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송총(高松塚)의 피장자(被葬者)는 누구인가?
연개소문(淵蓋蘇文)... 그는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이자 무장(武將)으로 대당항전(對唐抗戰)을 총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42년 대신(大臣) 108명을 몰살시키고 영류태왕(榮留太王)을 시해한 뒤 보장태왕(寶藏太王)을 옹립한 사실을 들어 그를 역신(逆臣)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그를 1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하였다.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645년에 친히 1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을 결행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비사성(卑沙城), 백암성(白巖城) 등을 함락시켰지만, 안시성(安市城)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을 비롯한 고구려 군민(軍民)의 끈질긴 저항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전략에 말려들어 패배,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이 10만 대군을 동원, 후퇴하는 태종(太宗)의 당군(唐軍)을 추격하여 어니하(淤泥河)에서 태종(太宗)의 왼쪽 눈에 부상을 입히고 강소성(江蘇省) 비주(邳州)의 애산(艾山)에서 설인귀(薛仁貴)의 부대를 격파한 이야기는 지금도 화자(話者)가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또 661년 8월에는 직접 고구려군을 이끌고 사수 전투(蛇水戰鬪)에서 방효태(訪效泰)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들을 전멸시켜 중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의 고사(古史)에 남아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각인된 고구려(高句麗) 최후의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일본 나라[奈良]시대의 제왕 덴무왕[天武王]과 동일인물이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을 해석한 이영희(李英熙)의 저서 '노래하는 역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 학설은 일본의 재야사학자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가 제창한 것이었다.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는 어째서 천무일왕(天武日王)을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고 주장한 것일까? 그 근거는 우선 1972년 오사카[大阪] 부근의 나라현[奈良縣] 아스카무라에서 발견된 고송총(高松塚)이라는 고분에서 찾을 수가 있다.
고송총(高松塚)은 고구려식 고분 특유의 4방형 석총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고분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네명의 여인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문제는 이 벽화 속 여인들의 복장이 모두 고구려 귀족의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내세워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고 역설해 온 일본의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또는 한국의 우위를 인정하기 싫어서 이 고분벽화는 북위(北魏)나 또는 그 영향을 받은 도래인(渡來人)의 작품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나 지식인들 간에는 이 고송총의 벽회에 그려진 여인들의 복장이 한민족(韓民族) 고대 국가의 것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일본의 고대사를 동아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좀더 엄격히 말하면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연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고분 석실의 내부는 가로 103.5Cm, 세로 265.5Cm, 높이 113.4Cm의 크기다. 석곽의 내면에는 3~7mm 두께의 회칠이 되어 있다. 석실 안에 있던 목관은 옻칠이 되어 있었으나, 습기로 나무가 썩어 바닥 부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석실에서 나온 부장품으로는 호박으로 된 구슬 2개, 유리로 된 구슬 8개, 은장대도(銀裝大刀) 1자루와 해수포도경(解殊浦度鏡)이란 거울 1개,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못 10개, 파편 3개 등이 발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무덤의 크기가 일반 고분에 비해 작기 때문에 고대 일왕(日王)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출토된 구슬과 칼과 거울은 일본 국왕의 상징이라는 3종의 신기(神器)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고분은 분명 고대 일왕(日王)의 무덤이라는 한 물증이 되어 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 유물들이 모두 흩어진 채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고송총(高松塚) 고분의 특징은 벽화라고 할수 있다. 고송총(高松塚) 고분벽화에는 남포직할시(南浦直轄市) 강서구역(江西區城) 삼묘리(三墓里)에 있는 강서대묘(江西大墓) 고분벽화처럼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데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가운데 남벽에 그려져야 할 주작은 보이지 않으며,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다. 일본의 고고학 전문가들이 고분의 축조 방법이나 유물, 벽화의 안료나 기법, 양식들을 종합하여 추정해 낸 고송총(高松塚)의 축조 연대는 대략 7세기 중엽에서 말엽이다. 문제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점이다.
