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의 도리’ 뜻하는 거북은 中과 사대관계 반영
용머리로 변형해 대등한 위치를 표현하기도
■ '왕의 인장' 국새와 어보에 담긴 우리역사
870만명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적'은 조선 건국 보름 전 고래가 삼킨 새 국새를 찾으려는 해적, 산적과 개국세력이 벌이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렸다. 왕의 인장인 국새(國璽)를 차지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내용은 사극이나 소설의 단골 소재로 애용돼 왔다.
얼마 전에는 세조의 요절한 아들인 덕종의 어보(御寶)를 내년 3월 반환하기로 우리 정부와 미국이 합의했으며 역시 미국에 소재한 문정왕후와 현종의 어보도 귀환 절차를 밟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앞서 4월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 때 불법 반출된 황제지보, 유서지보(諭書之寶), 준명지보(濬明之寶) 등 고종의 국새 3점과 어보인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1점을 직접 돌려줘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왔다.
↑ 1866년에 제작된 문조(효명세자) 어보. 전체적으로 거북 모양이지만 송곳니와 안면, 비늘 등이 용을 형상화했다. 용 모양의 인장을 사용했던 중국과 대등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새나 어보 모두 '왕의 인장'이다. 이 둘 간에 무슨 차이가 있으며 또 언제부터 사용됐고 얼마나 제작됐던 것인지 궁금증이 높아진다.
국새는 국가의 상징이며 왕위 계승 시 선양의 징표인 동시에 외교문서, 교지, 공식문서 등 국사에 사용되던 관인이다. 국왕이 각종 행차 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맨 앞에서 봉송하기도 했다.
반면 어보는 왕과 왕비의 개인적 인장을 뜻한다. 왕과 왕비의 여러 책봉의식이 치러질때, 그들의 덕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 시호, 묘호 등이 올려질 때마다 어보를 제작했으며 사후에는 신위와 함께 모두 종묘에 봉안됐다.
국새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중 '신라 2대 남해 차차웅 16년(서기 19년)'조에 실려 있다. "북명(北溟·강릉)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濊王印)'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고구려에서도 165년 7대 차대왕이 시해되자 신하들이 왕의 아들을 놔두고 동생(신대왕)에게 국새를 바쳤다고 삼국사기에 기술돼 있다. 국새의 전수를 통한 왕위 선양의 전통이 이미 고구려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들어오면서 외교적 필요에 따라 거란, 요, 금, 원, 명에 책봉과 함께 인장을 받았으며 이 인장이 국새로 통했다. 인장의 글씨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었고 손잡이 모양은 '낙타' '거북' 두 종류였다. 낙타는 동북방의 민족을 지칭하며 거북은 신하의 도리를 내포하고 있어 사대관계를 반영했다. 이에 반해 황제국을 천명했던 대한제국에서는 용 모양이 주류를 이룬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는 즉위년(1392년) 명나라에 고려의 국새를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 줄 것을 수차례 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태종 3년(1403년) 비로소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판 금인장을 보내왔다. 명은 인장의 재료로 금보다는 옥을 더 높게 쳐 황제는 옥을 갖고 제후에겐 금 인장을 줬다.
국새·어보 전문가인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학예연구사는 "중국 영화나 소설 등의 영향인지 국새를 옥새로 부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옥새라는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며 "조선 임금의 인장을 얘기할 땐 국새가 옳은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은 명에서 국새를 두 차례 더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대륙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의 국새를 썼고 역시 총 3점을 인수했다.
중국의 왕조는 조선을 낮게 여겨 황제의 인장을 말하는 새(璽)나 보(寶) 대신 격이 떨어지는 인(印)자를 새겼다. 힘이 약해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자주적 국가를 굽히지 않아 굴욕적 중국 국새는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쓰고 대일본 외교 문서와 국내 통치에 쓰는 국새는 모두 다른 국새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다.
1865년 편찬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과 1876년 제작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를 보면 10여 종의 국새가 존재한다. 최고 권위의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조선왕보(朝鮮王寶)를 포함해 일본 외교문서를 위한 소신지보(昭信之寶), 왕의 교서와 인사 발령장용인 시명지보(施命之寶), 과거 문서에 찍은 과거지보(科擧之寶), 왕이 서적을 반포·하사할 때 관련 문서에 이용하는 선사지기(宣賜之記)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다가 갑오경장 때 제후국 시대의 국새는 모두 폐기되고 대한제국 탄생과 함께 황제국의 지위에 걸맞은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을 비롯해 22종의 국새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대한제국 시기 출간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전체 목록이 망라돼 있다. 하지만 현전하는 국새는 오마바 대통령이 반환한 3점을 포함해 총 7점에 불과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의 국체를 말살하기 위해 국새를 모조리 약탈해갔다. 광복 이후 미 군정이 그 중 대한국새 등 7점을 찾아내 우리 정부 대표였던 오세창 선생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4점은 분실하고 대원수보,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등 3점만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았다. 고종이 국권 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사용했던 황제지새는 행방을 모르다가 2009년 재일동포에게서 구입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 황제지보
각종 의례용으로 제작된 어보는 국새보다 훨씬 수량이 많다. 1555년, 1698년, 1705년, 1909년 각각 작성된 '종묘등록'을 종합하면 어보는 총 374점이 만들어졌다. 이 중 정종어보, 태종어보 등 9점은 1909년 종묘등록에 존재하지 않아 영구분실 가능성이 제기된다. 1909년 이후 49점이 다시 사라졌으며 49점 가운데 최근까지의 조사에서 12점은 국내외에서 소재가 파악됐지만 37점은 그렇지 못하다. 나머지 318점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준 학예연구사는 "한국전쟁시기 어보들은 종묘에 보관돼 있었는데 출입문 쪽에 위치한 어보들이 집중적으로 사라졌다"면서 "미군 병사 등이 다급하게 갖고 갔지 않을까 추측만 한다"고 설명했다.
어보의 재질은 금, 은, 옥, 백철 등이다. 손잡이는 거북형이 대다수이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특이하게도 거북의 머리가 용두형으로 변형된다. 마찬가지로 비록 중국의 극심한 견제로 용모양의 어보를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중국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가졌고 이런 의지를 어보에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국새와 어보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10㎝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글자 수는 국새가 기껏 4자 정도인 반면 어보의 경우 업적을 기리는 각종 존호, 시호, 휘호, 묘호가 덧붙여져 훨씬 많다. 1902년 종묘에 봉안된 효명세자(헌종의 친부)의 문조옥보는 무려 116자나 된다. 그의 아내 신정왕후 옥보 역시 62자다. 문조옥보와 문조비 신정옥보를 올린 인물은 고종이다. 고종을 왕위에 앉힌 조대비가 바로 신정왕후이다. 깨알 같은 장문의 어보를 바쳐 조대비가 바람 앞 등불 신세의 대한제국과 자신을 다시한번 굽어살펴주기를 바랐던 게 분명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어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24년(세종 6년) 제작된 3대 태종비 원경왕후 금인(고려대 박물관 소장)이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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