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마음은 늘 충만해 있어야

황령산산지기 2020. 10. 10. 12:50

마음은 늘 충만해 있어야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왜 두려울까?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남이 죽은 것을 보지만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니다.

 

마치 어둠 같은 것이다. 캄캄한 방에 갔을 때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른다.

어두워서 두렵다는 것은 어둠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재가신자 마하나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다.

어느 날 마하나마는 만약 이 때 내가 죽는다면 나의 운명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S55.21)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사띠를 놓쳤 버렸을 때를 말한다.

 

재가신자가 사띠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을 하고 직업을 가지면 사띠를 계속 유지하기 힘들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마하나마의 심경토로로도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이 까삘라밧투 시는 번영하고 풍요로와 인구가 많고 사람이 붐비고 거리는 혼잡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시중들거나 존경스러운 수행승들을 맞이하여 저녁 무렵 까삘라밧투 시에 들어서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코끼리와 마주치거나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수레에 마주치거나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과 마주칩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세존에 대한 새김을 잊어버리고 가르침에 대한 새김을 잊어버리고 참모임에 대한 새김을 잊어버립니다.”(S55.21)

 

 

이런 상황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 당시 까삘라 성에서는 코끼리와 수레가 돌아다녔으나 오늘날에는 자동차가 돌아다닌다.

마음을 빼앗을 요소는 너무나 많다.

 

도시에서 밤이 되면 현란한 네온싸인 간판에 눈길이 갈 것이다. TV를 보면 온갖 자극적은 것으로 가득하다.

더구나 유튜브에서는 볼 거리로 넘쳐난다. 이럴 때 넋을 잃기 쉽다. 명상주제를 잃어 버리기 쉬움을 말한다.

 

매혹적인 대상에 눈이 팔렸을 때

 

분주한 도시에서 감각적 대상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그 순간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마하나마는 삼보에 대한 사띠를 놓쳐서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었을 때 죽음을 걱정한 것이다.

악처에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타당한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S35.235)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눈이 팔렸을 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그 대상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

넋이 나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죽음이 찾아 왔다면 어떻게 될까?

그 매혹적인 감각적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마음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마음이 탐욕인 것이라면 축생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그 대상이 분노를 유발했다면 그 분노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부처님의 안심(安心)법문

 

마하나마는 삼보에 대한 사띠를 놓쳤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이에 부처님은 마하나마를 안심(安心)시켰다.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악한 죽음이나 악한 임종은 없을 것입니다.”(S55.21)라며 안심시켰다.

 

부처님은 먼저 마하나마를 안심시켰다.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안심법문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법문으로 안심시켰다.

 

 

마하나마여,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부모에게서 태어나

음식으로 부양되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찢겨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마음을 닦고, 계행으로 마음을 닦고, 배움으로 마음을 닦고, 보시로 마음을 닦고,

지혜로 마음을 닦았다면, 이 몸을 까마귀들이 삼키고, 매들이 삼키고, 개들이 삼키고, 승냥이들이 삼키고,

여러 종류의 야생동물들이 삼킨다고 해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닦여지고, 계행으로 닦여지고,

배움으로 닦여지고, 보시로 닦여지고, 지혜로 닦여진 마음은 상승하여 승화됩니다.”(S55.21)

 

 

부처님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설법했다.

몸은 물질과 같은 것으로 네 가지 광대한 존재, 즉 땅, , , 바람의 요소로 이루어졌음을 말했다.

그 몸은 부모부부터 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과 관련된 것이 유전되었지 정신과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정신은 자신이 지은 행위에서 온다고 했다.

이를 업자성정견(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라고 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 따르면, 어떤 바라문이 세존이시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없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씀했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업이 차별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이 모양 이 꼴로 있게 된 것은 부모도 아니고 창조주도 아니고 업이 주인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업이 차별한다고 했다.

각자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정신적 능력이 다른 것은 자신이 지은 업으로 인한 결과가 업보로 나타난 것이다.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부처님은 마하나마에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안심법문을 했다. 여기서 물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진다.

그런데 몸과 정신을 동일시하여 몸이 무너져서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죽는다는 견해를 가지면 단멸론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정신적 행위는 죽지 않는다. 업으로 남는 것이다. 경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를 들었다.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더하면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이 된다.

부처님의 안심법문을 보면 몸보다 정신이다.

 

몸은 무상한 것이다. 몸이 무너지면 사대로 흩어지고 날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Dhp.41)라고 했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무토막 같다고도 하지만 나무토막만도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목재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목재를 가공하여 집도 지을 수 있고, 책상도 만들 수 있고, 의자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날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용도로 활용되지 못함을 말한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마침내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이게 되니 무정하게 다른 것의 먹이가 되네.”(S22.95)라고 했다.

 

어떻게 안심시켰을까?