고송총(高松塚) 고분벽화를 감정해본 에가와 나미오[江上渡夫]는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벽화에서 사신도(四神圖)가 발견되는 점을 들어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고분은 대개 왕족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비록 주작(朱雀)이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역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고송총(高松塚)은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전승한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이 무덤의 피장자(被葬者)가 고대 일본의 왕족일 개연성은 대단히 크다고 주장했다.
고송총(高松塚)의 벽화가 7세기 중엽에서 지통조(持統朝) 말기까지의 작품이라는 일본 학계의 결론. 지통조(持統朝)라면 686년에서 696년까지다. 그 시기에 사망한 일왕(日王)이나 왕족급의 인물은 대진왕자(大津王子)와 초벽왕세자(草壁王世子), 고시왕자(高市王子)와 천무일왕(天武日王) 이 네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네 사람 가운데 한명이 고송총(高松塚)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인데, 당시 출토 유골을 X-Ray선으로 연구해 본 학자는 피장자(被葬者)에게 만성 질환이나 소모성 질환이 있다거나 또는 장기간 자리에 누워 있다가 죽은 흔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어떤 원인에 의해 급사(急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또 유골을 조사해본 학자는 피장자(被葬者)의 사망 연령이 치아로 판별해 볼때 40세~50세 장년자 또는 그 이상일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검사 결과에 따라 우선 24세에 사망한 대진왕자(大津王子)와 28세에 죽은 초벽왕세자(草壁王世子)는 피장자(被葬者) 대상에서 제외된다. 남는 대상은 고시왕자(高市王子)와 천무일왕(天武日王)인데, 고시왕자(高市王子)는 사망시의 나이가 42~43세로 의학적인 소견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골의 X-Ray선 연구 결과 급사(急死)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일본 중서부에 위치한 월국(越國)으로 달아나다가 전사한 천무일왕(天武日王)의 경우도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출토 당시 유골과 부장품들이 석실 안에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도굴꾼의 소행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돈이 될 만한 구슬과 거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약하다. 에가와 나미오[江上渡夫]는 누군가 권력자의 능묘(陵墓)를 황폐하게 하졍?목적에서 관 내부의 유골을 부러뜨리고 뼈를 여기저기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유골 가운데 두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사후의 생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두골과 몸 벼를 분리시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도굴꾼을 시켜 두골을 훔치게 한 사람은 피장자(被葬者)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다시 말하자면 피장자(被葬者)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시왕자(高市王子)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천무일왕(天武日王)이 니자랑(尼子琅)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천지일왕(天智日王)의 아들이었다. 천지일왕(天智日王)의 아들로 태어나 국왕이 되고 싶은 욕심에 임신변란(壬申變亂)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천무일왕(天武日王)에게 자리를 빼앗긴 뒤 13년간이나 숨죽이고 살았던 고시왕자(高市王子)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죽은 천무일왕(天武日王)에게 보란 듯이 앙갚음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왜 고송총(高松塚)의 무덤이 다른 일왕(日王)의 무덤에 비해 규모가 작을까 하는 의문도 자연히 풀리게 된다. 고시왕자(高市王子)는 자신의 생부인 천지일왕(天智日王)을 암살한 천무일왕(天武日王)에게 그 무덤도 크게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송총(高松塚)에서 발굴된 벽화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식 복장을 한 4명의 여인들, 그 4명의 고구려 여인들에 둘러싸인 천무일왕(天武日王)은 결국 고구려(高句麗)의 대막지리(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던 것이다.
(2)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망 기록은 과연 정확한가?
