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전 고대한국의 작품

황령산산지기 2014. 11. 21. 15:04

 

 

[밝은 앞날]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현재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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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창조여신 하토르(Hathor)의 부조상

얼굴이 넓적하고 쌍꺼풀이 없는 동북아시아적인 얼굴.

 

 

 

위 인물들은 '티우'(Tiu)라는 먼 옛날 미스테리한 선조에 대한 전설을 갖고 있는
이집트 왕족들. ( Tiu(티우)는 이집트 창건의 전설적 인물.)

 

위 글 출처 -  

(솔본님 글) 고대한국계 추정 이집트 왕족들  

 

 

 

이집트에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이 동북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 근거가 많이 드러나고 있다하겠다.

 

 

장군총, 태왕릉 등은 이집트 대피라미드와 건축양식이 똑같다.

이집트 대피라미드는 장군총 같은 피라미드를 크게 만들고

그 위에 돌을 덧쌓아 뾰족하게 만든 것.

 

중국 신화통신은 2001년도 7월에 만주 서부의 피라미드에 대해서 보도했다.

5천년 이상 전 것이라 보도했는데  

장군총, 태왕릉과 비슷한 피라미드. 

 

신화통신이 보도한 만주의 고대 한국 피라미드  <- 관련글

 

 

 

 

 

 

5~6천년전 요하(홍산)문명의 천제단(피라미드) 복원도.

한변 길이 60미터.

 

- 캡처 출처 :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 8. 29(토) 

 

 

 

 

 

 

 

위 피라미드는 동북문명 유적지의 [홍산]이라고 써 있는 곳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요하(홍산)문명과 소호(少昊)와 소전(少典)     <- 관련글

 

 

 

 

태왕릉보다 좀 작지만 똑같이 생긴 위 피라미드에 대해서

신화통신은 5천년 이상 전 것이라 하면서 

'중국 문명의 원류(근원)을 찾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발견'이라 했다. 

 

즉 중국당국은 이미 만주의 고대한국문명이 전파되어

중국문명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것.

 

( 중국고대문명은 [한반도 - 만주]의 고대문명이 건너가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중국역사학자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알게 되었고

  이는 중국이 동북꽁정이라는 무모한 짓을 감행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장군총과 같은 형식인 홍산문명 피라미드는 5천년전 것이고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때 것이라고?

왜?

장군총, 태왕릉이 한반도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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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한 밑변 길이 32미터.
 
결론부터 말하면 장군총은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 아니다.
장군총은 고구려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덤이다.
  
장군총이 고구려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장군총 내부]
 
장군총은 [고구려 무덤들]하고 완전히 다르다.
형식도 완전히 다르고 벽화도 없다.
 
 [고구려 무용총 천장]
 
무용총 천장과 장군총 천장을 비교해 보시라.
만일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면
벽화도 없이 저리 만들어 놨을까.
그 수많은 고구려 벽화를 생각해보시라.
 
 
[덕흥리 고분]은  영락(永樂)18년
즉 광개토대왕 즉위 18년에 죽은 유주자사의 무덤이라고
아예 글자까지 써놓은 무덤.
물론 무덤이 흙속에 있다.
광개토대왕의 신하 무덤에는 그림에 글자까지 다 있는데
장군총은 그림도 글씨도 전혀 없다.
장군총이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의 무덤이라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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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진짜 고구려 무덤은 위와 같이 생겼다.
진짜 고구려 무덤은 땅 속에 들어가 있다.
 
장군총은 벽화도 없다. 유물도 없다.
도대체 장군총이 고구려 무덤이라는 근거가 없다.
단지 [장군총이 고구려 무덤이라고 믿게 하고픈 사람들]이 있을 뿐. 
 

[동명왕릉 - 평양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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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북한 평양)]

 

위 무덤은 북한이 [고구려시조 동명왕릉]이라고 발표한 것.

저 무덤이 [고구려시조의 릉]이든 아니든 간에

양식으로 보아 광개토대왕때의 고구려무덤보다 더 전 것. 

