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학자스님의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 두 가지

황령산산지기 2020. 10. 3. 18:34

학자스님의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 두 가지

 

 

주말작업을 하고 있다. 두 주가량 일감이 없어서 놀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금요일 저녁에 일감이 들어 왔다.

네 모델 아트워크 작업을 해야 한다.

추석전에 발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월요일 오전 중으로는 검도도면을 발송해야 한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일이 없어서 노는 것처럼 고통스런 것이 없는데 마우스를 잡고 클릭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토요일과 일요일임에도 주말작업을 하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내일이기 때문이다.

 

단순작업이다. 마치 농부가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것과 같다. 밭 맬 때 라디오를 들으면서 매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트워크 작업할 때 유튜브를 들으면서 작업하면 역시 시간이 잘 간다. 이럴 때 광고가 많이 나오는 것 보다는 광고가 없는 것이 좋다. BTN에서 제공하는 프로는 도중에 광고도 없고 길이도 길어서 좋다.

 

자현스님의 유튜브강연을 접하면서

 

작업중에 자현스님 방송을 들었다. 이번에 들은 것은 자현스님의 쏘댕기기-선불교연구소에서 제공한 것이다.

제목은 진쨔 무쟈게 신기한!- 세종대왕의 부처님 사리 이야기(합본)’ (https://www.youtube.com/watch?v=Z9rM2JsJvdo&t=137s )이라는 타이틀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전에 BTN에서 들어 본 것인데 제목만 바꾸어서 또 올린 것이다.

 

 

작업하면서 일없이 들었다. 아니 일을 하면서 들었다. 두 눈과 두 손은 설계에 집중하면서 두 귀는 유튜브방송에 집중한 것이다. 듣다 보니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이전에 BTN에서 들었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 두 번째로 들으면서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작업 중에 작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해당 부분을 녹취했다. 노트에 펜으로 받아 적은 것이다.

 

자현스님의 강연은 무엇이 문제인가? 두 가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승군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너무 다른 것이다. 박사학위 타이틀 다섯 개 가지고 있다는 스님의 설명을 보고서 니까야를 전혀 읽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가르침에 대한 무지 탓도 있을 것이다.

 

자현스님의 승군에 대한 인식을 보면

 

자현스님은 승군에 대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집단으로 설명했다.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역사적으로 승군의 활약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죽음에 임한 정신자세가 달라요.”라며 불교만의 독특한 문화가 작동된 것으로 본 것이다. 자현스님이 말한 것을 고스란히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들이 그런 부분이 있어요. 상대적으로 용감하겠죠. 아이 그렇지 않아요? 아니 남성집단이잖아요? 그러니까 군대랑 비슷한 거고. 훨씬 더 용감할 수 있는 구조가 있고 죽어서 갈 수 있는 구조가 있어요. 스님들은 죽어서 뭐 윤회를 한다거나 극락에 간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자현스님)

 

 

자현스님에 따르면 승군이 용감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독신인 것이다. 처자식이 있다면 함부로 싸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전쟁하다 죽으면 천국이나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이슬람의 성전을 예로 들어서 이슬람 같은 데서 자살테러가 가능한게 그 사람들은 그렇게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라고 말했다.

 

싸우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자현스님에 따르면 승군이 용감했던 것은 독신이고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놀랍게도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Yodhājīva Sutta)’(S42.3)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S42.3)

 

 

부처님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으면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를 전사자의 지옥(sarañjito nāma nirayo)’이라고 했다. 전쟁하다 죽은 자들이 가는 지옥을 말한다. 한역으로는 구소락지옥(俱所樂地獄)이라고 한다.

 

전사자의 지옥은 어떤 곳일까? 주석에 따르면 아비지옥의 한 부분으로 거기서 온갖 종류의 싸움꾼들이 환호하며 괴로워한다.”(Srp.II.103)라고 되어 있다. 싸움꾼들이 가는 지옥임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을 하기 때문에 그 싸움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는 지옥임을 알 수 있다.