삼국사기(三國史記) 연개소문(淵蓋蘇文) 열전(列傳)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중국 측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북송(北宋)의 신종(神宗) 황제가 자를 개보(介甫)라 했던 왕안석(王安石)에게 "당(唐)의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왕안석(王安石)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는 비상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동양 삼국의 정사(正史)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666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반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664년 10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한 점은 그의 유언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달(664년 10월, 고구려 대신(大臣) 개금(蓋今)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자식들에게 유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목하여 작위를 다투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외국(外國)인 고구려(高句麗)의 국왕(國王)도 아닌 대신(大臣)의 죽음이 기록된 것도 그렇지만 고구려 대신(大臣)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고 사망장소를 명기한 것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게 한다. 고구려 대신(大臣)이라면 고구려에서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굳이 그 장소를 밝힌 것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줄곧 고구려에만 있지 않았던 점을 시사한 기록이 아닐까? 또 일본의 정사(正史)에 고구려인, 그것도 국왕도 아닌 대신(大臣)의 유언이 실려 있다는 점도 이상하다. 입장을 바꾸어 한국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일본 대신(大臣)의 유언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 내용도 묘하다. 거기에는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그 아들 형제가 불화를 일으켜 나라가 망하게 된 훗날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고, 이렇게 형제간에 불화하는 것이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경고도 곁들여 있다.
연남생(淵男生)의 묘지명(墓地銘)에는 연남생(淵男生)이 28세 대에 막리지(莫離支) 겸 상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며 의봉(儀鳳) 4년 정월에 46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새겨져 있다. 의봉(儀鳳) 4년은 679년이므로 남생이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은 해는 서기 662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666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664년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연남생(淵男生)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莫離支)의 자리에 올랐다고 기록된 묘지명(墓地銘)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죽기 전에 자신의 작위를 맏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막리지(莫離支) 작위를 이어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연남생(淵男生)의 묘지명(墓地銘) 기록에 다른다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망연도는 연남생(淵男生)이 막리지(莫離支) 작위를 이어받은 서기 662년이어야 맞는다.
그렇다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망연도는 중국 사서나 이를 답습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서기 666년,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기 664년, 그리고 연남생(淵男生)의 묘지명(墓地銘)에는 662년으로 되어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과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언제 죽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고구려의 대신(大臣)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누군가 유언을 알려주고 그 내용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리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상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유언을 일본에 알려주었던 것일까? 혹 연개소문(淵蓋蘇文) 그 자신은 아니었을까?
그의 사망연도가 3가지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사실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망명[asylum]을 했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를 전혀 도외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망명(亡命)의 글자 뜻은 목숨(命)을 잃는다(亡)는 것이다. 망명은 적어도 떠나온 나라에서는 정치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지 않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이라면 그 사망연도가 3가지로 기록된 저간의 사정이 납득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즉, 연개소문(淵蓋蘇文)은 662년 첫째 아들 남생(男生)에게 막리지의 자리를 넘겨주고 일본으로 건너가 664년 10월 자신의 사망을 공식화하고, 이러한 소문이 666년 당나라에 알려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할만한 사료적 근거가 바로 고송총(高松塚) 고분벽화인 것이다.
(3)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는 일본인이 아니다.
