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설명하자면 말이 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듬성듬성 기른 수염에 대충 질끈 묶은 머리,
여기저기 흙이 묻은 개량한복. 도인이 따로 없다. 정감록 십승지지에 창고 같은 집 짓고, 자유롭게 사는 김진식씨(39). ‘이 사람이 사는 법’
한번 거들떠보자.
#이 사람이 사는 곳:나라가 어떤 난세에 휩쓸리더라도 이곳만은 끄떡없다는 정감록 십승지지 중 한 곳인 경북 풍기 금계리 용천동 산구석.
그가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둔 199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야외수업도 못하게 하지, 특수반 학생들과 정성들여 꾸민 작품전시회에 외부인사 초청도 못하게 하지. 염증을 느낀 그는 2년 만에 학교를 미련없이 떠났다. 그리고 틀어박혀 살 만한 장소를 찾아, 낮이면 소백산맥 구석구석을 누비고, 밤이면 머리맡에 지도를 펼쳐들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곳이 바로 ‘경북 풍기군 금계리 용천동’. 사람들은 모두 뜯어말렸다. “‘지랄 용천한다’는 말이 어디서 나온 줄 알아? 바로 그 용천동에서 나온 말이야.” 난세에도 안전한 곳이라는 십승지지의 전설 때문에 한때 금계리엔 6·25 피란촌이 형성됐었고, 그래서 거칠고 험해 살 곳이 못 된단 소리였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우거진 나뭇가지 수풀을 헤쳐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외딴 마을이었다. 그러나 용천동 마을 어른들은 “자네가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아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 했다. ‘도선대사 비기’에 보면 “용천동은 적선한 집안의 자손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그곳에 움막 같은 창고를 짓고 혼자 먹고 자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운동권 학생 출신, 한때는 중학교 미술교사, 지금은 문화재 보수 및 한옥집을 짓는 대목수. 스무마리 넘는 진돗개를 직접 육종해보기도 한 진돗개 전문가이기도 하며, 4년간 죽령장승보존회 회장을 역임한 장승계승자.
산구석에 처박혀 조각만 하고 싶었지만 속세를 떠나는 건 쉽지 않았다. 먹고 살 돈이 떨어진 것이다. 한옥을 짓는 대목수 일에 눈이 갔다. 지구상에서 자기가 살 집을 스스로 짓지 않는 유일한 동물은 바로 인간. 그는 자기가 살 집 정돈 스스로 짓고 싶었고, 그 집은 반드시 한옥으로 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목수들은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 몇번의 퇴짜를 맞은 끝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며 간청했다. 그 결과, 지금 그의 생업은 대목수이다.
한옥 처마밑에 어울리는 개는 당연히 ‘진돗개’. ‘우리 것’에 눈을 뜨니 기르는 개까지도 전통만 고집하게 되는 모양이다. 한번 관심을 가지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좋은 진돗개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무안, 대전, 해남 전국 곳곳을 가리지 않고 즉시 출동했다. 진도의 어느 집에 어느 진돗개가 있다더란 호구조사까지 외우고 다닐 정도. “서양 개들은 먹이주는 사람밖에 몰라봐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진돗개는 주인의 친척까지 알아서 충성할 줄 알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진돗개 애호가들과 ‘토진회’라는 모임까지 결성했다. 한때는 직접 육종을 해보고 싶어 용천동 자신의 창고집 앞에 진돗개를 스무마리 넘게 키우기도 했다. 사료값을 감당하지 못해 지금은 세마리로 줄였지만.
그리고 가장 최근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장승이다. 2000년, 죽령장승보존회 회장을 맡아 4년 동안 죽령장승제를 주도했다. 그가 장승을 처음 접했던 것은 운동권 학생이던 대학 시절. 87항쟁이 가라앉기 전인 그때, 전국의 대학 앞엔 장승을 세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공동체 정신을 결속시키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구 영남대 앞에 세워진 장승은 바로 그가 깎은 것. 그는 언젠가 장승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장승학교’를 세우는게 꿈이다. “요샌 장승이 상업화하면서 깎는 테크닉만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진짜 복원돼야 하는 건 장승이 가진 공동체 정신인데 말이죠.”
