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사라진 헌법 원본

황령산산지기 2005. 10. 29. 12:15
김태익 논설위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한국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결혼식 사진첩과 결혼식장 좌석 배치도가 있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후 재혼을 했고 미국은 이 사진을 1956년 입수했다. 좌석 배치도에 따르면 박헌영 부부를 중심으로 김일성 홍명희 허가이 한설야 등이 순서대로 앉은 것으로 돼 있다. 한 장의 배치도를 통해 그들 간의 권력 서열을 한눈에 알게 된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록까지 이렇게 정성껏 보존하고 있으니 자기네 관련 사항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는 2억 종 안팎이다. 이 가운데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헌법과 독립선언서 초안이다. 헌법 초안은 핵공격을 받아도 손상되지 않도록 특수 금고에 넣어두고, 대피용 엘리베이터와 자가 발전기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대영도서관에는 발명왕 에디슨의 1887년 육성, 나이팅게일의 1890년 연설, ‘율리시스’를 낭독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1924년 목소리까지 보관하고 있다. 종이 문서와 함께 영상이나 음성을 역사적 기록으로서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보물 중의 보물로 꼽히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원본이다.

▶기록을 소중히 여기고 잘 보존하는 걸로 치면 우리도 조선시대까지는 남부끄러울 것 없었다.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사도세자) 능을 다녀와 그 전후 내력과 모습을 사진같이 정밀한 세밀화(細密 )와 글로 소상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 의궤(儀軌)’가 지금도 남아있다. ‘의궤’에는 8일간의 행사에 10만냥의 예산, 수행원 1779명, 말 779필이 동원된 사실과 참여 기술자들의 이름과 주소, 복무 일수는 물론 품값이 반나절까지 계산돼 기록됐다. ‘의궤’란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 뒷날의 자료로 삼도록 보존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철저한 기록 정신 덕이었다.

▶감사원이 24개 국가 기관을 대상으로 공공 기록물 보존 실태를 감사했더니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 1948년 제헌헌법 원본이 어디론가 없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1~5차 개정헌법안은 원본을 원본인 줄도 모르고 법제처 캐비닛에 넣어두고 필사본을 귀중 기록물 보존 서고에 모셔두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례까지 드러났다. 역대 권력자들이 자기들 잘못을 감추기 위해 각종 통치 기록을 찢고 없애는 일을 되풀이하더니 이제 헌법 원본마저 실종된 나라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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