수서(隨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서기 608년의 기록에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라는 정체불명의 왜왕(倭王)이 등장한다. 그 왜왕(倭王)은 사신을 통해 "해 뜨는 곳의 천자(天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니 별고 없으신지....." 운운하는 국서(國書)를 수황(隨皇) 양제(煬帝)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양제(煬帝)는 "오랑캐의 글에 무례함이 잇으니 다시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라."고 신하에게 불쾌하다는 말을 남겼다는 기록이 수서(隨書)에 실려 있다. 당시의 국제 관례상 일개 변방에 있던 왜왕(倭王)이 중원 왕조의 황제(皇帝)에게 보낸 국서(國書)로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과연 이 무렵 왜국(倭國)에는 자신을 해 뜨는 곳의 천자(天子)라고 자처할 만큼 배짱 두둑한 국왕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이 무렵 왜국(倭國)의 공식 군주(君主)는 추고여왕(推古女王)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일개 섬나라의 여성 국왕이 당대의 슈퍼 파워인 수나라의 황제에게 자신을 해 뜨는 곳의 천자라고 자칭할 수 있었겠는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 시기에 용명왕(用明王)의 아들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숙모인 추고여왕(推古女王)을 대신하여 섭정(攝政)을 했다고 전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일본 정사(正史)의 기록이 확살하다면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왜왕(倭王)에 즉위하는 것이 정상적인 관례일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아닌 추고여왕(推古女王)이 왕위(王位)를 계승했고, 게다가 실질적인 통치권은 추고여왕(推古女王)이 쥐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국가 통수권자가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였다고 한다면 추고여왕(推古女王)이 아닌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왜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는 추고여왕(推古女王)에게 왜왕(倭王)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실질적인 통치력은 자신이 쥐고 있었을까?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는 추고여왕(推古女王)이 가공의 인물이라고 추정한다. 이 시기의 진짜 왜왕(倭王)은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였다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를 국왕(國王)이 아닌 왕세자(王世子)의 신분으로 격하시킨 것은 일왕(日王)의 혈통은 고귀하고 순수하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전통을 성립시키기 위해 억지로 조작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이다. 왕세자(王世子)가 나이가 어려서 모후(母后)가 섭정(攝政)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어도 국왕(國王)을 대신해 왕세자(王世子)가 섭정(攝政)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는 본래 왜왕(倭王)이었던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추고여왕(推古女王)의 섭정(攝政)으로 왜곡되어 기록된 이유에 대해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왔다는 말인가?
(4)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는 달두가한(達頭可汗)의 이명(異名)이었다.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는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본래 돌궐족(突厥族)의 지도자였던 달두가한(達頭可汗)이었다고 주장했다.
달두가한(達頭可汗)은 수(隨)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병력을 수습하여 동쪽으로 이동, 599년 10월에는 한안(桓安)에서 한홍(韓洪)이 이끄는 수(隨)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수서(隨書)에는 달두가한(達頭可汗)과 함께 최후까지 군사행동을 같이 했던 도람가한(都藍可汗)이 부하에게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어 "발해(渤海)에 별이 떨어졌다."는 문헌이 보인다. 발해 부근에서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이끄는 돌궐족(突厥族) 군사들은 수나라 군사들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던 것 같다. 이것이 서기 599년 12월의 일이다.
별이 떨어졌다는 것은 고대 기록에서 중요한 사람이 죽었다는 뜻인데, 그 중요한 사람이란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돌궐족(突厥族)의 지도자 달두가한(達頭可汗)을 가리킨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수서(隨書)는 여기까지 달두가한(達頭可汗)의 행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별이 떨어졌다는 장소가 발해(渤海)다.
발해 동쪽으로는 비사성(卑沙城), 요동성(遼東城), 안시성(安市城) 등 고구려의 방위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달두가한(達頭可汗)은 발해에서 죽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군사동맹 관계에 있던 고구려 땅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은 수서(隨書) 본기에 서기 600년 1월 고구려(高句麗)가 돌궐(突厥), 거란(契丹)과 함께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사료인 팔번우동훈(八幡愚童訓)에 의하면 600년에 이상한 적군 43만명이 침입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예장기(豫章記)에는 철인(鐵人)이 오랑캐 군사 8천명을 거느리고 북구주(北九州)에 상륙하여 파마국의 명석포를 내습했다고 씌여 있는데 이상한 적군 43만명이라든가 철인이 이끄는 오랑캐 8천명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이 기록들은 달두가한(達頭可汗)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倭國)으로 진격해 들어갔던 것을 반영한 문헌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철인(鐵人)이라 한 것은 투르크(Turk)의 한자 표기인 돌궐(突厥) 또는 철륵(鐵勒)의 '철'을 가리킨 말로 해석되지만, 글자 그대로 철제 갑옷이나 무기를 지닌 사람이라 해석해도 이 철인이 이끌었다는 군사가 오랑캐로 표현된 것을 보면 적어도 한반도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또 이상한 적군 43만명이나 철인이 이끌고 왔다는 8천명도 정확한 숫자가 아닌 단순히 많다는 의미로 쓰이는 일종의 수식어일 가능성이 높다.
