있다면 불교에는 현자의 내기가 있습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하여 이왕이면 신을 믿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의 경(M60)’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하면서 다른 이야기입니다.

 

파스칼의 내기의 한계점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국에 보내는 신만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신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파스칼의 내기에 대하여 신앙을 수단화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현자의 내기입니다. 두 내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저 세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자성정견입니다. 이는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부처님의 업자성정견에 따르면 저 세상이 있거나 없거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 있어서 저 세상이 있다면 축복입니다. 설령 저 세상이 없다고 하여도 현자들에게 칭찬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업자성정견을 부정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 즉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막행막식하며 살 것이기 때문에 저 세상이 있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설령 저 세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하여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기대값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이득입니다. 그러나 현자의 내기는 저 세상이 있건 없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하여 묻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파스칼의 내기와 다른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 합니다. 그 어떤 논리로도 부술 수 없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이라는 파스칼의 내기는 한계가 있지만 부처님의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상과 사조,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악하고 불건전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반면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라는 업자성정견에 따른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사상적 혼란은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외도사상으로 인하여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단멸론입니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에도 단멸론이 기승을 부립니다. 놀랍게도 스님들도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주장합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 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경전을 스승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스승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 했습니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 한다. (dhp17)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 (dhp18)

 

 

 

2017-11-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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