 

촌장이 통곡한 이유는

 

촌장은 평생 전장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용케 살아남아 마을의 촌장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마을에 왔을 때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를 부처님에 들려 주며 맞는지 물어 보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사들의 예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S42.3)

 

 

촌장은 전사자의 하늘이 있는지 부처님에게 물어보았다. 전쟁에 나가 싸워서 죽었을 때 전사자들만이 태어난다는 천국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촌장이 들어서 알고 있다는 전자자의 하늘(parājita devana)’은 어떤 곳일까? 원어의 의미는 남에 의하여 정복된 자의 하늘의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전사자의 하늘은 환희천(sarājita devana)’이라고 한다. 전자사들이 죽으면 전사자의 천국이라는 환희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전쟁광들이 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전쟁광들의 특징은 증오심과 적개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증오없이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전쟁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전장에 임하는 전사들에게 어차피 한번은 죽는 목숨이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말할 것이다.

 

촌장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전쟁광들의 말만 믿고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반대로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들의 지옥이라 하여 아비지옥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촌장은 통곡하며 이렇게 한탄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에 슬퍼하여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사들의 옛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라고 오랜 세월 동안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S42.3)

 

 

촌장은 전사자의 천국에 가지 못한 것에 억울한 것이 아니었다. 싸우다 죽으면 천상에 간다는 말에 속은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그것도 평생동안 속아 산 것이 억울해서 통곡한 것이다.

 

천도재는 헛불공이라고

 

자현스님은 제사지내는 것에 대하여 공덕이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천도재에 대한 것이다. 천도재를 여러 번 지내는 것이 효과가 없음을 말한다.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해 보지 않아서 말한 것처럼 들린다. 자현스님의 천도재에 대한 견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백중 때가 되면 저에게 늘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 매번 백중은 하늘에 갈 만하면 또 부르는 것이 아니냐, 귀신이 가다가 불러서 못가는거 아니냐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 아니 안궁금하세요? 올리면 천도가 된대며? 천도가 되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잖아? 아이 그렇지 않아요?”(자현스님)

 

 

자현스님에 따르면 천도재를 매번 지내는 것에 대한 불합리성을 말하고 있다. 이미 천도재를 지내서 좋은 곳으로 보냈는데 또 다시 천도재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다시 부르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미 간 사람 것 해봐야 그거는 헛불공하고 있는 거고. 그렇잖아요.”라고 말했다.

 

자현스님은 천도재 하는 것에 대하여 헛불공이라고 했다. 이미 윤회하여 다른 세계에 태어난 부모를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천도재를 한번만 했으면 되었지 자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천도재를 제사의 개념으로 본다면 자주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사찰에서 재정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신도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좋은 곳에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어디까지 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가 이런 사실을 알려 준다면 천도재를 여러 번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부모가 어느 곳에 있는지 어디까지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자현스님은 우스개 소리로 갈 때 애들한테 카톡보내고 가라고.”라며 부모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현스님은 나는 간다. 나는 빼도 된다. (허허) 나는 다음부터 빼라. (허허). 그렇게 안하면 방법이 없어. 누구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거야.”라고 말했다.

 

천도재를 제사의 개념으로 본다면

 

어떤 이는 한국불교가 천도재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사찰에서 재정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신도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천도재를 제사의 개념으로 본다면 자주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십구재나 천도재 등 각정 불공은 사찰의 주요한 재정수입원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십구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번, 매년 천도재 올리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제사에 대한 부정이다.

