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배트맨, 다시 살아난 '거울놀이' | ||||||||||||||||||||||||
[오마이뉴스 김성준 기자]
<백설공주>의 왕비에게처럼 '거울'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되고, 그 욕망이 대답 받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거울은 객관적인 외양을 반사하는 것 같지만 한번도 '그대로는' 반사한 적이 없다. 유난히 청춘사업에 죽을 쑤는 친구들조차 거울에서 해답을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대부분 거울은 거울을 보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반사한다. 그래서 모두가 원빈이나 전지현이 될 수 없음에도 거울 앞에서는 다들 말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예쁘기만 하네. 뭐." 거울은 '중심'에 진입하지 못하는 '주변'들의 존재 양식이기도 하다. '미신을 따르는 미개한' 야만인이나, '짐승과 근접한' 흑인들, '판단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여성'들은 아직도 그들 자체로 존재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문명으로의 진입을 원하고, 예종의 상태에서 보호받는 것을 감사해하고, 심지어는 강간당하는 걸 즐긴다고까지 알려져 왔다. 이는 실제로 그들이 그런가와는 애초에 상관이 없었다. '주변'은 '중심'이 가진 욕망을 투사하는 '거울'로서만 존재했으므로. '문명화된 남성 백인'이 "있으라 하매", 그들은 거울처럼 나타나 "존재하였느니라." 그러나 가끔 '거울'도 다른 이야기를 한다. '거울'은 자기의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오로지 '반사'하는 것만으로 말할 수 있기에 때로는 힘없는 자가 발언하기 위해 기대는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거울이라고 평면거울처럼 중심의 욕망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만이 있는 건 아니다. 예컨대 '아나모르포즈'라고 부르는 일그러진 거울들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은유였고, 이리가라이의 오목거울인 '스페쿨룸'은 거울 뒤편에 갇힌 '주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SF 영화와 거울 SF의 걸작들은 거울의 상징을 활용할 줄 알았다. 미지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외계인'이나 인간의 목적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사이보그'들은 절대로 '중심'으로 올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들이었고, 따라서 거울의 다양한 기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냉전 시대의 SF들은 볼 수 있는 것만을 반사하는 거울의 특징을 이용해 '주변'에 대한 공포를 유포하고 조장했다.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이나 인간에게 반항하는 사이보그들의 이야기는 비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이용해 '인간적' 가치에 대한 신화를 만들고, '주변'에 대한 테러를 정당화한다. <스타워즈>의 초기 시리즈나 <은하철도 999>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데, 이처럼 중심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강조하기 위한 현대의 신화로서 많은 SF 영화들이 기능해왔다.
선구적인 SF영화인 <혹성탈출>에서도 '거울놀이'는 활용되는데, 원숭이들의 세계는 인간 세계의 거울로 기능한다. 인간이 '주변'에 대해 저지른 테러들을 원숭이는 인간에게 거꾸로 돌려주며, '주변'을 정복하고 지배하려고만 하는 그런 테러들이 계속될 때 인간이 '자멸'할 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경고한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 문명의 첨단을 달리는 SF 영화가 역으로 문명 비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울놀이'에 있었다.