#이 사람의 부인: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이 사람 때문에 두 눈에 콩깍지가 씌어 평생 자란 서울을 떠나 이 시골 산구석에 들어앉음.
그가 부인 김은주씨(40)를 만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은주씨는 영주의 사촌 집에 놀러 왔다 취미로 도자기 강습을 듣게 됐는데, 도자기 선생이 바로 그와 친한 형이었다. 그는 처음엔 은주씨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가 학생운동할 때 음대생들은 옆에서 우아하게 클래식만 연주했던 기억 때문이다. 돈 많고, 고상한 척한다는 게 그가 가진 음대생의 이미지.
그러나 은주씨는 전혀 달랐다. “음악은 ‘조화’라더니 정말 음악하는 사람들은 어디 가도 잘 융화되더라고요. 특히 콘트라베이스는 밑에서 다른 사람들을 받쳐줘야 하는 악기잖아요. 사람이 악기 따라 가나봐요.” 그는 의외로 소탈한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는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색다름에 끌렸다. 둘은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결혼했다. 서울에서 곱게 자란 은주씨는 산골짝 시골생활에 신기할 정도로 잘 적응했다. 신혼여행은 거의 전국일주 수준이었다. 진돗개 관계자들은 호남지역, 장승 관계자들은 영남지역, 처가가 있는 지역은 서울. 은주씨는 공사다망한 그의 관심사를 하나씩 공유하며 함께 전국을 돌았다.
두 사람은 몇년 전, 창고 같은 집을 허물고 멋진 한옥 기와를 올렸다. 언젠간 집 주변을 조각공원으로 꾸미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곳에서 그는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은주씨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게 꿈이다.
“삶의 원칙이오? 뭐 간단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자. 지금처럼만 계속 살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 그는 오늘도 금계리 용천동 골짜기에서 어떤 난세에도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다.
#이 사람이 사는 곳:나라가 어떤 난세에 휩쓸리더라도 이곳만은 끄떡없다는 정감록 십승지지 중 한 곳인 경북 풍기 금계리 용천동 산구석.
그가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둔 199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야외수업도 못하게 하지, 특수반 학생들과 정성들여 꾸민 작품전시회에 외부인사 초청도 못하게 하지. 염증을 느낀 그는 2년 만에 학교를 미련없이 떠났다. 그리고 틀어박혀 살 만한 장소를 찾아, 낮이면 소백산맥 구석구석을 누비고, 밤이면 머리맡에 지도를 펼쳐들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곳이 바로 ‘경북 풍기군 금계리 용천동’. 사람들은 모두 뜯어말렸다. “‘지랄 용천한다’는 말이 어디서 나온 줄 알아? 바로 그 용천동에서 나온 말이야.” 난세에도 안전한 곳이라는 십승지지의 전설 때문에 한때 금계리엔 6·25 피란촌이 형성됐었고, 그래서 거칠고 험해 살 곳이 못 된단 소리였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우거진 나뭇가지 수풀을 헤쳐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외딴 마을이었다. 그러나 용천동 마을 어른들은 “자네가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아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 했다. ‘도선대사 비기’에 보면 “용천동은 적선한 집안의 자손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그곳에 움막 같은 창고를 짓고 혼자 먹고 자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운동권 학생 출신, 한때는 중학교 미술교사, 지금은 문화재 보수 및 한옥집을 짓는 대목수. 스무마리 넘는 진돗개를 직접 육종해보기도 한 진돗개 전문가이기도 하며, 4년간 죽령장승보존회 회장을 역임한 장승계승자.
