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막고굴莫高窟

황령산산지기 2014. 12. 24. 17:08

한국의 신화를 ?아서

 

 

 

 

三國遺事(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 王儉朝鮮(단군왕검)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 하니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자식중에 환웅 아들이,하늘 아래에 뜻을 갖고 셈했다.사람이 사는 세상을 구하기를 탐했다.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아래에 세(3) 위태로운(전쟁) 우두머리를 보시고,인간에게 널리 이익을 줄만하기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가 곧 환웅 천왕이다.

 

危 위태할 위

위태하다. 안정되지 않고 무너질 듯한 모양. 위험한 상태. 위태롭게 느끼다. 불안을 느낌. 위태롭게 하다. 안전을 위협함. 위태롭게도. 아슬아슬하게. 험하다. 높이 솟아 있는 모양. 바르다. 준엄하게 하다. 28수(宿)의 하나. 북방에 있음. 병이 중하다. 죽음에 다다름.


 伯 맏 백, 길 맥, 우두머리 패

맏. 연장의 남자에 대한 존칭. 맏형. 큰아버지. 작위(爵位)의 하나. 길. 거리. 동서로 통하는 밭두둑길. 우두머리. 제후의 통솔자. 맹주(盟主).

 


아사달阿斯達의 어원적 해석 .

 

 

http://youtu.be/aQhiOpyVyIo

 

아사달阿斯達이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城)을 말한다.

 

난공불락 [難攻不落]

 

 

공격하기가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않음.

 

 

 

 

지금 서안시에는 실제로 태백산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지형도를 보면 우리 조상들의 이동을 이해할수 있다.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벌판지대즉 지금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더 나은 땅을 찾아 남쪽으로 이주한 우리의 조상은 삼위산과 태백산을 신성시 했다. 알타이산은 지금도 금산이라고도 부른다.

 

출처:삼위산과 태백산즉 지금 서안시일대가 바로 우리조상 단군의 처음 건국지였다.| 고조선영토
history author |2012.05.16. 11:42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60§ion=sc6§ion2 (역사 복원 신문 내용 참고함)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여신은 훙산인(홍산인·紅山人)의 조상"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

우리민족은 천손 민족으로써 마고(麻故)님이 계셨었으며,천부경과 삼일신고는 마고(麻故)님을 증명하는 글이다!

 

 


출처: 석가모니 부처는 단군의 자손이다 [강상원 박사]

 

 

天竺(천축)

 

인도. B.C. 20세기 경 아리아족이 중앙 아시아로부터 남하하여 세계의 지붕 파밀고원을 넘어, 지금의 인더스평원에 들어서자 그 푸르게 초목이 우거진 평원과 양양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를 발한 신두(Sindhu 물, 큰 바다의 뜻)라는 말이 이 강과 이 지방의 이름이 되고, 이것을 중국에서 신두(辛頭)ㆍ연독(身毒)ㆍ현두(賢頭)ㆍ천두(天豆) 등으로 음역. 이것이 차차 달라져 천축이 된 것. 이 천축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때부터 사용. 인도라는 이름도 이 연독 등에서 와전된 것. ⇒중천축(中天竺)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라든가 불교의 '미륵'이 동일한 어원 '미트라(태양신)'에서 유래하였다.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Maitreya)' 라는 말은 본래 '미트라(Mitra)'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미트라는 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 태양신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롭고 충격적인 사실은, 기독교에서 구세주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메시아(Messiah)'라는 말도 바로 이 미트라(Mitra)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불교의 메테야(미륵) 부처님과 기독교의 메시아가 동일한 한 분' 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파라오란 하늘에서 땅을 지배하는 신들의 후손으로서, 태양신 라(Ra)에 의해 점지되며,신과같은 자격으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이집트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여겼습니다.

 

무슬림

 

힌두교 신자들이 8일(현지 시간) 인도 콜카타에서 열린 힌두교 축제 '차트 푸자(Chatt Puja)'에서 태양신 수리아(Surya)를 기리고 있다. 여성들은 축제 기간 동안 가족의 안녕과 사회의 번영을 위해 하루 종일 단식을 한다. /Rupak De Chowdhuri ⓒ로이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태양신 숭배하는 힌두교 신자들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힌두교 시바

 

 

메테야(미륵)

 

메시아(Messiah)

 

삼족오(태양神 상징하는 검은 새)  本本心 本太陽 昻明人

                                                 본본심 본태양 앙명인  

 

사람의 근본은 마음이 근본이며,근본은 태양과 같이 밝으며,

 

이와같은 사실을 아는('앎') 사람을 높이 밝은 사람(성현聖賢)이라 한다!