슈퍼영웅 영화와 거울: <배트맨>의 경우 슈퍼영웅 영화는 영화로부터 별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는 관객들이나 보는 '뻔한' 오락영화로 여겨지고 있다. 슈퍼맨이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반갑다기보다는 피로감을 준다. 특히 최근의 슈퍼영웅 영화 중에 '작품'이 없었던 게 사실 아닌가. <데어데블> <캣우먼> 등과 같은 영화들이 기대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주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영웅/악당' 구도를 반복했다. 아무리 벤 애플렉이나 할리 베리 같은 유명 스타가 주연을 맡았다 해도 똑같은 얘기를 돈 들여 복습까지 할 관객은 없다. 그러나 거울의 놀이적 기능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팀 버튼에 의해 새로이 창조된 슈퍼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배트맨'이었다. 그가 만든 초기의 배트맨 시리즈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와 상관없는 최초의 슈퍼영웅 영화였다. 슈퍼영웅과 악당들이 각각 선과 악의 담지자가 되어 악당들이 벌인 이벤트에 의해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슈퍼영웅이 해결하는 에피소드의 반복을 '배트맨'이 끝내버린 것이다. 배트맨의 매력은 '악을 심판하는 영웅'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인간적인 면모에 있었다. "나는 상대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햄릿형 영웅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조커나 펭귄 같은 악당들도 절대적인 악의 담지자라기 보다는 타인들에게 상처받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원한을 '복수'하겠다는 의도만 가진 비교적 소박한 '악당'들이었다. '악당'들의 상처와 복수심리, 그리고 분열적인 심리상태는 배트맨의 그늘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기도 했다. "우린 사실 매우 닮았어"라고 말하는 악당의 대사에 배트맨의 표정은 무너진다. '중심'에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른 슈퍼영웅 이야기와 달리 배트맨은 취약한 자기 정당성 때문에 계속 위기에 빠진다. 3편과 4편을 감독했던 조엘 슈마허는 이런 배트맨 초기 시리즈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선악구도에 대한 질문없이 화려한 캐스팅으로 슈퍼영웅 서사의 공백을 메우려 했고 결국 이는 시리즈의 '재앙'이 되었다. 위기의 배트맨 시리즈를 구출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잡은 <배트맨 비긴즈>가 거울의 놀이적 기능에 집중한 영화를 만든 것이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어둠의 사도'들이라는 단체에서 수련을 받는다. 이 단체의 계율은 '악에 대해서는 용서가 필요없다'였다. 악을 심판하기 위한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수련을 마친 브루스 웨인에게는 범죄를 저지른 자를 사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 브루스 웨인은 악인이라 할지라도 무자비한 심판은 '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둠의 사도'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오히려 그를 지도해줬던 라스알굴과 대다수의 추종자들을 심판한다.
'어둠의 사도' 잔당들은 고담시에서 악을 척결하는 방법은 도시를 파괴하는 것뿐이라는 생각 하에 도시에 독가스를 유포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치명적인 계획을 실행하려는 그들의 모습에 겹쳐지는 건 악을 심판하는 '영웅'이 아니라 이유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의 모습이다. 주변을 심판하고 재단하려는 '중심'이 그들이 심판하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을 영화는 거울놀이를 통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런 '중심'의 신화를 심판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번 '배트맨'에서 어떤 이는 또 미국의 패권주의를 읽었다고 했다. 영화를 제대로 보기 바란다. 이번 배트맨이 심판하는 건 미국의 '주변'이 아니라, 아무런 근거 없이 '주변'을 심판하려는 '중심'의 패권주의이다. 거울놀이의 복권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의 초기 시리즈가 가졌던 매력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라고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거울놀이 : '내 안의 나와 다른 모습, 혹은 남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나의 모습' 다시 <백설공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왕비의 거울은 왕비의 질문에 응답함으로써 왕비의 욕망에 대답하지만, 왕비가 원하는 대답을 항상 비껴간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왕비님이 아니라 백설공주입니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거울의 교훈은 타자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 거울의 교훈은 한동안 잊혀졌었다. 거울의 놀이적 기능을 재발견한 영화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거울놀이는 왕비의 거울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거울놀이를 통해 우리는 내 안의 나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또한 그 모습이 주변화되었던 남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과연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그런 기준을 부여할 특권을 주었던가? 분명 왕비의 거울은 욕망을 그대로 반사하는 평면거울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거울의 형태는 만화경이나 아나모르포즈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실로 다양했다. 우리는 욕망을 그대로 반사하는 평면거울만을 특권화하는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입체적으로 생긴 세계에 그를 비추는 거울만이 평면이라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입체적 거울의 놀이가 '왜곡'하는 게 아니라 평면거울이 '왜곡'하는 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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