 

그런데 그때 이미  피라미드에 흙을 덮는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하단만 돌피라미드고 그 위는 흙이 보인다.

안에는 변형된 작은 피라미드 모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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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묘실을 바라본 광경]

 

위와 같이 동명왕릉때는 이미 무덤 건축구조가 많이 달라져 있다.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

 

 
위 덕흥리 고분은 수백자의 글자가 발견되어서 유명한 [유주자사 진]의 무덤.
그런데 이 고분에 쓰여진 것이
이 고분을 [광개토대왕 18년]에 만들었다는 것. 
즉 광개토대왕 시대의 무덤.
 
이 고분은 피라미드 형식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많은 변화를 보인다.

 

아마도 진짜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이 무덤과 비슷한 형식으로 
크기는 더 클 것이다.
 

 

즉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무덤으로 볼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 처음 장군총 내부를 발굴한 학자는 일본인.
그 일본인 학자는 말했다.
" 장군총 내부에서 '호태왕'이라는 위패를 봤다." 고.
그래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즉 고구려때 만들어진 거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웃기지 않는가.
위패를 봤다?
그 위패를 어떻게 했는데.
명색이 학자라는 자가 그걸 그냥 놔두고 나왔나? 
도굴범들이 훔쳐가라고 ?
 

그리고 

장군총 내부는 통로가 원래 열려있다.
도굴이고 뭐고 없다. 그냥 들어가서 들고 나오면 된다.
위패가 있었다면 그때까지 남아있을 수도 없다.

진즉 도난당했을테니까. 

 
그 일본인의 의도는 간단하다.
' 장군총은 고구려때 거니까 그리들 알고 있어. 딴 생각 말고.
고구려때 거라고~ 믿어줘~ 속아줘 제발~'
 
왜냐하면
일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국사는 없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일본의 쌀농사, 금속문명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서
불과 약 2천4백년전에 시작했기 때문에 (야요이 문명) 
그들은 그 이전의 한국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고대사가 일본고대사보다 빠르다는 것을 극력 감추고 싶어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국에는 변변한 문명이 없는 것처럼 많드는 것이
일제총독부의 큰 공작 중 하나였다.

 

아마도 자존심도 상하고 또한

[뿌리 얕은 일본]이 [뿌리 깊은 한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명분이 안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임나일본부썰'도 그래서 나온 것.

 

식민지의 고대사를 훼손, 폄하하는 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당시 열강이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히 하던 짓.
그것은 식민지 사람들의 자부심과 독립정신을 꺽기 위한 짓.
 
그래서 일제는 한국의 고대사서들을 강제수거해서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보임.)
제일 '만만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정도만 남겨뒀다.
여러 유물들도 부숴버렸다. (평양 단군릉 등) 
 
장군총은 고구려때 만들어진 거라고 알려졌다.
근거는?
없다.
어느 일본인의 '호태왕 위패 봤어요~제발 속아줘요~' 하는 헛소리밖에는.
 
요새는 어떤 중국인들이 좀 더 '고도의 공작'을 부리신다.
장군총과 태왕릉이 '고구려 무덤' 이라 믿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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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태왕릉 - 누군가에 의해서 많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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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복원도 - (복원전문가 박진호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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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은 장군총과 똑같이 생겼다.
지금은 많이 무너졌지만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인 태왕릉.
장군총보다도 부피가 몇배 크다.
무너진 후 지금 높이만 해도 15미터 - 원래 높이 25미터.

 

한 밑변 길이 64미터 (장군총은 32미터)
 
태왕릉이 너무 커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죽이려고 
누군가가 일부러 돌을 끌어가고 무너뜨린 것 같다. 
좀 작은 장군총은 남겨두고. 
 
태왕릉 역시 벽화도 없고
진짜 고구려 무덤과는 너무 다르다.
 
 
1990년도부터 중국학자들이 태왕릉을 본격발굴했다.
그런데 발굴한 유물은 공개하지 않는다.
유물이 없었던지 숨기고 있던지 둘 중 하나. 
 