 

 

막고굴莫高窟

 

Mogao Caves.jpg

막고굴 입구

 

장건의 서역원정, 막고굴(618~712년 사이 그림, 제323굴)

 

 
323굴의 한 무제, 8세기


모가오쿠(중국어: 莫高窟, 병음: m? g?o k?, 표준어: 둔황 석굴, 문화어: 막고굴)은 중국 간쑤 성 둔황에 있는 대표적인 천불동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기원전 전한 시대의 불교 유물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후기까지의 불교 유물이 시대별로 폭넓게 있다.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고,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둔황 석굴이라고 부른다.

 

역사[편집]


둔황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밍사 산(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유림굴, 수협구굴 등 600여 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고 있다. 벽 한 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총 면적은 45,000㎢이다. 둔황 석굴, 둔황 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막고굴이라는 것이 광의의 의미에서는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에 간단히 막고굴이라고 한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양에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양의 것으로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의 북부는 장인의 주거지로서 이곳에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벽화의 양식으로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 북양과 계속된 북위 때에는 서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제작된 불전, 천불 등이 그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북주와 수당에 이르면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석가설법도 등도 이때 그려지게 된다.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 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북송 때 서하 지배하에 들면서, 둔황의 가치가 하락하여, 점차 그 수가 적어지고 서하 때의 것은 20개, 원나라 때 석굴이 7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한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1900년, 둔황의 문헌이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발견 이후에도 막고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둔황 석굴의 재현[편집]


장경동[편집]


1900년 6월 22일 둔황 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왕원록)가 제16굴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공명음을 듣고는 막혀 있던 밀실을 발견하였다. 길이가 2.6m, 높이 3m의 이 석굴에는 5만 점의 고문서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둔황 유물의 정수이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17굴(장경동)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유물은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 시대에서 북송까지의 고문서와 고대악기, 고화, 고서 등등이었다.

 

변경 지역이라 잦은 이슬람 등 이교도의 침입에 파괴될까 봐 아예 중요 문화재들만 모아서 제16굴의 보조굴에 모아서 폐쇄를 했던 것이 몇 백년 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된 것이다.

 

1907년 오렐 스타인이 이곳을 관리하던 도사 왕위안루(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장경동에서 약 7,000점의 유물을 유출하여 대영박물관에 가져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연구는 다시 둔황학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 또 한 번 7,000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유출하게 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에 묻어져 나간 것이다.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을 비롯한 16개의 국가가 회수(淮水)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 304~329)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 386~534)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명칭의 유래[편집]


5호(五胡)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 갈(?), 강(羌) 등 다섯가지의 오랑캐(胡:비한족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를 가리키는 말인데, 갈족은 흉노의 일파로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갈족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을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에서 탁발부(拓跋部), 모용부(慕容部), 독발부(禿髮部), 걸복부(乞伏部)가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민족의 구체적 수를 헤아리는 데 별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5라는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변천 과정[편집]
 

 

위진 남북조 시대(220~589) 왕조들의 계통도: 위진 시대는 220~420, 남북조 시대는 439~589


 

서진 말기에 일어난 황위 계승 다툼은 엄청난 규모의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진은 황족을 왕으로 봉하며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 결과 황위 계승권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 여럿 존재하였다. 8명의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인 이 내란을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팔왕의 난은 306년에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서진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8왕의 난 당시 왕족들이 전투를 위해 중국 내지에 정착해 살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때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서진의 쇠퇴를 호기로 삼아 304년 병주(?州 ; 지금의 산서성)에서 자립해 한(漢)을 세웠다. 같은해 사천(四川)에서도 이웅(李雄)이 자립하여 성한(成漢)을 건국하였다. 감숙(甘肅) 지방에서도 서진의 양주자사였던 장궤(張軌)가 독립적인 정권전량(前凉)을 세웠으며 탁발부는 대(代)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연은 갈족 출신의 석륵과 한인 출신 장군 왕미(王彌)를 시켜 병주 일대를 공략하고, 308년 황제를 칭했으나, 310년에 죽고 아들 유화(劉和)가 이를 계승하였다.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 유총(劉聰)이 제위를 찬탈했다. 유총은 311년에 낙양(洛陽)을 함락하고 서진 회제(懷帝)를 붙잡았다.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 후 장안(長安)에서 민제(愍帝)가 옹립되었으나, 316년에 유총에게 패하여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에 서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가 남쪽의 건업(建業)에서 진을 재흥시키니 이 나라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은 유총 사후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요(劉曜)가 승리하여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 그러나 하북 정벌에 나섰던 석륵이 자립하여 하북·하남·산동을 장악하여 낙양을 경계로 유요 정권과 화북을 양분하게 되었다. 석륵 또한 국호를 조(趙)라고 하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유요 정권은 전조, 석륵 정권은 후조(後趙)라고 불렀다. 328년 유요가 낙양을 탈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석륵의 조카 석호(石虎)에게 대패하여 포로가 된 뒤 살해당하니, 전조는 국력이 쇠퇴하여 후조에게 멸망하였다.

