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앞날 되시기를][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 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 이상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현실 없는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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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역은 석관묘, 고인돌, 빗살무늬토기, 비파형동검의 주요출토지역으로
고대로부터 동이(東夷)라 불리던 고대한국인의 영역.
위 만주 서부 요하(홍산)문명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천제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5~6천년전 요하(홍산)문명의 천제단(피라미드) 복원도.
한변 길이 60미터.
3단 원형 제단
- 이상 캡처 2장 출처 :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 8. 29(토)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전 작품 <- 관련글
유물과 기록으로 보면 고대문명은 지금은 바다인 황해대평원에서 시작하여
남한을 거쳐 북한, 만주, 중국으로 전파됩니다.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 <- 관련글
위에서 [요하문명(홍산문명)]지역이 있는데
일단 이 문명에 대한 다큐멘타리 하나를 소개합니다.
( 물론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참고삼아 보실 분 보세요.)
[ 이하 캡처들 출처 ]
삼족오, 고대 한류를 밝히다 - 2부 고대한류, 동방문명을 만들다
[특선 MBC 다큐멘터리] 2008-03-24
이 캡처들은 [특선 MBC 다큐멘터리]의 영상들입니다.
이 영상을 퍼온 분이 [ MBC ] 글자가 나오는 부분을 달리 바꿔놔서
불가피하게 그 부분을 삭제한 것입니다.
[홍산문화] 즉 [요하문명]은 이미 세상에 많이 알려져있죠.
예전에는 [황하문명]이 중국 최초의 문명이라 알려져 있었는데
1980년대에 [홍산문화(요하문명)]이 대대적으로 발굴됨으로 해서
그리고 그 문명이 황하문명보다 대략 1천년 이상 빠르다는 것이 밝혀짐으로 해서
중국 최초의 문명은 [황하문명]이 아니라 [홍산문화(요하문명)]이라는 것이
사실상 중국학계의 내부적 정설이 된 것도 이미 상당히 오랜 일이라 하겠습니다.
[홍산문화(요하문명)] 중 한 지역인 [우하량 유적 (5천5백년전~5천년전)]
[우하량 유적]에서는 후대의 중국황제들이 천제(天祭)를 지내던
천단(天壇)의 원형이 발견되었습니다.
( 사각형인 피라미드형의 천단(天壇)도 발견 되었습니다.
4천 수백년된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약 1천년 빠른 것들입니다.)
5천5백년전~5천년전에 동이의 영역(고대한국의 영역)에는 이미
훗날 중국 황제들이 베껴 만든 [천단(天壇)]의 원형이 있었다는 거죠.
고대한국의 천단(天壇)은 2가지 형태.
장군총 형식의 [피라미드형]이 있었고
위 사진처럼 [원형]도 있었는데
진짜 원래의 천단(天壇)은
4각형 피라미드 위에 원형 제단이 있는 것.
장군총(압록강변 집안에 위치)
압록강 유역에는 장군총, 태왕릉 등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있습니다.
흔히 고구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피라미드들이 고구려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 고대부터 이미 있었던 이 피라미드에서 고구려 때 천제를 지냈다는 근거는 있습니다.
예를들어 지금 서울 경복궁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적 행사를 한다해서
경복궁이 대한민국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 피라미드들은 고구려보다 훨씬 더 전(수천년전)에 이미 만들어진
고대한국의 피라미드들이라는 사실은
아래 링크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전 작품 <- 관련글
홍산문명은 발굴 당시 세계적으로 보도가 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합니다.
박물관에 있는 여신상(女神像)의 머리부분
이러한 여신상(女神像)은 당시 그 지역의 최고지도자였던 여성을 표현해서 만든 작품으로 보이는데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사실은 [곰(熊)토템부족 사람들]과 [호랑이(虎)토템부족 사람들]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위 여신상(女神像)은 당시 선진문명(정신+물질)의 임금인 환웅임금에게 귀의한
[곰(熊)토템부족의 최고지도자인 웅녀]를 뜻하는 신상이라 하겠습니다.
[단군신화]는 사실은 [단군사화(史話)]라 부르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환웅임금은 한분(1人)이 아니라 환인임금(고대한국 최고지도자)의 명을 받고 미개한 부족들에게
선진문명(정신+물질)을 전하러 간 젊은지도자를 통칭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홍산문화 나리사대의 환웅과 웅녀와 곰조각상
수십년전 홍산문화가 처음 발굴되었을 때
중국당국은 요하지역이 전통적인 중국영토라 아니라서
여러가지 유물들을 많이 숨겼었죠.
(요새는 동북꽁정이 많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지 차차 유물들을 공개하지만 말입니다.)
