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먼저 감동하고 독자에게 권하는 시.

작성자 : 안시안


華嚴에 오르다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版을 힘겹게 미는 바람 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 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 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김명인. 1993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刊

길은 누구에게도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길은 길을 갈 때 비로소 길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누구나 자신의 생이 아름답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생이 보람된 여행이기를 바란다면 한 걸음 한 걸음에 충실하는 방법 외
다른 방법이 없다. 누구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누구는 부끄러운 삶을
살다 간다. 자신의 앞에 놓인 길, 걸어야할 길을 어떻게 걸었냐의 결과다.
시인은 화엄을 오르고 나는 아직 골목 어귀를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