 

화북 대부분을 장악한 후조에서는 333년 석륵이 죽고 석홍(石弘)이 즉위했으나 석호가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석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석호는 수도를 업(?)으로 옮겼고, 이 시기가 후조의 최전성기였다. 349년에 석호가 죽자 석륵의 양자 석민(石閔)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하였다. 석민은 이후 본래 성인 염씨(?氏)로 돌아가고 염위(?魏)를 세웠다. (염위는 워낙 단명한 왕조라 16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후조는 351년에 염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염위는 이민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였고 다수의 한인이 갈족을 상대로 대량의 학살을 벌였다.

 

한편, 337년 요서(遼西)에 근거지를 둔 모용부가 모용황(慕容?)을 중심으로 전연(前燕)을 세우고, 349년 이후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중원에 진출하였다. 전연은 352년에 염위를 멸망시켰으며, 같은 시기 섬서(陝西) 지방에서 저족의 부건(?健)이 장안에서 전진(前秦)을 건국(351년)하였다.

 

화북이 혼란해지자 동진의 실권자 환온(桓溫)은 347년, 성한을 멸망시켜 촉(蜀) 지역을 장악하고 북벌을 감행하여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전진의 국력이 증가해 360년에는 화북을 전연과 양분하였다. 부건의 뒤를 계승한 부견(?堅)은 뛰어난 인물로 한인 왕맹(王猛)을 등용해 국력을 키우며 대대적인 정벌로 각 나라를 정벌해 376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진 정벌을 계획하여 100만이라 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가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군에게 대패한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은 단번에 쇠퇴하고, 각 민족이 제각기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북·하남·산동 일대에는 후연(後燕)이 건국되고, 병주에는 대(代 ; 북위(北魏))와 서연(西燕)이 세워졌다. 섬서에는 후진(後秦)과 서진(西秦)이 생겼고, 감숙에는 후량(後凉)이 태어났다. 그 외에도 감숙 지방에는 여러 민족에 의해 약소국가들이 할거하였다.

 

이들 가운데 모용수(慕容垂)의 후연과 요장(姚?)의 후진이 가장 강력했다. 후연은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진은 전진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하였고 다시 화북을 동서로 양분하였으나, 탁발부의 북위와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국한 하(夏)가 이들을 누르고 강대해졌다. 395년에 북위에 패배한 후연은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으로 분열되었고, 대부분의 영토를 북위에게 빼앗겼다. 후진 또한 하에게 공격을 당해 영토를 빼앗기다가 417년 동진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유유는 410년에 남연도 멸망시켰고, 그 공적으로 선양을 받아 송(宋)을 건국한다.

 

하는 유유가 물러간 뒤 장안을 탈취해 북위와 함께 화북을 양분했으나, 427년 북위에게 패한 뒤 쇠퇴를 거듭하다 431년에 멸망당하고, 북위는 436년에 북연을, 439년에 북량(北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니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시작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사회[편집]


민족 융합설[편집]


화하족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민족적 자아의식은 없었다. 한대에 이르러 중원의 사람들이 국가 강역 내 일개 공동 민족이며, 그 외 지역의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한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생겨났다.

 

중국 사학자들은, 오호십육국시대는, 중국의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대량 유입된 시기로서, 이후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민족 융합이 일어난 시기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동북쪽에는 오래된 유목 민족 두 개가 존재하였다: 흉노족과 동호족이 그것이다. 흉노족의 한 갈래는 한대에 유럽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갈래(갈(?) 포함)는 오호십육국 시기 철저하게 한족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회 발전[편집]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중국 중원으로 진출한 시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당시 수 년간 이어진 전란 때문이었다. 익주(益州) 사천(四川) 지방, 전량의 하서주랑, 전연의 요하 유역으로는 대량의 중원 난민이 이주해왔다. 실크로드가 이어진 하서의 고장(姑臧) 지방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상을 잇는 길, 실크로드


ABROAD | 이니그마가 담는 세상

월간 아웃도어 | 글 사진 전영광 | 입력 2014.12.18 18:01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41218180108149

 

 

여행이란 길을 걷는 것이다. 굽이진 길을 돌아 가파른 산을 넘고 메마른 땅을 지난다. 그러다 가끔은 달콤한 오아시스를 만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 모른다. 수천 년 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었던 용감한 선인들은 새로운 길을 열었고 그 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 되었다. 바로 동서양의 교역로 실크로드다.