달두가한(達頭可汗)이 도착했다는 오사카[大阪] 부근의 명석포 해안에는 반구사(班鳩寺)라는 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지금도 매년 2월 승군회(勝軍會)라는 축제가 열려 달두가한(達頭可汗)의 일본 상륙을 기념하는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이 절에는 특히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국, 한반도, 일본의 지도가 들어가 있는 지구의(地球儀) 모양의 이상한 돌이 소장되어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 동양 문화권에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하여 지구의로 제작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크라테스(Krates)였는데, 아마도 이러한 지식이 페르시아로 전해지고 다시 페르시아에 접해 있던 서돌궐에 전해진 것을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일본에 올때 가지고 왔거나 아니면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법륭사라는 절에는 턱수염을 기른 서양 얼굴의 기사 4명이 말을 타고 수렵하는 그림의 유명한 사기사자수문금(四騎獅子狩文錦)이란 페르시아 비단이 소장되어 있는데, 법륭사의 전승으로는 이 비단이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 때에 제작된 물건이라고 한다. 이것 또한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일본에 올때 가지고 온 물건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라는 증거는 많지만 여기서는 직접적인 논제가 아니므로 이만 생략하고 고구려(高句麗) 보장태왕(寶藏太王)의 아버지인 대양왕(大陽王)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5) 대양왕(大陽王)은 의자왕(義慈王)의 전신(前身)이었다.
정변(政變)을 일으켜 스스로 대막지리(大莫離支)에 올라 고구려(高句麗) 최고의 실권자로서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태왕(榮留太王)을 제거하고 대신 왕위에 옹립한 인물이 바로 보장왕(寶藏王)이다. 신당서(新唐書)는 보장태왕(寶藏太王)이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대양왕(大陽王)이 죽은 영류태왕(榮留太王)의 아우였다고 전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皇極記)에는 고구려의 사신이 왜왕(倭王)에게 "작년 6월에 왕의 동생이 죽었고, 9월에 대신(大臣)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가 태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태왕의 동생의 아들로서 왕위에 세우고 자기와 동성(同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今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진술한 기사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양왕(大陽王)은 614년 6월에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보장태왕(寶藏太王)의 아버지가 643년 1월에 왕(王)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대양왕(大陽王)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거사(巨事)를 일으키기 1년 전인 641년 6월에 죽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역사를 깊이 연구한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는 대양왕(大陽王)이 그때 죽었던 것이 아니라 백제(百濟) 제31대 국왕에 등극한 의자왕(義慈王)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놀라운 학설을 내놓았다.
보장태왕(寶藏太王)의 아버지인 대양왕(大陽王)이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었다는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의 주장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대양왕(大陽王)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서기 641년 백제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그해 백제(百濟)에서는 무왕(武王)이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등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는 다른 내용이 없어 이 왕위 계승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무왕(武王)이 죽고 난뒤 백제에 일대 정변(政變)이 일어났던 것을 알리는 내용이 나온다.
'백제에 보냈던 사신 아담비라부(阿曇比羅夫)가 축자(筑紫)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말하기를 "백제국에서는 천황(天皇)이 붕어(崩御)하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사절을 보냈습니다. 신도 조문사절을 따라 축자까지 왔습니다만 장례식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에 먼저 혼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 나라에선 대란(大亂)이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에 파견되었던 왜국(倭國)의 사신이 자기 나라에 돌아와 보고하는 가운데 백제에 대란이 일어났던 사실을 알리고 있다. 무왕(武王)이 죽은 직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백제에서 권력 공백기에 왕위를 둘러싼 일대 정변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의자왕(義慈王)은 자기와 맞섰던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했는데 그 명단의 일부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금년 정월 국왕의 어너미가 돌아가셨습니다. 또 왕의 동생 아들인 교기(翹岐)와 동복의 누이 등 여자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거기다 이름 높은 사람 40여명이 섬으로 쫓겨났습니다.'