 

천도재를 제사의 개념으로 본다면 얼마든지 여러 번 올릴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자눗쏘니의 경’(A10.177)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하고, 욕거리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착을 갖고, 악의의 마음을 품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아귀의 영역에 태어납니다.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은 해당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사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A10.177)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제사는 아귀의 영역에 태어난 부모나 조상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죽은 부모나 조상이 육도 중에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는 아귀계에 태어난 조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제사공덕이 있는 이유

 

부모나 친척, 조상이 아귀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에 태어났다면 제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예를 들면 천상에 태어났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신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신들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A10.17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육도 중에서 아귀계를 제외한 세계에서는 각 세계에 적합한 음식이 있다. 천상에는 천상의 음식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음식이 있고, 아수라는 아수라의 음식이 있고, 축생은 축생의 음식이 있고, 지옥은 지옥의 음식이 있다. 오로지 아귀게만 아귀의 음식이 없다. 그래서 아귀계 존재들은 인간의 제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에 해당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제사는 아귀계에 떨어진 중생들을 위한 제사가 된다. 이는 불교에서 모든 제사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절에서 매번, 매년 지내는 천도재는 일종의 아귀계 중생을 위한 제사라고 볼 수 있다.

 

부모나 친천, 조상이 죽었을 때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자현스님 말대로 조상이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요즘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카톡으로 알려 준다면 매번, 매년 천도재를 지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제사 지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귀계를 위한 제사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제사 지내는 데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바라문이여,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라문이여,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A10.177)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타당하다. 선망 부모가 설령 아귀계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귀계 중생들을 위한 제사에는 공덕이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이 기나긴 세월을 육도윤회하면서 어느 누구도 한번 이상 아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자현스님의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 두 가지

 

자현스님의 강연은 재미있다. 그리고 매우 유익하다. 자현스님 특유의 유머와 맛깔나는 이야기를 들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듣고 나면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 강연을 듣고 건질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때로 치우친 견해를 접한다. 그것은 동아시아불교, 특히 중국불교에 치우친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불교를 제외한 다른 전통의 불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현스님은 이 시대 최고의 멘토이다. 스님이면서 박사 타이틀이 다섯 개 가진 것은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 될 것이다. 아니 세계적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학다식한 스님의 강연에도 헛점은 보인다. 그것은 초기불교에 대한 무지이다. 이번 강연이 그렇다.

 

자현스님의 승군이야기와 천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님의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를 알 수 있다. 스님이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S42.3)을 읽었다면 승군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스님이 앙굿따라니까야 자눗소니의 경’(A10.177)을 읽었다면 천도재와 같은 제사공덕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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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가 안됩니다.

전륜성왕이 출현하면 좋겠지만 이상이고 실제로는 전쟁없이 덕으로 정복하고 그리고 덕으로 다스린 왕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처럼 덕으로 다스렸다해도 전쟁은 수행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로서 전쟁이 많았다고 알고 있고

가비라국도 군인을 유지하고 훈련하고 이웃나라와 전쟁을 안 했을 리가 없으며,

약소국인 가비라국의 왕자로서 정치적 , 군사적 정세등 현실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부처님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위해 목숨걸고 싸운 군인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견해인데 이상에 치우친 그런 말씀을 과연 부처님이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운동도 서산대사와 같은 깨달은 도인이 앞장서서

'나라가 있어야 佛法도 있다'고 하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해서 적을 죽이고 물리치려 한것이고

원광법사도 세속오계에서 殺生有擇,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전쟁에서는 사력을 다해 적을 죽이라고 한 것인데

당시 상황에서 전쟁에서 적을 죽이면 전사자의 지옥에 가니까 적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라서

내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결딴나는 상황에서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않고,

신라를 침공한 적에게도 무저항으로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 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부처님도 자신의 모국인 가비라국이 멸망하는 것을 막으려고 침공하는 코살라 국왕앞에 나가서 가급적이면 중지시키려 노력했고, 결국 몰살당하자 비통해하셨습니다. 전쟁은 아니라도 내 가족이 강도를 당하는 상황에서 내가 강도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중생의 현실을 있는대로 파악하고 苦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신 부처님께서 전쟁에서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도 불가피하게 적을 죽여야 되는 냉엄한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느 나라에도 적용할 수 없습니다.


불자들중에서도 이 말씀을 근거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니까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신 것은 없을 까요?


만약 1명을 죽여서 100명을 살릴 수 있다면 1명을 죽여도 된다는 얘기가 부처님 가르침중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 가르침이 불경에 근거가 있다면 이런 자세가 현실에 합당한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