산구석에 처박혀 조각만 하고 싶었지만 속세를 떠나는 건 쉽지 않았다. 먹고 살 돈이 떨어진 것이다. 한옥을 짓는 대목수 일에 눈이 갔다. 지구상에서 자기가 살 집을 스스로 짓지 않는 유일한 동물은 바로 인간. 그는 자기가 살 집 정돈 스스로 짓고 싶었고, 그 집은 반드시 한옥으로 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목수들은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 몇번의 퇴짜를 맞은 끝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며 간청했다. 그 결과, 지금 그의 생업은 대목수이다.
한옥 처마밑에 어울리는 개는 당연히 ‘진돗개’. ‘우리 것’에 눈을 뜨니 기르는 개까지도 전통만 고집하게 되는 모양이다. 한번 관심을 가지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좋은 진돗개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무안, 대전, 해남 전국 곳곳을 가리지 않고 즉시 출동했다. 진도의 어느 집에 어느 진돗개가 있다더란 호구조사까지 외우고 다닐 정도. “서양 개들은 먹이주는 사람밖에 몰라봐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진돗개는 주인의 친척까지 알아서 충성할 줄 알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진돗개 애호가들과 ‘토진회’라는 모임까지 결성했다. 한때는 직접 육종을 해보고 싶어 용천동 자신의 창고집 앞에 진돗개를 스무마리 넘게 키우기도 했다. 사료값을 감당하지 못해 지금은 세마리로 줄였지만.
그리고 가장 최근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장승이다. 2000년, 죽령장승보존회 회장을 맡아 4년 동안 죽령장승제를 주도했다. 그가 장승을 처음 접했던 것은 운동권 학생이던 대학 시절. 87항쟁이 가라앉기 전인 그때, 전국의 대학 앞엔 장승을 세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공동체 정신을 결속시키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구 영남대 앞에 세워진 장승은 바로 그가 깎은 것. 그는 언젠가 장승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장승학교’를 세우는게 꿈이다. “요샌 장승이 상업화하면서 깎는 테크닉만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진짜 복원돼야 하는 건 장승이 가진 공동체 정신인데 말이죠.”
#이 사람의 부인: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이 사람 때문에 두 눈에 콩깍지가 씌어 평생 자란 서울을 떠나 이 시골 산구석에 들어앉음.
그가 부인 김은주씨(40)를 만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은주씨는 영주의 사촌 집에 놀러 왔다 취미로 도자기 강습을 듣게 됐는데, 도자기 선생이 바로 그와 친한 형이었다. 그는 처음엔 은주씨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가 학생운동할 때 음대생들은 옆에서 우아하게 클래식만 연주했던 기억 때문이다. 돈 많고, 고상한 척한다는 게 그가 가진 음대생의 이미지.
그러나 은주씨는 전혀 달랐다. “음악은 ‘조화’라더니 정말 음악하는 사람들은 어디 가도 잘 융화되더라고요. 특히 콘트라베이스는 밑에서 다른 사람들을 받쳐줘야 하는 악기잖아요. 사람이 악기 따라 가나봐요.” 그는 의외로 소탈한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는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색다름에 끌렸다. 둘은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결혼했다. 서울에서 곱게 자란 은주씨는 산골짝 시골생활에 신기할 정도로 잘 적응했다. 신혼여행은 거의 전국일주 수준이었다. 진돗개 관계자들은 호남지역, 장승 관계자들은 영남지역, 처가가 있는 지역은 서울. 은주씨는 공사다망한 그의 관심사를 하나씩 공유하며 함께 전국을 돌았다.
두 사람은 몇년 전, 창고 같은 집을 허물고 멋진 한옥 기와를 올렸다. 언젠간 집 주변을 조각공원으로 꾸미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곳에서 그는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은주씨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게 꿈이다.
“삶의 원칙이오? 뭐 간단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자. 지금처럼만 계속 살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 그는 오늘도 금계리 용천동 골짜기에서 어떤 난세에도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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