나중에 유물을 하나 공개한 게 
[태왕릉]이라는 글자가 써진 벽돌

 

 
 

 

저 명문전(글자 써진 벽돌) 중에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즉 [태왕릉(太王陵)이 산(山)처럼 장구하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이 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처럼 생긴 [돌 피라미드].
그런데 난데없이 무슨 벽돌인가.
장군총에도 벽돌같은 건 없다.
 
 
태왕릉은 크기만 클뿐 장군총과 똑같이 생긴 [돌 피라미드]
장군총에도 벽돌이 없다. 돌만 있다.
당연히 태왕릉에도 벽돌같은 건 없다.
 
즉 만약 고구려인들이 피라미드 위에다가 '벽돌 누각'이라든지 하는 뭔가를 지었다 해도
피라미드 자체는 원래 있었던 것이라는 것.

 

 

그리고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즉 [태왕릉(太王陵)이 산(山)처럼 장구하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이 쓰여진 벽돌이

정말로 태왕릉 위의 누각같은 데 사용된 것이라면   

이는 태왕릉이 [광개토대왕]의 능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고구려임금은 모두 [태왕(太王)]이라 불렸다.  

[광개토대왕]만 [태왕(太王)]이라 존칭된 것이 아니란 얘기.

[광개토대왕]을 [태왕(太王)]이라 존칭하면서

그 부왕(父王)을 그냥 왕(王)이라 했을 리 없고  

그 할아버지왕도 그냥 왕(王)이라 했을 리 없는 일.

 

[태왕릉(太王陵)이 산(山)처럼 장구하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은

당시 고구려인들이 태왕릉이 어느 임금의 능인지 모른다는 얘기.

 

예를들어 조선시대에 왕릉을 만들면서 벽돌에  

" 이 '조선임금'의 능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글을 썼다면 

이는 뭔가가 이상한 일.

   

 " 이 세종임금의 능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 이 성종임금의 능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등

그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어느 임금이지)를 밝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냥 " 이 '조선임금'의 능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식으로 쓰지는 않는다.

 

예를들어 성종의 능을 만들면서

 " 이 '조선임금'의 능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식으로 썼다면

이는 그 선대 임금들에 대한 엄청난 불경이 된다.

마치 성종이 모든 조선임금을 대표한다는 식의 표현이 되므로.

 

성종의 선대임금들도 모두 '조선임금'인데

성종의 능에  '조선임금'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는 없는 일.

'조선의 성종임금'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는 있어도.

 

이런 식으로

벽돌에 그냥 [태왕릉(太王陵)]이라 쓰여진 것은

당시 사람들이 태왕릉이 누구의 능인지 몰랐다는 얘기.

 

그냥 막연히 '태왕릉은 고구려 선대 어느 임금의 무덤일거야.'라 생각했다든지

아니면

태왕릉이 고구려임금의 능이든 아니면 고구려 이전 고대 임금의 능이든

한국의 임금은 모두 [태왕(太王)]이라 칭하면서

고구려가 고대한국의 정통성을 계승이라는 것을 표방한 것이라 하겠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구려임금들만 [태왕(太王)]이 아니라

고구려 이전 시대의 선조 임금들도 모두 [태왕(太王)]

 

 

확실한 것은

그냥 [태왕릉(太王陵)]이라 쓰여진 것은

당시 사람들이 태왕릉이 누구의 능인지 몰랐다는 얘기.

 

아마도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태왕릉에 대해서

" 고구려 어느 임금의 능인지 아니면 고구려 이전 시대 임금의 능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선조 어느 임금의 능인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하겠다.

 

 

 

'동북꽁정파'는 '때'가 되기 전에는 고대한국 피라미드들을
사람들이 고구려때 것으로 알고 있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한국인들이 압록강변 고대한국 피라미드 등 유물 유적들을
고대한국과 관련하여 연구하지 않게 되고
그러는 사이 '꽁정파'만 열심히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한방'을 날릴 생각일 것이다.
 