위 그림은 당시 발굴자가 스케치한 유물그림이 유출되어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 보이는데
왼쪽에 보면 투구를 쓴 환웅임금이 있고
중앙에 당시 그 지역의 원래 지도자였던 여성지도자(웅녀)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 곰토템족의 상징인 곰상이 있군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보면 고대한국(東夷)의 지도자(최고지도자 혹은 아래 (제후) 지도자)였다는
치우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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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가 노산(盧山)의 쇠(金)로 오병(五兵)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보통사람이 아니다.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
치우는 형제가 81명인데 구리머리에 쇠이마(동두철액-銅頭鐵額)를 하였으며
모래와 돌을 먹고 칼,창,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
[有蚩尤 兄弟八十一人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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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씨는 약 4천8백년전 인물인데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철갑옷으로 무장시킨 모양입니다.
그걸 보고 당시 금속문명이 별로 없던 중국인들이
[쇠(金)로 오병(五兵)을 만들었다.]고 놀란 것으로 봐야겠죠.
그리고 치우씨의 형제들 (고대한국 부대의 장군들)이 머리에 투구를 쓴 것을 보고
구리머리에 쇠이마(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표현한 것으로 봐야겠죠.
쇠를 뜻하는 철(鐵) 자의 옛 글자는
金(금) + 夷(이) 즉 [金夷] 자입니다.
(이 글자는 요새는 잘 안쓰기 때문에 컴퓨터의 한자지원이 안됨.)
쇠 즉 철(鐵)이 원래 동이(배달)민족의 것이란 뜻.
夷(이)는 고대한국인을 뜻하는 글자죠.
게다가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보면
[철고이자야(金夷 古 夷 字 也)]
" 철(金夷) 자는 옛날에는 이(夷)자 였다." 고 나옵니다.
동이(東夷) 민족을 뜻하는 '이(夷)'자 자체가 옛날에는 쇠를 뜻하는 글자로 쓰였다는 얘기.
그리고 사기(史記)에 이어 중국 제 2의 역사책이라는 한서(漢書)에도 보면
[이통차작철(夷 通 借 作 金夷), 철고문철자(金夷 古 文 鐵 字)]
"철(金夷) 자는 이(夷) 자에서 나온 것이다."
"철(鐵 - 쇠 철) 자는 옛날에는 [金夷]라 썼다."
[철(鐵)]자의 근원에 대해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네요.
[철(鐵)]자의 변화
夷 -> 金夷 -> 鐵
고대한국인들이 금속문명을 먼저 썼고 그것이 중국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쇠 즉 철(鐵)을 처음에는 그냥 [이(夷)]라고 썼고
후에 [金夷]라고 쓰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후대에 [철(鐵)]이라고 변형되었다는 얘기죠.
홍산문화의 [우하량]에서는 아주 놀라운 수준의 옥기(玉器 : 옥으로 만든 물건)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아래는 그 아주 일부에 불과합니다.
요하유역에서는 5천5백년전~5천년전에 이미 저러한 놀라운 수준의
옥기(玉器)들을 만든 거죠.
5천5백년전~5천년전에 시대에 대한 기존의 관념(선입견)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죠.
옥(玉)은 대단히 단단하죠.
그러한 옥으로 저러한 물건들을 만들 수 있는 문명.
사실 이건 세계고고학계가 뒤집어진 발견이죠.
( 홍산문명의 수많은 옥기(玉器)들은 검색해 보시면 사진이 많이 나옵니다.)
둘 다 8천년전 것들입니다.
홍산문명 우하량보다 3천년전
이미 한반도와 만주(사해 등)에서는 이렇게 옥귀걸이들을 만들었죠.
그리고 올해(2012년) 제주도에서
1만년전 옥귀걸이가 발견되었죠.
1만년전 옥(玉)귀걸이 제주도에서 발견 <- 관련글
중국고고학회 상임이사장 곽대순의 요하유물 발굴보고서.
위에서 '중국문명의 중심지가 한 곳만이 아니었다.' 하고 있지만
요하문명이 황하문명보다 1천년 이상 빠르므로
사실은 요하문명이 전해져서 황하문명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사실은 중국당국이 '동북꽁정'을 감행하는 큰 이유가 되죠.
동방(東方) 즉 고대한민족의 영역이 문명의 시원지임을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으므로
동방(東方) 역시 원래 중국영역이라고 우기기로 결정한 거겠죠.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어이없는 짓을 감행하는 거겠죠.
하지만 이러한 짓은 후세에 비웃음을 살 짓이겠죠.
후세에 역사는 기록하겠죠.
" 당시 중국당국이 그러한 어이없는 우기기를 했다.
이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짓이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거짓을 행하면 안된다." 라고요.
( 물론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다수가 (말을 하든 안하든 간에)
'동북꽁정은 웃기는 짓이야. 우리(중국)당국이 실수하는 거야.' 하는 입장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 무리한 왜곡이라는 거죠.)
중국 고고학자 소병기의 글
적봉(홍산)문명이 중국문명의 서광 즉 최초의 발생이라 쓰고 있네요.
