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스크랩] 마리아와 가브리엘

황령산산지기 2007. 2. 1. 11:25

 

 

수태고지 (1850)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캔버스에 유채, 72.4 x 41.9 cm
테이트 갤러리, 런던

 

    지난번에 거장들의 수태고지 그림들을 따라가다가 루벤스에서 멈췄었지요... 이제 2백년을 훌쩍 뛰어넘어 19세기 중반으로 왔습니다.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인 로세티의 그림은 지난번 막판에 소개한 틴토레토나 루벤스의 그림과는 전혀 다르죠? 우렁찬 교향악이나 합창이 배경음악으로 어울렸음직한 그 바로크 회화들과 달리 이 그림의 분위기는 고요합니다. 고요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그리고 좀 무섭습니다.

 

    네, Moon은 이 그림이 좀 무서워요. 이전 그림들에서 땅에 사뿐히 내려앉아 자상하게 말을 건네는 가브리엘 천사는 그 큼직한 날개에도 불구하고 참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로세티의 그림에서 날개도 없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가브리엘은 얼굴까지 잘 보이지 않아서 정말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로 느껴집니다. 이런 신비한 존재는 오싹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죠. 천사와 마리아의 옷, 그리고 실내가 온통 병적으로 하얀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키고요.

 

    이 기이한 존재가 마리아에게 닥칠 영광스럽고도 고통스러운 운명에 대해 알리는 동안, 유난히 앳되어 보이는 마리아는 애처로울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벽 쪽으로 몸을 움츠린 채, 이전 그림들의 마리아와는 달리 천사와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있지요.

 

 

    마리아 앞에는 백합이 수놓인 붉은 천이 결려있습니다.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바로 그녀의 아들 그리스도가 흘릴 피와 그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겪어야할 슬픔과 괴로움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다른 그림들 속 마리아가 비교적 평온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에 이 그림 속의 마리아는 과연 저 가녀린 어깨로 그 모든 짐들을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게 합니다. 강렬한 인상만큼 마음속에 미묘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에요.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이지만 번존스의 그림은 또 다릅니다. 이 그림에서 마리아는 초연한 표정으로 공중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지요.

 

수태고지 (1879)
번존스 Edward Coley Burne-Jones (1833 - 1898)
캔버스에 유채, 250 x 104 cm
머지사이드 국립미술관, 머지사이드

 

    중세 후기부터의 수태고지 그림들에서는 대부분 마리아가 실내에서 독서 중이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 그림에서는 마리아는 밖으로 나와 우물가에 서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야코보 복음서”를 따른 것이지요. 야코보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초기의 저서인데 신빙성이 의심되어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위경(僞經)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참고서적 정도로는 쓰이지요. 야코보 복음서에 따르면 수태고지가 두 번 있었는데 처음에는 마리아가 우물가에 있을 때 공중에서 말소리로 전해졌고, 다음에는 마리아가 집에서 실을 잣고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전했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로세티나 번존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전성기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그림들보다는 오히려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그림들과 닮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열심히 개발한 원근법과 입체감, 바로크 화가들이 도입한 생생한 촉감과 역동성이 이 그림들에서는 사라졌어요. 이 그림들은 평면적이고, 더 함축적이며 훨씬 영묘한 분위기를 띄고 있지요. 이것이 바로 라파엘 시대 이전, 즉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라파엘 전파가 추구하는 것이었죠.

 

 

    번존스의 그림은 왠지 모르게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화면 비례나 구성이나 색조나 전혀 다르지만요. 매끈하게 머리카락을 넘긴 마리아의 머리모양이 비슷해서일까요? ^^ 아니면 번존스 역시 프라 안젤리코처럼 한 귀퉁이에 원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그려 넣었기 때문일까요? 번존스의 그림에서는 낙원 추방 장면이 건물의 부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부조를 뒤로 하고 천사는 인류를 원죄로부터 구원할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립니다.  

 

 

    프랑스 화가 티소의 이 수태고지 그림은 어떤가요? 티소는 멋들어진 의상을 걸친 여인들의 초상을 주로 그리던 19세기 말의 화가인데, 그림은 잘 팔렸지만, 예쁘장하고 매끈하기만 한 그림을 그리는 “초콜릿 상자”용 화가라고 비웃음도 많이 받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수태고지 그림은 그의 일련의 예쁘장한 그림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는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서 마리아는 로브와 망토를 걸친 모습의 오랜 전통을 깨고 아랍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죠. 

 

수태고지 (1886-96)
티소 James Tissot (1836-1902)
종이에 수채와 과슈
브루클린 미술관, 뉴욕

 

    이번엔 우리나라 화가인 운보 김기창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리아는 조선시대 규수의 모습이고 가브리엘 천사는 선녀의 모습인 것이 재미있지요. ^^ 마리아 옆에 물레가 잇는 것이 한국 전통의 분위기를 더해 주지만, 사실 마리아가 실을 잣다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는 설정은 “야코보 원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랍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문화가 비그리스도교권 전통 문화와 절묘하게 결합된 아름다운 그림들이 20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많이 나왔지요.

 

수태고지 (1952-53)
운보 김기창 (1913-2001)
비단에 수묵채색, 76×63㎝

 

    마지막으로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7세기 프랑스 화가 푸생의 그림에서 수태고지 여행을 끝내려고 합니다. 푸생은 고대그리스적인 이상화된 미를 추구해서 신고전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된 화가랍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고대그리스의 조각처럼 이상적으로 엄격하게 균형 잡힌 외모를 자랑하지요. 그래서 그만큼 개성이 없기도 해요. 이 수태고지 그림의 마리아도 대리석 조각 같은 용모를 하고 있지요. 하지만 마리아의 독특한 표정이 이 자칫 지나치게 단정하고 딱딱할 뻔한 그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다른 수태고지 그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에요. 

 

수태고지 (1657)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
캔버스에 유채
국립미술관, 런던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Moon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수태고지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 외에 앞서 소개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과 루벤스의 그림도 아주 좋아하지만 이 푸생의 그림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표정 때문입니다. 사실 푸생의 수태고지는 프라 안젤리코나 루벤스의 수태고지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고 회화적인 면에서 그 그림들만큼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저렇게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것 같은 얼굴을 다른 그림들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푸생의 그림에서 마리아의 얼굴은 자신을 잊고 신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의 순수한 환희를 보여주고 있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얼굴이 저렇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글쓴이 : Moo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