' 태왕릉이 고구려때 건 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전 것이네~.
근데 이건 중국사의 일부다~. 그러므로 중국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목적은 '꽁정'을 완벽하게 진행시킬 시간을 벌자는 것.
그리고 후에 '핵폭탄'을 던지겠다는 것.
 
그래서
" 태왕릉이라 부르는 피라미드, 그거 고구려 무덤이야~.
딴 생각 말어. 알았지? "
 
해놓고는
 
'그들'은 얼마전에 다시 한번 공작을 했다.
 
" [태왕릉이라 불리는 피라미드]에서 '호태왕'이라고 써진 방울(종)이 나왔거던.
그거 광개토대왕 무덤이야. 알았지? "
이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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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만 [호태왕]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이고

진짜로 이 [호태왕 방울종]이 [태왕릉 피라미드]에서 나왔다면 
[태왕릉 피라미드]는 더더욱 광개토대왕릉이 될 수가 없다.

 

광개토대왕 때의 신묘년(辛卯年 :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해.

18세 젊은 왕이 즉위하면서 이미 자신의 능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인가.

  

만약 위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을 뜻하는 것이라면

위 방울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그 즉위를 하늘과 선조에 고하는 행사 를 태왕릉에서 했다는 얘기가 된다.

 

방울종을 만들고 피라미드에서 [즉위식]을 했다는 얘기.

 

만약 [태왕릉 피라미드]가 어느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었다면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대왕의 무덤 위에 올라가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고구려 당시에도 [태왕릉 피라미드]는 고대의 것이었고

그래서 거기서 즉위행사를 했다고 본다.

[태왕릉 피라미드]가 선조들이 만든 신성한 제단임에 분명하므로.

- 그리고 당시 이미 유해는 없었을 것이므로

고구려인들은 태왕릉을 무덤이 아니라 제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태왕릉은 무덤이기 이전에 제단.

 

또한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피라미드위에 누각을 세웠을 수는 있다.

 

후에 발해인들도 태왕릉 등 고대한민족 피라미드에 누각을 세웠을 수 있다.
 
고대부터 원래 있던 돌 피라미드 위에다가.
 
 
이집트 대피라미드(기자피라미드)와  장군총, 태왕릉은 똑같은 양식이다.
겉 모양도 장군총을 그대로 크게 만들면 이집트 대 피라미드.
 -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피라미드

 

게다가 숱하게 나오는 [이집트 벽화]도 유독 대피라미드에는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대피라미드는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다. 도굴하기 어렵게 지어 놨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 무덤들하고 형식이 완전히 다르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무덤]에서 숱하게 나오는
[고구려 벽화]가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
 
위 사진에도 보이듯이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은 장군총과 같은 모양.
 
[장군총 내부]
 
장군총 내부 저 방의 [천장 돌]은 1개의 통돌인데 무게가 무려 백톤(100톤)
- 이 천장돌은 이집트 대피라미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장군총 내부]
 
태왕릉 내부도 장군총과 같다.
 
 

 

장군총에도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에 있는 것 같은
석관(돌관)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석관(돌관)은 고대한국에서 흔히 만들던 것.
한반도에는 고인돌처럼 석관(석관묘)이 널려있다.
세계에서 제일 많다.
 

 

장군총 정도 되는 데에는 석관이 있었다면 이집트 대피라미드처럼 통석관이 있었다고 본다.
도굴꾼이나 어떤 나라의 학자가 장군총에서 훔쳐갈 거라고는 통석관 밖에 없다.  
 
장군총과 이집트 대피라미드가 내부도 아주 비슷하다.
돌 쌓은 모습도 비슷하고 둘 다 벽화도 유물도 전혀 없다.
 
즉 이집트 대피라미드와 장군총은 같은 문명의 유물.

 

그런데 고대 이집트인이 한국에 온 흔적은 없다.
고대한국인이 이집트에 간 흔적은 많다.
 