본문에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교기(翹岐)의 신분은 무왕(武王)의 동생 아들이었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동궁(東宮)으로 책봉된 무왕(武王)의 친아들이었다. 동궁 또한 태자라는 의미다. 태자의 신분이 아니었다며 이미 무왕(武王) 33년에 백제의 태자로 책봉되어 있던 의자왕(義慈王)과 계승권을 둘러싼 쟁탈전을 벌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에 두명의 태자가 탄생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무왕(武王)이 죽기 직전 일어났던 다음 기사에 주목해야 한다.
'무왕 38년(637년) 2월 왕도에 지진이 있었고, 3월에 또 지진이 있엇다. 41년 정월에 패성(稗星)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한 참위설(讖緯設)은 한서(漢書)를 편찬한 반고(班固)에 의해 처음 사서에 도입된 후 동양 삼국의 사서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동양 삼국의 고대 사서에 보이는 천지변화의 이상한 기사는 대개 정면으로 다루기 어려운 왕권의 변동을 참위설적인 표현으로 암시한 것인데, 위 글에 나타난 왕도의 지진 또한 왕도에서 땅의 요동, 즉 신하나 민중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뜻이고, 나쁜 기운을 분출하는 패성 곧 혜성의 등장은 서북쪽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나타났다느 것을 암시한 기사다.
왕도의 지진 곧 무왕에 대한 신하의 반란이란 무왕이 자기 아들을 동궁(東宮)으로 세우려 하자 태자(의자왕)가 반발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부은 그 무렵 서북쪽에 패성이 나타났다는 구절이다. 백제의 서북쪽이면 고구려다. 결국 고구려의 난신적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이다. 서북쪽에 나타났다는 난신적자는 대양왕(大陽王)이었다.
즉 무왕(武王)이 교기(翹岐)를 동궁으로 세우려 하자 전부터 백제의 태자로 책립되어 있던 대양왕(大陽王)이 의당 반발했을 것이고, 이때 군사력을 갖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대양왕(大陽王)을 도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진이 일어나고 서북쪽에 패성이 보였다는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참위설적으로 표현한 기사다. 그 후 무왕이 죽자 동궁을 둘러싼 세력과 태자를 둘러싼 세력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이 왕위 쟁탈전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는 연개소문의 군사력을 등에 업은 태자의 판정승으로 끝난다. 그 시점은 대양왕이 죽었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록한 641년 6월경이었을 것이다.
이제 백제의 국왕이 된 고구려의 대양왕은 자신의 등극을 도왔던 연개소문의 강력한 후원세력이 될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영류태왕(榮留太王)과 그 추종세력들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두려워하여 그가 대양왕(大陽王)과 합작, 역모를 꾸밀 수도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인이 백제의 태자로 책립될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6) 서명일왕(舒明日王)과 황극일왕(皇極日王)은 가공의 인물.
앞서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의 본래 신분인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수나라에 항쟁하다가 고구려로 피신했다고 설명했는데 이 시기는 서기 599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달두가한(達頭可汗)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요서지역에 대한 협공작전을 진행시켰던 고구려의 영양태왕(瓔陽太王)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사료에는 그 딸의 이름이 한왕매대오왕(漢王昧大俉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왕매(漢王昧)라는 것은 한왕(漢王)의 누이동생이라는 뜻인데, 6세기에 한나라는 이미 존재하지 않던 국가이므로 여기서의 한왕이란 '대륙에서 건너온 왕'이란 뜻으로 사실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Samarkand) 국왕을 가리킨 것이다. 영양태왕(瓔陽太王)이 이 서역여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대양왕(大陽王)이었던 것이다.