 

 

 

성문 밖에 서있는 낙타가 사막의 시작을 말해주는 듯하다.

 

실크로드의 시작, 장안

 

실크로드는 장안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시작된 실크로드는 서역이라 불리던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 인도에까지 이른다. 비단길이라 불렸지만 이 길을 통해 오간 것이 단지 비단만은 아니었다. 오이, 수박, 마늘, 참깨 등이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고 비단, 도자기, 화약, 제지기술 등이 서역으로 건너갔다.

 

실크로드를 따라온 온갖 진귀한 문물은 이곳 장안에서 다시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장안의 화제'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 위해 각국의 상인과 승려, 그리고 유학생들이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황금기를 맞은 당(唐)대 장안은 인구 100만이 넘는 세계 최대 도시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종교와 문화도 전해지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불교의 전래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북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삼장법사는 불경을 구하기 위해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에서 인도까지 왕복하였다. 2만5000km를 걷는 동안 16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이천 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곳에 잘 닦인 아스팔트가 놓이고 철도가 개설되었다. 장안에서 출발한 기차는 사흘 만에 카슈가르에 도착한다. 이마저도 얼마 뒤면 고속철도로 대체된다고 하니 그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이다.

 

 

 

회족거리에서 옛 국제도시 장안의 북적거림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시안으로 불리고 있는 도시는 과거 찬란했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를 휘감은 웅장한 장안 성벽에서부터 과거 국제도시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장안 성벽은 중국의 성벽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통해 성벽 위에 오를 수 있다. 시원하게 뻗은 성벽 위를 걷다 보면 장안이 간직한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가 눈앞에 그려진다.

 

고루 뒤편에 자리한 회족거리에서는 옛 국제도시 장안의 북적거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회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 하나로, 7세기경부터 아랍지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한 이슬람교도들이다. 동그랗고 하얀 모자를 쓴 회족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국적인 음식을 차려놓고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국적인 맛과 정취를 찾아온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 거리는 늦은 저녁까지 활기가 넘친다. 천 여 년 전 거리의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욕관

 

장안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서쪽으로 달렸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철의 실크로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기차는 생각보다 쾌적했다. 다소 무료한 시간이 문제였지만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횡단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불평할 것은 못되었다. 기차는 란저우(蘭州)에서 황하강을 건너 장예를 지나 가욕관에 다다른다.

 

 

 

 

 

 

하서회랑의 중간에 위치한 가욕관. 파란 하늘아래 홀로 솟은 흙빛 토성에선 비장함 마저 감돈다.

 

 

 

하서회랑은 서역에서 몰려오는 이민족을 막아내는 전략 요충지였다.

 

가욕관은 란저우에서 둔황에 이르는 좁은 협곡인 하서회랑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하서회랑은 중국 중원을 지배하는 왕조가 서역에서 몰려오는 이민족을 막아내는 전략 요충지였다. 중국대륙을 내달려온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 바로 가욕관이다. 말하자면 유목문화권과 농경문화권의 경계였던 셈이다.

 

현재의 가욕관은 14세기 명대에 지어진 것이다. 파란 하늘아래 홀로 솟은 흙빛 토성에선 비장함 마저 감돈다. 서문에 올라서면 눈앞으로 메마른 땅이 끝없이 펼쳐진다. 성문 밖에 서있는 낙타가 이곳에서부터 사막이 시작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둔황

 

둔황은 예나 지금이나 실크로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시다. 실크로드는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만나면서 몇 갈래의 길로 갈라지는데 둔황이 바로 그 교차로다. 서역에서 목숨을 걸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넌 상인들은 둔황에 이르러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가 만나면서 둔황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교차로가 되는 둔황.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던 도시, 둔황.