 
 
 
 
 
 
압록강 주변에는 장군총, 태왕릉 말고도 한민족 피라미드들이
무려 1만2천기나 있다.
 
 
 
 

 

황하문명의 뿌리라는 만주서부 [홍산문명]이라는 것도
[환웅 배달문명]의 한 지류(가지)에 불과하다.
 
만주남부 압록강 지역에 널려있는 저 한민족 피라미드들.
이에 대한 발굴은 중국당국이 이미 오래전에 했고
유물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동북꽁정.
때가 되면 중국당국은 세계에다 대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다.
 
' 고조선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근거는 없지만...허험...
그러므로 고조선 이전 역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흐허허험...
그러므로 저 피라미드들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크하하하...
거래서 피라미드도 쭝국의 창조물이고...캬캬캬캬... 
그냥 우기면 다 우리거거든~~~"
 
이런 의도로
동북꽁정을 지나서 그들은 '탐원꽁정'이라는 이름까지 붙인것.

 

탐원이란 근원을 찾는다는 것인데
탐원꽁정이란 중국의 근원만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고대한국문명을 통째로 삼키시겠다는 말씀.
실로 으스스한 짓거리다.
 
허나 그들이 세계인들의 다수를 포섭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결국 동북꽁정, 탐원꽁정은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은
동북꽁정을 우려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으므로.
결국 중국에 망신만 갖다 줄 것이므로.
 
'꽁정파'는 [진실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동북꽁정'이 결국 자신들의 조국인 중국을 '역사왜곡이나 하는 비열한 나라'로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위에서부터
1.장군총
2,3.  서울 석촌동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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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고분]
 
장군총 태왕릉과 마찬가지로
서울시 석촌동 피라미드들도 백제 때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백제보다 훨씬 더 전 것들이라는 근거는 많다.

고대부터 원래 있었던 저 피라미드들이

백제 때도 천제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을 수는 있지만. 

 

- 수십년전 서울시 강남개발계획서등을 보면

당시 대부분 논밭과 벌판의 시골이던 강남에는 수많은 피라미드가 있었고  

위 피라미드보다 훨씬 더 큰 피라미드들도 있었는데

모두 없애버리고 3개만 남겨놨다.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그 위에 집과 길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지금의 강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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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단군릉
 
 
 
 
 
 
 
 
위 사진들은 평양 단군릉 사진들 (북한 재건)
 
일제가 많이 때려부순 단군릉을 재건하면서
북한은 장군총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 단군릉이라 전해오는 원래의 피라미드는 좀 떨어진 곳에 따로 있다.

그 피라미드는 누군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많이 파괴되었고

북한당국이 위 사진처럼 좀 떨어진 곳에 새로 재건한 것.     

 

 

만약 북한이 단군릉을 조작한 것이라면
장군총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장군총을 고구려때 것이라 알고 있는데
고조선 무덤을 장군총과 같게 만들어 놓으면
조작한 거라는 의심을 살게 뻔하기 때문.  
 
단군릉이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인 것에 대해서 북한 측은
" 모르겠다.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재건축한 걸수도 있고..." 라고 했다.
조작이라 하기에는 어설픈 모습.
 
단군릉은 조작된게 아닌 것 같다.
북한은 단군릉의 유골이 [5,011±267년]전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
5천년도 더 전 사람의 유골이라는 것.
단군왕검은 약 4천3백여년 전 분이라 알려져 있는데 
7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
 
만약 북한이 조작을 했다면
예를들어 유골이 약 4천 3,4백년 전 것이라 했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5천년전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아도
단군릉은 조작된 게 아닌 것 같다.
  
단군릉 - 높이 22 미터,  한변 길이 50 미터
태왕릉 - 높이 25 미터 , 한변 길이 64 미터
 
장군총, 태왕릉도 단군릉과 비슷한 시기의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황해 바다 속에는 1만년 이상 전의 진짜원조 피라미드들이 있겠지만.
 
  

[밝은 앞날]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출처 : 한국고대사
글쓴이 : 새하늘새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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