달두가한(達頭可汗)은 고구려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백제로 내려갔는데, 이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혜왕(惠王) 서거(逝去)에 대한 기록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혜왕(惠王)이 성왕(聖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위덕왕(威德王)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는데 즉위한지 2년도 채 못되어 59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혜왕(惠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법왕(法王) 역시 왕위에 오른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서기 600년 5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598년에 위덕왕(威德王)이 죽은지 1년 남짓한 사이에 백제의 제28대 국왕과 제29대 국왕 두 대(代)에 걸쳐 유고(有故)가 생긴 것으로 이러한 사례는 흔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 변고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결국 백제의 제28대 국왕인 혜왕(惠王)은 달두가한(達頭可汗)에게 살해되었고 29대 국왕인 법왕(法王)으로 등극했던 달두가한(達頭可汗)은 왜국(倭國)으로 망명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달두가한(達頭可汗)은 백제도 수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아니면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즉 세계 7대 인종의 통치자로 수나라와 혈전을 벌였던 달두는 고구려, 백제, 왜국 3개 국가의 군사동맹을 도모하여 수나라에 설욕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이예국풍토기(伊子國豊土記)에 인용되어 있는 이예온천의 비문에 보면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법대왕(法大王)이라 새겨져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가장 오래된 사료의 하나라고 한 상궁법왕제설(上宮法王帝設)도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를 법왕(法王)이라 표기하고 있는 점이다. 또 일본서기도 용명왜왕(用明倭王) 원년조의 주석에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를 풍총이법대왕(豊聰耳法大王)이라고 일컫고 있다.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는 백제(百濟) 법왕(法王)이 일본 열도로 건너간 이후의 이름이다.
왜국(倭國)으로 건너가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로 둔갑한 백제의 법왕(法王), 즉 달두가한(達頭可汗)은 당시 명실상부한 일본의 군주(君主)였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달두가한(達頭可汗)을 국왕이 아닌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로 기록하였다. 그 이유는 달두가한(達頭可汗), 즉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의 아들 산배대형(山背大兄) 때문인데 산배대형(山背大兄)은 아버지 달두가한(達頭可汗)의 뒤를 이어 왜왕(倭王)이 되었다. 그러나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쿠데타를 일으켜 산배대형(山背大兄)을 죽이고 고인대형(古人大兄)을 국왕으로 옹립시켰기 때문에 산배대형(山背大兄)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일왕(日王)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인대형(古人大兄)은 백제의 무왕(武王)이 소아입록(蘇我入鹿)의 고모와 관계를 갖고 얻은 아들로, 이 고인대형(古人大兄)을 국왕으로 추대한 소아입록(蘇我入鹿)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인물이 무왕(武王)의 친아들 교기(翹岐)였다. 따라서 고인대형(古人大兄)과 교기(翹岐)는 무왕의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훗날 일본의 역대 국왕은 백제계의 혈통이 명실상부하게 회복되는 환무일왕(桓武日王) 때부터 천지일왕(天智日王)의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이 정통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교기(翹岐=中大兄=天智日王)가 왜국의 실제 왕이었던 산배대형(山背大兄)을 죽인 소아입록(蘇我入鹿)을 다시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어서는 일본 왕실이 저 아득한 옛날부터 한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전통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사서 편찬자들은 나름대로의 묘수를 찾게 된다. 즉 고대에 국왕을 죽이면 어떤 이유로도 면피가 불가능한 대역죄인이 된다. 그러나 산배일왕(山背日王)이나 고인일왕(古人日王)을 대형(大兄)으로 한 등급 내려놓으면 그것은 왕자(王子) 산배대형(山背大兄)과 왕자(王子) 고인대형(古人大兄)의 왕위 쟁탈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서 편찬자들은 산배일왕(山背日王)과 고인일왕(古人日王)을 한 단계 낮춰 산배대형(山背大兄)과 고인대형(古人大兄)으로 기록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려니까 그 선대인 달두가한(達頭可汗) 또한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로 기술하고, 당시는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가 섭정을 했다는 식으로 사태를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다.