 

둔황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막고굴이 발견되면서다. 명사산 동쪽 절벽에서 자리한 천여 개 석굴에는 고문헌과 불교벽화가 가득했다. 4세기에서부터 천 여 년 동안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각 시대에 따른 불교의 모습, 그리고 실크로드를 오간 다양한 민족의 생활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덕분에 실크로드의 역사가 오늘날에 생생히 전해질 수 있었던 것. 그러니까 막고굴은 실크로드 최대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투루판

 

서쪽으로 달리던 기차가 멈춰선 곳은 신장 위구르자치구 투루판에 이르러서다. 신장 땅으로 들어서니 기존에 떠올리던 중국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민족 구성도 위구르 족이 70%에 이른다. 투루판은 위구르어로 '움푹 들어간 땅'을 의미한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8~105 정도인데 가장 낮은 곳은 해수면보다 낮은 -154m일 정도로 이스라엘의 사해 다음으로 낮은 지형을 나타낸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한 지역이기도 한데 불타오르는 듯 붉은 화염산은 섭씨 70도가 넘는다. 바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곳이다.

 

 

 

투루판은 위구르 어로 '움푹 들어간 땅'을 의미한다.

 

 

 

투루판은 흉노, 위구르, 몽골 등 여러 이민족이 교차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붉은 화염산은 섭씨 70도가 넘는다.

 

투루판은 기원전부터 흉노, 위구르, 몽골 등 여러 이민족이 교차하는 문명의 교차로이자 전쟁터였다. 시내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는 고창국의 흔적인 고창고성의 폐허가 남아있다. 삼장법사가 인도로 향하던 길, 고창 왕의 간청으로 이곳에서 한 달간 설법했다고 한다. 흙먼지가 가득한 폐허에는 아직도 삼장법사가 머물던 사원의 자리가 선명히 남아있다.

 

카슈가르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난 실크로드는 카슈가르에 이른다. 카슈가르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같은 스탄 국가들이 마주한 국경의 도시다. 그리고 이번 여정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카슈가르의 중심에 자리한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널찍한 시장 내에는 비단, 카펫에서부터 견과류, 향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 걸어왔기 때문일까. 어느 물건 하나 예사로 보이는 것이 없다. '저 물건은 어디에서 만들어져 어떤 길을 따라왔을까' 떠올려본다. 오늘날 시장에서 각지의 다양한 물건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나아가 더 편리한 세상을 살게 된 데에는 험한 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상인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이윤추구였을지 모르지만 덕분에 문명은 교차하고 인류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카슈가르의 국제시장. 비단, 카펫에서부터 견과류, 향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실크로드는 거친 길이다. 북쪽으로는 천산 산맥이, 남쪽으로는 곤륜 산맥이 버티고 있고 그 사이에는 죽음의 사막이란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자리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거친 길 위에서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실크로드를 걷는다는 것은 오늘날 어떤 의미일까?

 

오래 전 동서양을 연결하고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던 길. 그 흔적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오아시스 국가들의 흔적도 폐허가 된 토성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유실된 벽화는 그 시대와 함께 잃어버린 흔적을 상상하게 한다.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 속에선 용감한 선인들의 무용담이 들려온다. 실크로드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길이다. 세상을 잇는 그 길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카슈가르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같은 스탄 국가들이 마주한 국경의 도시다.

 

글 사진 전영광 / webmaster@outdoornews.co.kr

 

 

이와같아,

 

지구 문화는 한민족으로 부터 시작 되고 발전 된것입니다.저 모든것들이 한민족의 문화 흔적입니다.중국 문화로 이해하고 있는 모든것이 한민족 문화입니다.카슈가르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같은 스탄 국가들이 마주한 국경의 도시다.<== 이들나라가 우리 한민족 이었으며,한민족 형제들 모습입니다.

 

중국 역사가 우리 역사고,우리 역사가 중국 역사인것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대규모의 민족 융합이 일어나,니 나라 내 나라,니 민족 내 민족 할께 없는 것입니다.

 

서로 잘 먹고 자~알 살아가야 할것입니다.

 

 

젊어서 당신 삶 앞에 건강이라는 문제 해결 않하고,매일 딩가딩가 하고만 살다간 고통과 죽음은 예고없이 닥칩니다.

 

늙으면 누구도 孤老病死에서 벗어날수 없고 벗어나려면 건강할때 건강 챙기며 사십시요.

 

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고 세월가면 갈수록 당신 몸은 병들어 고통뿐이 없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

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죽는것도 않 죽겠다고 하면 않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병든자(者),장애인분들은 현대의학의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과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城)은,선지식인이 잘난 당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몸뚱이를 만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 =  건강健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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