 

부처님은 마하나마를 안심법문으로 안심시켰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 한눈을 팔 수 있지만 그 동안 쌓아 둔 공덕이 있다면,

그 공덕의 힘으로 선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닦여지고, 계행으로 닦여지고, 배움으로 닦여지고, 보시로 닦여지고,

지혜로 닦여진 마음은 상승하여 승화됩니다.”(S55.2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상승하고 승화된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육체는 버려지지만 정신적 행위는 버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랜 세월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를 닦았다면 이런 행위는 버려지지 않고 상승하고 승화된다고 했다.

여기서 상승하고 승화된다.(ta uddhagāmi hoti visesagāmi)”라는 말은

몸이 죽은 후에도 업보로서 지속하는 개인의 마음을 말한다.

 

한번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뒤따른다. 악업을 지의면 악과보가 따르고, 선업을 지의면 선과보가 따른다.

마하나마는 삼보에 대하여 늘 사띠 했으므로 오랜 세월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를 닦았다.

이런 다섯 가지 공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승하고 승화된다고 했다.

위로 올라가서 더 높은 경지로 재생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마하나마여, 예를 들어 사람이 버터가 든 단지나 기름이 든 단지를 깊은 호수에 집어넣어 깨뜨리면,

그 단지의 파편이나 조각은 가라앉을지라도 그 버터나 기름은 상승하여 승화됩니다.”(S55.21)

 

 

버터나 기름이 든 단지는 무겁기 때문에 물속에 가라 앉는다.

그러나 버터나 기름은 가볍기 때문에 물에 뜰 것이다. 이는 업에 대한 과보로 설명된다.

유사한 가르침이 촌장상윳따 아씨반다까뿟따의 경’(S42.61)에서도 보인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그는 평소 악업을 많이 지었다.

그럼에도 가족과 친지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면

이는 마치 무거운 돌이 호수에 표면으로 떠 오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악업이 많은 자에게 아무리 천도하는 기도를 해도 죄업이 무거우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더라도 그 때 그 사람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입니다.”(S42.61)라고 했다.

 

기도에는 저주의 기도도 있다한평생 선한 업을 지은 사람에게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날지어다.”라며

저주의 기도를 한다면 정말 악처에 태어나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물밑으로 가라 앉아라.”(S42.61)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악업을 지은 자는 죄업이 무겁다.

아무리 천도의 기도를 해도 마치 단지가 호수 바닥에 가라 앉듯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선업을 지은 자는 죄업이 가볍기 때문에 마치 버터기름처럼 호수 표면에 뜰 것이다.

누군가 아무리 저주의 기도를 해도 선처에 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설령 잠시 사띠를 놓쳤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상 주제에 끈을 묶는 것처럼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는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깜깜한 방에 있으면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처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는 죽음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순간 매혹적인 대상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해당될 것이다.

 

한순간 매혹적인 대상에 눈이 팔릴 수 있다. 재가의 삶을 살다 보면 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재빠르게 돌아와야 한다. 어디로 돌아와야 할까? 명상주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경에서는 세존에 대한 새김(bhagavanta ārabbha sati),

가르침에 대한 새김(dhamma ārabbha sati),

참모임에 대한 새김(sagha ārabbha sati)이라 하여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을 말했다.

 

부처님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부처님 그 분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등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르침에 대해서는 세존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등을 기억하는 것이다.

승가에 대해서는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합니다…”등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에 대하여 기억하는 것이 사띠이다. 마치 명상 주제에 끈을 묶는 것과 같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잠시 눈이 팔려도 곧바로 돌아올 것이다.

명상주제에서 마음이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명상주제의 기둥에 마음을 묶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묶어 놓은 끈의 범위 내에서 마음이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이 매혹적인 대상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끈이 있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마음은 늘 충만해 있어야

 

마음이 늘 명상주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때 불선법을 저지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크게 낙담하지도 않을 것이다.

날씨가 춥다고 하여 마음이 추위에 빼앗겨 버린다면 허망한 것이 된다.

 

마음이 공허해졌을 때 살 맛이 나지 않는다.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허망한 생각이 일어난다.

마치 정신줄 놓은 사람 같고 넋 나간 사람 같다.

이런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마음은 늘 충만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명상주제라는 기둥에 마음의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아야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서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늘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충만된다. 이는 음악으로 충족된다.

 

하루 일과를 라따나숫따(Sn.2.1)로 시작한다.

이미우이(Imee Ooi)의 라따나숫따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충만된다.

빠알리어로 부르는 라따나경을 나직히 따라해 본다. 마음이 꽉 차오름을 느낀다.

 

생태하천을 걸을 때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진 라따나경을 듣는다.

마음이 충만해진다. 발걸음도 가볍다.

어느 시인스님이 말한 것처럼 한걸음한걸음 걸을 때 마다 연꽃이 피어오른다는 말을 실감한다.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사이

Idampi buddhe ratana paīta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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