(7)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서명일왕(舒明日王)은 백제(百濟) 무왕(武王)을 가리킨다.
앞의 문장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우리는 서돌궐(腺厥)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이 백제의 법왕(法王), 일본의 성덕왕세자(聖德王世子)와 동일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인물은 고구려인 대양왕(大陽王), 즉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다. 영양태왕(瓔陽太王)이 사마르칸트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 대양왕(大陽王)은 무왕(武王)의 장자(長子)가 아니라 원자(元子)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장자(長子)와 원자(元子)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친아들은 장자, 친아들이 아닌 경우는 원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이 원칙에 따르면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무왕의 친아들은 앞에 언급한 교기(翹岐=中大兄)다.
당시 왜국(倭國)의 실제 통치자는 산배대형(山背大兄)이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공식 통치자는 서명일왕(舒明日王)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서명일왕(舒明日王)은 백제의 무왕(武王)이 죽은 641년 같은 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명(舒明) 13년 10월 9일, 천황이 백제궁(百濟宮)에서 붕어(崩御)했다. 18일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했으니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 이때 동궁인 개별황자는 나이 16세에 조문을 읽었다.'
서명일왕(舒明日王)이 백제궁(百濟宮)에서 죽었으며 그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백제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 백제 왕실에서 거행하는 것과 똑같이 왜국 조정에서도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는 뜻이다. 일본 국왕이 죽었는데 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고 기록한 것일까?
서명일왕(舒明日王)이 죽었다는 백제궁은 일본의 궁궐이 아니라 백제의 궁전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것은 백제궁에서 조문을 읽었다는 개별왕자(開別王子)의 존재가 그 점을 입증해준다. 개별왕자(開別王子)는 천지일왕(天智日王)의 시호인 천명개별(天命開別)과 통하니까 훗날 천지일왕(天智日王)이 되는 중대형(中大兄)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는데, 이 중대형이 동궁(東宮)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그가 일본의 태자로 봉해지는 것은 을사변란(乙巳變亂)을 일으킨 645년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641년에 조문을 읽었다는 동궁은 대체 어느 나라 동궁인가? 논리적으로 백제의 동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대형(中大兄) 즉, 무왕(武王)의 친아들 교기(翹岐)가 조문을 읽었다는 장소는 백제의 빈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기(翹岐)는 이때 아직 백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자왕(義慈王)에 의해 제주도로 추방되었다가 왜국(倭國)으로 건너간 것은 642년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당시의 진상을 정리해 보면 백제의 무왕(武王)이 641년 3월에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왜국(倭國)의 조정에서 같은 해 10월 뒤늦게 왜국에 빈궁을 따로 차려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것이 된다. 곧 무왕(武王)은 서명일왕(舒明日王)과 동일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국에는 통치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이 무렵 왜국의 실제 통치자는 달두가한(達頭可汗)의 친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었다. 이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소아입록(蘇我入鹿)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하고 그가 옹립한 고인대형(古人大兄)이 다시 중대형(中大兄)에 의해 실각했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훗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중대형(中大兄)의 혈통을 정통으로 수정, 편찬하기 때문에 산배대형(山背大兄)을 대신할 사서상의 통치자로 서명일왕(舒明日王)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키게 되는데, 이 서명일왕(舒明日王)은 백제의 무왕(武王)을 모델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대형(中大兄=翹岐)의 친아버지가 바로 무왕(武王)이었던 까닭이다. 대형(大兄)은 이미 왜국에서 태자의 뜻이 된다. 중대형(中大兄)은 이미 백제에서 아버지 무왕(武王)에 의해 동궁(東宮)으로 책립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 백제에는 이미 632년 태자로 책봉된 의자(義慈)가 있었다. 태자가 둘이니 무왕(武王)의 사후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이래서 무왕(武王)의 친아들인 중대형(中大兄)과 이미 오래전 태자로 책립되어 있던 의자(義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무왕(武王) 사후 벌어진 백제대란(百濟大亂)의 진상이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