요하문명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이고
요하문명이 전해져서 황하문명이 생긴 것이라는 뜻.
그리고 요하문명이 중국문명의 발원지일 뿐만이 아니라
"북방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는 말이 나오죠.
즉 북방민족의 문화도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에서 전파된 것이라는 것을
중국학자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죠.
[요하문명] 중에는 [사해유적]이라는 8천년전~7천년전 유적도 있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됩니다.
둘 다 8천년전 [빗살무늬토기]들.
당시 한반도와 요하유역이 같은 문명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 예전에는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왔니 어쩌니 했었는데
한반도에서 시베리아보다 수천년 빠른 [빗살무늬토기]들도 많이 발견되면서
사실은 거꾸로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시베리아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상식적으로도 아주 추운 지역인 시베리아에서 문명이 먼저 발전했을까요
아니면 살기좋은 온대지역인 한반도에서 문명이 먼저 발전했을까요.
특히 고대로 갈수록 문명은 온대지역에서 발전했죠.
그러한 문명이 열대, 한대로 전파되었다고 봐야겠죠.
지구평균기온이 제일 높았다는 5~6천년전에도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불과 몇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당시에도 시베리아는 대개 한대지역이었으며
한반도는 대개 온대지역이었습니다.)
위에 최초의 용, 최초의 문자 등으로 표현된 것은
중국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한국 입장에서 보면 [요하문명(홍산문명)]은 [압록강문명]의 지류(곁가지)에 불과하며
[압록강문명] 역시 말하자면 [고대한국 제 3차 중심지]일 뿐이니
위의 유물, 유적에 [최초]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요새 중국당국이 '동북꽁정'을 지나서
'탐원꽁정'이니 '백두산꽁정'이니 하면서
압록강유역의 유적을 열심히 발굴하고 있는데
" 압록강문명이 요하(홍산)문명보다 더 빠르다."
" 중국문명은 압록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겠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물론 그 전제는 고조선과 그 이전의 만주역사를 '납치'하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을 그들이 하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위 사진에 보면 '최초의 문자'라는게 있죠.
이것은 5천여년전 것인데
'중국 최초의 한자'라는 [은나라 갑골문]보다 2천년 정도 전 것이죠.
예전부터 중국학자들간에도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의 문자(한자)가
중국보다 훨씬 더 먼저부터 있었고
이러한 문자들이 전해져서 [은나라 갑골문] 등 중국의 한자가 되었다는 견해 많았는데
그게 공식적으로도 발표되었죠.
갑골문자보다 천년 앞선 동이(한민족) 골각문자 발표 <- 관련글
위의 오른쪽에 보면 유명한 [아사달문양]이 나오죠.
아사달문양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간 고대한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 중
[아사달 문양]이라는 문양이 있죠.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중국 측은 6300년전∼ 4200년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526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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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양은 산동반도 고대유물에 많이 나오는데
지도자를 [소호(少昊)]라 불렀다 해서 [소호문명]으로 불리고 있죠.
[아사달 문양]이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문명전파의 경로를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죠.
[소호(少昊)]라는 말이 그 지역의 지도자에 대한 존칭이었듯이
[소전(少典)]이라는 말도 그러했고
이는 어디선가 나타난 선진문명 사람들이 그 지역 원주민들의 왕족(왕가)이 되면서
그 왕족(왕가)가 지역에 따라 [소호(少昊)] 혹은 [소전(少典)]으로 불렸는데
이 사람들은 같은 문양(아사달문양)을 쓴 같은민족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소호(少昊)]와 [소전(少典)]은 자연스레
왕족(왕가)의 성씨(姓氏)인 동시에 부족이름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위 [아사달문양]의 원(圓)은 진리(眞理)를 뜻하고
또한 태양을 뜻할 것입니다.
산해경 등에 보면 고대한국은 日月所出(일월소출)의 땅
즉 해와 달이 나오는(뜨는) 땅으로 많이 표현되어 있는 등
고대한국의 상징이 [태양]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위 문양의 아래부분을 축약하면
山
우리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3]이라는 숫자를 참 좋아하죠.
지금도 언론에서 여론조사해보면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3 이죠.
사진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신라의 금관총금관(국보 제87호)입니다.
山의 형상이 3개 나오죠.
3山
3곱하기 3은 9
조선시대에도 한양(서울)과 8도
9지역이 전국을 형성했죠.
[칠지도(七支刀)] -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다들 아시듯이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에서 왜국에 하사한 칼이죠.
<- 관련글
그런데 이 [칠지도]가 뜻하는 것도 7이 아니라 9
[칠지도] 또한 이러한 3山의 형태를 약간 변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가 똑같이 3山의 형태를 국가를 상징하는 모양으로 쓴 거죠.
감사합니다.
[ 세월은 유구한 것인데 조급한 자는 스스로 짧게 만든다.]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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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게이트웨이 투 더 월드
[밝은 앞날 되시기를][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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