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살면

황령산산지기 2020. 8. 15. 09:01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살면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떤 이는 사는데 이유가 있냐?”라고 말할지 모른다. 산천의 초목이 이유가 있어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야생의 축생이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축생과 같은 삶이 있다. 두 가지 이유로 산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식욕과 성욕으로 사는 것이다. 모두 생존과 관련이 있다. 먹어야 사는 것이다.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 할 것이다. 자손을 남기는 것이다. 조상이 그렇게 해 왔듯이 발정기가 되면 짝을 지어 후손을 남기는 것이다. 이것이 축생의 살아 가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식욕과 성욕으로만 산다면 사실상 축생과 다름없는 삶이다. 먹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또한 가장 큰 행복이라면 이는 축생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축생은 지혜도 없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지도 못하고 남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축생의 삶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삶이다. 약한 것은 강한 자의 먹이가 되게 되어 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축생 같은 삶이 된다. 축생도 자신의 새끼는 끔찍이 챙기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지혜가 있고 인간만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 또한 인간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남들이 보기에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할 수 있다.

 

 

글이 길다고 하는데

 

최근 글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글이 너무 길다는 지적이다. 글이 길어서 읽다가 지쳐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미안하고 죄송하기 그지없다. 바쁜 시대에 긴 글을 읽음으로 인하여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하고 죄송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인들이 찾지 않는 것 같다. 그 쉬운 좋아요추천한번 눌러 줄 법한데 침묵하는 것을 보니 글을 읽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글 쓰는데 하루 일과의 반을 보낸다. 글을 구상하는 것까지 합하면 하루 이상 때로 며칠 걸린다. 이렇게 장시간 들여 쓴 글을 읽어 주는 사람도 있다. 글쓰기로 오전을 다 보냈을 때 남은 것은 A4 4-5페이지에 달한다.

 

쓰는 시간에 비례하여 글의 양도 늘어난다. 그러나 광속의 시대에 긴 글을 읽어 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한번 읽는데 만 수십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비심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글은 짧아야 잘 읽힌다. 거기에다 감동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래서일까 신문지면이나 잡지 등 종이로 된 출판물에 글을 쓸 때는 가능한 짧게 써야 한다. 줄이고 줄여서 핵심만 써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글쓰기에는 지면의 제한이 없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있어서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글이 갈수록 길어 지는 것 같다.

 

자비의 글쓰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글은 가능한 쓰지 않는다. 연예인도 아니고 셀럽도 아닌데 개인의 신상에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대신 경전문구나 주석을 인용하는 글쓰기를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는 어떻게 보면 자비의 글쓰기라고 볼 수 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나중에 큰 돈을 벌면 크게 보시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 속된말로 이기 쉽다.

 

비록 작은 금액이라도 자신의 능력 내에서 보시한다면 매우 값진 것이 된다. 가난한자의 보시는 비율로 따진다면 부자가 조금 내는 것 보다 더 큰 공덕을 짓는 될 수 있다. 법보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경전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힌다.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자신이 쓴 것으로 될 수 있다. 이는 가르침의 도둑이 된다. 부처님이 한 말씀을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공부이고, 또 하나는 타인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자리이타행이라 할 수 있다.

 

경전 문구 하나라도 알려 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공덕행이고, 또하나는 자비행이다. 법보시를 해서 공덕행이 된다. 경전의 문구나 주석의 내용을 하나라도 더 알려 주는 것은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주고

 

아는 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은 자비심에 바탕을 둔다. 자비심이 없다면 힘들게 긴 시간 들여서 글을 쓸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 알려 주고자 한다.

 

보시는 능력껏 하듯이, 아는 만큼 알려 주어야 한다. 이 다음에 부자가 되어서 큰 보시하는 것은 실현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이 다음에 공부가 다 된다음에 알려 주려 하는 것 역시 실현되기 힘들다. 지금 여기에서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지혜이고 자비심일 것이다. 그리고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간다. 감각에 충실하는 삶은 욕망과 관련이 있고, 감정에 충실한 삶은 분노와 관련이 있다. 먹는 것을 즐긴다면 감각에 충실하는 삶이 된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은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사는 것이 된다. 짐승도 이런 삶을 산다.

 

감각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쾌락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감각적 쾌락과 관련이 없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등산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힘만 들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시간낭비라고 여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즐기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길 것이다.

 

세상에 무의미한 일은 없다. 남들이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청소부가 거리를 쓸 때 세상을 깨끗이 한다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숭고한 일이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남아 있지 않지만, 글은 일단 써 놓으면 남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쓴다. 한번 쓰고 나면 버릴 것이 아니다. 모두 모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상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경전의 아름다운 문구나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주석을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공부가 덜 되었기는 하지만 아는 만큼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도 글을 쓴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 주는 삶을 살고자 한다.

 

죽어도 좋아?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등산이나 글쓰기는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오로지 안락만을 추구하는 자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은 허무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단지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감각적 욕망은 거친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목숨을 건은 것 같다.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목숨을 걸면 영화에서처럼 죽어도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감각적 욕망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허무한 것이다.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이 있다면 덜 허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을 배제하는 것에서 이룩된다. 그래서 초선정의 정형구를 보면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vivicceva kāmehi)”(S45.8)로 시작된다.

 

감각적 욕망을 여읜 행복이 있다. 선정에서 행복은 감각적 욕망을 여읜 행복이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을 여의게 되면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다라고 했다. 이런 행복은 꽤 오래 간다. 잔잔한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욕망에 따른 행복은 거친 행복이다.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에 목숨을 걸어 보지만 허무하게 끝난다. 그러나 감각을 여읜 행복은 잔잔한 행복이다. 반드시 선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좌선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에 집중하고 있다면 일하면서 맛보는 행복도 감각을 여읜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운동에 열중해도 잔잔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등산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다. 욕망이 배제된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감각과 감정에 충실한 살면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는 삶을 살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감각적 쾌락에 따른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허무적이다. 즐거운 느낌이 지나면 텅 비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허()와 무()가 된다.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 된다. 불만족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범주에 들어간다.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삶을 살면 충만한 삶이 된다. 이런 이유로 글을 쓴다. 글을 쓸 때 만큼은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롭다. 글쓰기 삼매에 들어 글이 완성되면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인터넷의 바다에 띄어 놓으면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지도 모른다.

 

불교인으로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다.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악업이 된다. 감각과 감정에 충실한 살면 악업이 되는 것이다.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을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부정한다. (A3.135)

 

 

2020-08-12

담마다사 이병욱